[공공서비스디자인의 재발견 12] 레지블 런던 프로젝트 알아야 걷는다
월간지방자치, 2012.07.
* 출처 : 지방자치연구소
이 글은 과거 월간지방자치에 연재되었던 공공서비스디자인 특집 기사를 재게시한 글입니다. https://www.lgrc.co.kr/
김경모 시니어 디자이너 (어플라이드(Applied, 영국 디자인기업))
디자인은 단순히 사물을 예쁘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디자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였다. 하지만 이제는 디자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많이 정확해졌다. 디자인이 스타일링과 기능 개선의 영역을 뛰어넘어 경험, 경제, 윤리, 정책, 문화 등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자인이 공공 서비스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일까? 이 글을 통해 소개할 '레지블 런던'은 표면적으로 '런던의 통합형 보행자 길찾기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이지만, 실상은 콘셉트 단계에서부터 관광객의 심리적 안정감, 골목 상권의 활성화, 예산의 중복 투자 방지, 지하철의 부담 감소 등 여러 가지 도시 문제 해결의 다목적 포석을 둔 프로젝트이다.
2005년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은 "2015년까지 걷기 좋은 런던을 만들자"는 선언을 한다. 당시 켄 리빙스턴 시장은 걷기의 활성화가 도시의 사회, 경제, 치안, 심리, 문화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일찍이 인지하고 더 나은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어젠다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이 어젠다에 부합하기 위해 어플라이드는 런던의 보행 환경을 연구하며 '읽기 쉬운 런던'(레지블 런던 Legible London) 프로젝트 콘셉트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보행 이동의 활성화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들
시민들과 관광객의 보행 이동 활성화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긍정적인 효과들을 다양하게 가져온다.
첫 번째로는 골목 및 지역 상권의 활성화 효과다.
사람들이 '걸어서 15분' 거리를 자동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보행 이동하면, 걷는 동안 지나치게 되는 수많은 가게들을 둘러보게 될 것이고, 이는 상품 및 서비스의 구매로 이어진다. 반면 충분히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를 차량으로 목적지 바로 앞까지 이동하면, 중간에 옷가게를 둘러볼 기회나 겨울철 길거리 음식을 사 먹을 기회, 미처 몰랐던 골목의 작은 갤러리를 둘러볼 기회 등을 모두 놓치게 된다.
두 번째는 길거리 치안 및 안전성 향상의 효과다.
젊은 여성이나 노약자가 홀로 길거리를 걸을 때 심리적 위축감을 느끼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은 도시 당국의 의무이다. 길거리에 '주변 시선', 즉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러한 치안 문제의 위험성은 반비례한다.
세 번째는 낙후된 지하철 시설의 부담 감소 효과인데, 이는 런던 고유의 문제였다. 한국과는 달리 런던은 아직도 좁고 낙후된 지하철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도입된 지 워낙 오래되다 보니 물리적으로 시스템 개선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보행 인구 증가를 유도하여 지하철에 가중되고 있었던 부담을 덜어줄 계획이 필요했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인 경제, 사회 문제 등을 염두에 두면서 런던의 보행 환경을 조사해보니 런던의 당면한 과제는 보다 더 명확해졌다.
도시 보행 환경의 문제점들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런던은 도심 지역에만 32개의 각기 다른 길찾기용 사인 시스템이 무질서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각각 다른 행정 주체들이 거리에 설치한 안내 표지들이었다. 32가지의 각기 다른 시각 디자인 문법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이러한 사인 시스템들은, 모두 한 생활권 안에 있었음에도 '사용자 중심'의 안내 표지 체계가 아니라 '행정 기관 중심'의 안내 표지 시스템이었다.
이런 상황을 서울에 비유하자면, 한 개인이 오전에 강남역에 내려서는 강남 지역만의 고유한 시각 디자인 문법을 터득해야 했고, 오후에 여의도로 넘어가서는 여의도만의 시각 디자인 문법을 다시 새롭게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행정구역별로 일관되지 못한 시각적 언어는 사람들의 보행 이동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특히 도시 이동의 최약자인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이러한 실정과 맞물려 독립 컨설턴시인 콜린 부캐넌(Colin Buchanan)은 하루 2만 5천 명이 런던 도심에서 길을 잃는다고 추산하였다. 또한 런던 도심의 보행자 중 11%가 가장 빠른 길로 보행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있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렇듯 '공급자 중심', '행정 구역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던 보행자용 정보 표시 시스템을 '사용자 중심'으로 통합화 작업을 했을 때 런던이 도시 차원에서 기대할 수 있는 변화와 효과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당시 런던 도심에 설치되어 있던 안내 표지들


그림: 레지블 런던 정보 표시체들이 설치된 모습
길찾기 정보 표시 시스템의 통합화 작업으로 기대할 수 있었던 변화
첫 번째는 관광객들에게 "걸어다녀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길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관광객은 그만큼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그러한 관광객은 같은 도시에 재방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관광객들이 마음 놓고 편하게 도시와 지역을 돌아다니고 즐길 수 있도록 읽기 쉽고 사용하기 편한 길찾기 정보 표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런던에 많은 방문객이 예상되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염두에 둔 사항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걷기의 활성화에 따른 유동 인구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지역 상권의 활성화였다.
조사를 해보면 지역민들도 자기가 사는 동네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샅샅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느 골목에 어떠한 가게가 있는지, 어느 구석에 어떠한 미술관, 어느 문화시설이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효과적으로 제공해주면 사람들은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구입하고, 서비스를 구매하게 된다. 개인의 입장에서 지역 상권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돈을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러한 사인 시스템 통합 작업은 도시 길찾기라는 하나의 주제로 각 행정 기관별로 중복 투자되던 예산이 한 곳으로 조정 및 통합되어 사용자에겐 하나의 이해하기 쉬운 정보 표시 체계를 제공해주고, 런던 시의 입장에서는 전체적인 예산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레지블 런던의 디자인 콘셉트
그리하여 레지블 런던의 기초 연구는 시작되었고, 가장 첫 번째 콘셉트로 '보행'을 교통 수단의 하나로 접근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어떻게 하면 관광객들과 시민들을 위한 보행 정보도 지하철이나 버스 정보만큼 체계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집에서 나서는 시점부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예측 가능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기초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걷기의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었던 런던 고유의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의 디자인 명작인 지하철 노선도였다.
이 노선도가 워낙 널리 사용되다 보니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5분, 10분 거리도 "노선도만 보아서는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할 것만 같은 효과"를 사용자에게 유발하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의 조사 결과 런던 도심의 지하철역 간의 이동 중, 109가지의 경로는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걷는 것이 빠르다는 결과가 나왔고, 도심의 많은 지하철역들이 걸어서 5분 거리, 15분 거리에 서로 위치하고 있었다. 아울러 콜린 부캐넌의 조사로는 하루에 1만 8천 명의 지하철 승객들이 "걸어서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런던 도심의 목적지를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조사되었다.
이렇듯 레지블 런던의 디자인 개발 과정 중 주요한 목표 중 하나는,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지하철역 주변의 정보만 습득하고, 지하철역 주변 지역만 이동하여 서로 분리된 채 이해하고 있었던 각각의 지리 정보를 서로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정책 어젠다를 디자인으로 풀어내기
2007년 런던의 쇼핑 지역 본드 스트리트(Bond Street)에 레지블 런던 시스템의 시범 설치가 결정되고 어플라이드는 런던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정보 표시 체계를 디자인하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었으며, 장애인 협회와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레지블 런던의 사용자 층을 넓히며 유니버설 디자인을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레지블 런던의 취지에 맞게 19개의 시범 정보 표시체들이 설치됨과 동시에, 과거 무질서하게 설치된 정보 표시체 40개가 제거되었다.
실무적인 디자인 개발 각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레지블 런던 안내 표지에 포함될 지도의 사용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지도 하나하나 사용자 중심의 heads-up 표기(북쪽이 상단에 표기되는 것이 아니라, 지도 사용자 시선의 앞쪽이 지도 상단에 표기되도록 하는 것)를 고수했고, 앞서 언급한 보행 인구 증가를 위해, 걸어서 15분 거리, 5분 거리 반경을 표시해주었다. 이로써 사용자들은 '인근 지하철역까지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우리 머릿속에서 '장소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랜드마크들을 지도상에서 3D로 강조하여 사용자들의 방향 감각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했다. 상세한 공공 정보, 횡단보도와 건물 출입구 같은 보행 관련 정보도 빠지지 않고 표기되었다.
레지블 런던 시스템 설치 후 평가
시범 설치된 안내 표지들을 런던 교통청(Transport for London)과 제3의 기관에 의뢰해 사용자 영향 평가를 시행한 결과, 85%의 만족도를 보였으며 지역 내에서 16%의 이동 시간 단축을 가져다주었다. 현재 자기 위치가 확인이 가능하다고 한 응답자가 9%에서 15%로 증가하였고, 62%는 이 레지블 런던 시스템 때문에 평소 더 걷고 싶어졌다고 응답했다(PERS: Pedestrian Environment Review System).
또한 레지블 런던 시스템이 걷기의 경험을 향상시켜 하루 6천 5백에서 1만 2천 가지의 신규 '보행 이동'을 창출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투자 대비 효과가 높게는 1달러당 5.3달러까지 효과를 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Colin Buchanan).
2007년의 성공적인 시범 설치 이후 레지블 런던은 2012년 현재 600개 규모의 정보 표시체들로 확대 설치되어 있고 연간 7천 8백만 명이 이용하는 길찾기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통합형 보행자 길찾기 시스템인 레지블 런던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대비해 현재도 확장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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