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이 가장 많이 본 디자인 뉴스
디자인인사이트
인스타 아이콘 인쇄 아이콘

[기고, 인터뷰] 엔지니어의 도시, 청년이 머물고 싶은 도시로 - 정선희 창원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수행사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엔지니어의 도시에서, 청년이 머물고 싶은 도시로

정선희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2026.2.21.

 

"창원은 어떤 도시인가."

창원문화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은 이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보다 질문이 더 많았습니다. 4년에 걸쳐 로컬에서 서비스디자인 기반 리빙랩을 실험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컸지만, 동시에 지역과 산업단지라는 단단한 구조 속에서 "청년", "서비스디자인", "리빙랩"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과연 실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청년의 감각과 실천력, 사람의 경험을 중심으로 문제를 이해하는 서비스디자인의 방법론, 그리고 현장에서 답을 찾는 리빙랩이라는 방식은 분명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창원은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 제조업을 지탱해 온 국가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성장한 도시입니다. 기계와 방위산업이 집적된 대표적인 산업도시이면서, 산업과 주거가 함께 설계된 계획도시이기도 합니다. 일과 생활이 가까이 놓여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도시입니다. 국내 방산 매출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산업 생태계와 수천 개의 제조기업,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함께 만들어 온 한국 산업의 핵심 공간이기도 합니다. "뭐든 만들 수 있는 엔지니어의 도시"라는 표현이 창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번 리빙랩에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산업의 규모나 성과가 아니라,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청년은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리빙랩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대표단 인터뷰와 SNS 다이어리, 서비스 사파리를 통해 청년 노동자와 창업가, 공무원과 지역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다섯 번의 시민참여 워크숍과 설문조사, 전문가와 청년기획자들과의 만남을 거치며 수백 개의 아이디어가 쌓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산단 노동자를 프로젝트의 중심에 어떻게 놓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창원은 일할 수 있는 도시이지만, 청년이 머물고 싶은 도시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산업단지는 강력한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그 안에서의 일상과 문화, 관계의 경험은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했습니다. 인식의 단절, 공간의 단절, 관계의 단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산업단지가 도시를 지탱하는 중심이지만 시민의 경험 속에서는 여전히 '공장단지'로 인식되는 간극도 존재합니다.

문화선도산단사업을 통해 새로운 건물과 거리들이 조성될 예정입니다. 그러나 공간을 만드는 일과 그 공간이 실제로 사용되는 경험 사이에는 또 다른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 공간을 사용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편안하고 즐겁게 느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청년디자인리빙랩을 통해 우리는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했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자체가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창원의 숨은 보물 같은 자원과 장점들을 발견한 일, 다양한 청년들과 문화기획자, 지역 활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습니다.

2026년은 이 방향을 실제 현장에서 실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이디어를 프로토타이핑하고, 노동자와 청년의 경험 속에서 검증하고, 피드백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가는 실험을 계속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번 리빙랩을 통해 확인한 것은, 정책이 완성된 이후 시민의 반응을 확인하는 방식보다 정책 이전 단계에서 시민의 경험을 함께 이해하고 작은 실험으로 방향을 검증하는 과정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행정의 부담을 줄이고 정책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단지의 미래를 바꾸는 일은 거대한 계획 하나로 완성되기보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검증되는 작은 시도들이 축적될 때 가능해질 것입니다. 청년디자인리빙랩에서 시작된 이러한 실험적 접근이 문화산단 사업을 넘어 산업단지 정책 전반에서 활용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합니다.

창원은 이미 충분히 강한 산업도시입니다. 이제 그 위에 사람의 경험을 중심에 두는 정책 설계가 더해질 때, 산업단지는 단순히 일하는 공간을 넘어 청년이 머물고 싶은 도시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빙랩은 그 변화를 준비하는 작은 출발점이라고 믿습니다.

 

2026.2.12. 정선희

정선희: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산업디자인전문회사로 UX리서치 기반의 디자인전략, 서비스경험디자인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가전 기업(대우, 삼성)에서 제품디자이너와 디자인전략가, 일했고, 대학(유니스트)에서는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 학부장을 맡아 디자인융합교육·연구를 진행했다. 해외에서는 글로벌 가전UXUI, 디자인NGO에서 서비스디자인과제를 수행했다. KAIST 산업디자인 학사, 하버드대학 건축디자인 석사.

 

>> 2025 창원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운영 결과 모음

 

 


사진: 창원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자료집에서 발췌


 

정선희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 한국디자인진흥원 대담

2026.2.21.

정리 : 한국디자인진흥원 (* 중간보고, 결과보고회, 회의록 등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함)

 

진흥원: 창원문화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 1차년을 돌아보는 대담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대표님 소개부터 부탁합니다.


정선희: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입니다. 산업디자인전문회사로 제품 경험, 서비스, 실행 프로세스를 함께 다루는 일을 해왔습니다. 가전 기업에서 제품디자이너와 디자인전략가로 일했고, 대학에서는 디자인 및 인간공학 영역을 맡아 교육·연구를 했습니다. 해외기업에서도 글로벌 가전 UI/UX, 사회적기업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제 강점은 분석적 디자인리서치와 직관적 디자인 결과물의 간격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전략과,  '현장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실무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흥원: 대표님이 강조하신 표현이 있습니다. "산단 노동자를 프로젝트의 중심에 놓을 수 있겠는가"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풀어주면 무엇입니까?


정선희: '의견을 듣는다'가 중심이 아닙니다. '의사결정의 기준을 그들의 경험으로 바꾼다'가 중심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디어가 있어도 산단 노동자의 하루 시간표, 이동 동선, 휴식의 틈, 관계의 구조, 정보 획득 방식에 맞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리서치가 단지 공감의 도구가 아니라 실행 가능성을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진흥원: 그러고 보니 지난 회의에서 관련 질문도 있었습니다. 산단 근로자가 핵심 수요자인지, 창원시의 청년이 핵심 수요자인지 혼재돼 보인다는 질문입니다.


정선희: 그 질문은 타당합니다. 저희도 초기에 그 고민을 강하게 했습니다. 결론은 '둘을 분리하기 어렵다'입니다. 창원 산단이 지속가능해지려면 산단만 좋아져서는 부족합니다. 도시 자체가 매력적이어야 청년이 유입되고, 그래야 산단도 인력을 확보합니다. 다만 폭넓게 보되, 최종 아이디어는 현장 근로자 중심으로 정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1차년 후반부에는 "이 아이디어가 근로자의 삶에 어떤 값어치를 주는가"를 더 명확히 쓰는 방향으로 정리했습니다.

 

진흥원: 창원이라는 도시의 자산이 근로자에게 어떤 가치로 전환되는지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요구에 대해 대표님이 생각하는 답은 무엇입니까?


정선희: '자산의 존재'와 '경험의 전환'은 다릅니다. 창원의 가로수길, 공원, 유휴공간, 산업 정체성은 자산입니다. 하지만 개인이 일상에서 '내 것'처럼 느끼고, 관계와 루틴으로 쓰지 못하면 가치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가 제안한 것이 '마이크로 경험'과 '루틴'입니다. 짧은 점심시간, 퇴근 직후, 출퇴근 동선 같은 미시 시간대에 경험이 붙어야 자산이 가치로 바뀝니다.

워크숍만으로는 깊이가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패널 설문도 진행했고, 시민대표단 인터뷰, SNS 다이어리, 서비스 사파리 같은 방법을 결합했습니다.
별도로 심층 인터뷰도 진행했습니다. 초기 단계에서 24명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후에는 산단 근로자, 공무원·공공기관, 대학·병원, 청년 사업가 등 이해관계자와 사용자를 폭넓게 만나 데이터를 보강했습니다. 한 산단 근로자분이 "점심 먹고 30분 남는데 갈 데가 없어요"라고 하셨어요. 이 말이 방향을 바꿨습니다. 우리는 저녁 문화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점심 30분이 핵심이었던 겁니다. 

 

진흥원: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12개 아이디어들이군요.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반복·공유·확산되는 문화 루틴"입니다. 대표님이 말하는 '루틴'은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릅니까?


정선희: 프로그램은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루틴은 행동의 리듬으로 남습니다. 예를 들어 10분 거리에서 점심시간에 잠깐 들를 수 있는 '마이크로 틈새 문화 존'은 루틴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규모가 큰 시설은 완공되기 전까지는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2차년은 시설이 아니라 '경험 단위'를 먼저 실험해야 한다고 봅니다.
 

 


 > 창원산업단지 서비스디자인 12 과제 아이디어 모음

 

 

진흥원: 대표님 발언 중에 '창원은 밤에 불이 꺼지는 산단'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조건이 문화 실험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선희: 밤의 부재는 관계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퇴근 후에 머물 공간이 없으니, 커뮤니티가 생기기가 어렵습니다. 현재는  기존 문화시설 조차 저녁에는 모두 문을 닫는다. 청년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공간이 없는 상황입니다. 창원산단에서는 퇴근 직후 '이른 저녁'이나 점심 등 현실적으로 문화실험이 가능한 공간과 시간대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저녁의 일상이 살아야 합니다.

 

진흥원: 수행사 입장에서 가장 강하게 제기한 쟁점이 '프로세스 유연성'입니다. 리빙랩이 서비스디자인 기반이라면, 회사별로 프로세스를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정선희: 지금 방식은 "워크숍 5회" 같은 고정 포맷이 먼저 있고, 그 안에 서비스를 끼워 넣는 느낌이 듭니다. 서비스디자인은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코디자인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어떤 단계는 더 길어야 하고, 어떤 단계는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단계가 고정되면 '리서치 따로, 아이디어 따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서비스디자인 기반 리빙랩'의 내부 정의가 먼저 정리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진흥원: 하나 더 있었습니다. 보고용 자료 제작하느라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시간이 부족했다는 지점입니다.

 

정선희: 맞습니다. 아이디어를 낸 다음이 진짜 시작인데, 포맷 정리, PPT, 영상, 문서 작업에 시간이 흡수됩니다. 그러면 더 만나고, 주체를 찾고, 실행 조건을 확인할 시간이 사라집니다. 1차년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2차년은 '프로토타이핑과 검증'에 시간을 다시 배분했으면 좋겠습니다.

 

진흥원: 진흥원 관점에서는 2차년 핵심을 '정책 프로토타이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행정의 '선행 디자인'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님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선희: 방향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행 전에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작은 실험으로 반응을 데이터화해 정책 결정을 돕는다는 점에서 선행 디자인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프로토타이핑은 '아이디어의 시연'이 아니라 '정책 리스크의 검증'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검증할지, 어떤 지표로 판단할지, 실패하면 어떻게 접을지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진흥원: 마지막 질문입니다. 청년디자인리빙랩이 2차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하나 고른다면 무엇입니까?


정선희: '시간을 현실에 맞게 배분하는 원칙'입니다. 문제 정의를 위한 리서치 시간, 실행 조건 확인 시간, 프로토타이핑과 피드백 시간입니다. 이 세 가지가 확보되면 결과물은 나옵니다. 확보되지 않으면 결과물은 나와도 이야기만 남습니다. 2차년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동하는 경험을 남겨야 합니다.

  

진흥원: 창원은 엔지니어의 도시로 이미 강합니다. 이제는 청년이 머물 수 있게 일상의 미시적 경험과 관계·커리어 구조를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어질 2차년도 기대가 됩니다. 오늘 대담은 그 출발점을 확인하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록 버튼 이전 버튼 다음 버튼
최초 3개의 게시물은 임시로 내용 조회가 가능하며, 이후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 임시조회 게시글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