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픔’과 ‘불완정성’에 주목해야 AI 시대
최근 몇 년간 생성형 AI 이미지의 발전은 눈부셨다. 성능은 물론 접근성과 편의성까지 크게 발전해 이제 누구나 문장 몇 줄 만으로도 과거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려야 했던 그림을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디자인 편집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고, 프롬프트 좀 만진다는 이들은 다양한 스타일 변주와 인간적인 터치를 더해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며, 스스로를 ‘AI 아티스트’라고 자칭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소셜 미디어의 풍경은 이런 완벽한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매끄럽고 화려한 AI 이미지 대신, 삐뚤빼뚤한 선, 조악한 픽셀, 마치 초등학생이 마우스로 대충 그린 듯한 ‘엉망진창’의 그림들이 타임라인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밌는 점은 해당 이미지들이 일부러 AI에게 대충 그려달라 요청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완벽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최첨단 AI에게 사람들은 왜 굳이 세상에서 제일 하찮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그림 프롬프트는 무엇?

AI가 세상에서 제일 하찮게 그려준 디지털 인사이트 로고(자료=챗GPT 이미지 생성)
국내에선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그림’ ‘그림판 낙서 프롬프트’이라고 불리며, 해외에선 ‘The MS Paint-style prompt’ 등으로 알려진 해당 이미지 프롬프트는 챗GPT, 제미나이 등 AI 서비스에게 사진을 주고 제일 서툴고, 휘갈겨 쓴 듯, 완전히 형편없는 방식으로 그려달라고 요구하는 트렌드다. 원조 프롬프트는 다음과 같다.
“첨부한 이미지를 개발새발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선으로 그려줘. 배경은 흰색, 그림판에서 마우스로 그린 것 같은 맞는 듯 아닌 듯 비슷한 듯 아닌 듯 아리까리하게 픽셀 단위의 그림으로 하찮음을 제대로 뽐내줘. 아 됐고 그냥 니맘대로 그려.”
이 독특한 유행은 놀랍게도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한국에서 시작됐다. 처음 스레드에서 프롬프트를 공유한 원작자 지원재 씨는 유명 외신 포브스(Forbes)와의 인터뷰를 통해 고품질 AI 시대 이미지들에 대한 반발감으로 시작했다며 배경을 밝혔다. 특히 그는 “온라인에서 점점 더 세련되고 시네마틱하며 고품질인 AI 이미지를 계속 보게 되었다. 분명 인상적이긴 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해지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하며 트렌드의 출발점을 짚었다.


X(구 트위터)에서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그림 프롬프트 및 이미지들을 공유하고 있는 샘 알트먼 오픈AI CEO와 그렉 브록만 오픈AI 사장 겸 공동 창립자 (자료=X 갈무리)
그는 이어서 “그래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저 재미를 위해 의도적으로 어색하고, 질이 낮으며, 하찮은 것을 만들어보자는 호기심이 생겼다”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작은 반골 기질과 호기심으로 시작한 프롬프트는 곧장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오픈AI(OpenAI)의 CEO 샘 알트먼(Sam Altman), 사장 겸 공동 창립자 그렉 브로크만(Greg Brockman) 같은 유명 인사를 비롯해 여러 해외 유수 기업이 앞다투어 이 프롬프트를 사용한 조악한 결과물을 SNS 타임라인에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하찮은 그림’은 단숨에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확산된 것이다.
급기야 수만 개가 넘는 ‘하찮은 그림’이 SNS를 점령하자 챗GPT는 해당 프롬프트를 공식 이미지 생성 템플릿으로 채용했다. 챗GPT 메인 화면에서 이미지 만들기 버튼을 누르면 중앙 하단에 ‘낙서’ 버튼이 나타나고, 버튼을 누르면 프롬프트가 자동 입력돼 사용자는 이미지만 업로드해 손쉽게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그림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다.
하찮은 프롬프트가 유행하는 이유는?

AI가 세상에서 제일 하찮게 그려준 디지털 인사이트의 뉴스레터 ‘디레터’ 헤더 이미지(자료=챗GPT 이미지 생성)
그런데 AI 그림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왜 대중은 ‘못 그린 그림’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업계 전문가들은 이 기이한 트렌드가 인기를 끄는 배경에 두 가지 핵심 인지심리학 법칙, ‘최소 노력의 원칙(Principle of Least Effort)’과 ‘폰 레스토프 효과(Von Restorff Effect)’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최소 노력의 원칙’은 사용자가 과업 수행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가능한 한 인지적·물리적 노력을 적게 들이려 한다는 UX 방법론이며, ‘폰 레스토프 효과’는 유사한 대상들이 나열되어 있을 때 시각적으로 특이한 예외가 더 쉽게 기억된다는 개념이다. 이번 트렌드는 놀랍게도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히 만족하며 대중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실제 아델 리(Adele Li) 오픈AI(OpenAI) 챗GPT 이미지 제품 리드는 이 흐름을 두고 “즐겁고, 사회적이며, 즉시 이해 가능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요컨대 사용자가 별도의 디자인 지식이나, 복잡한 해석 없이도 곧바로 맥락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챗GPT 낙서 이미지 만들기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생성되는 프롬프트(자료=챗GPT 갈무리)
또한 이렇게 최소한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화려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SNS 피드 안에서 강렬한 시각적 예외로 작용하며 폰 레스토프 효과를 극대화한다. 올인원 AI 구독 플랫폼 ‘Lorka’는 이 트렌드가 기술의 완벽함, 하이퍼리얼리즘, 높은 제작 품질을 지향하던 기존 생성형 AI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완전히 뒤집고, 불완전함과 유머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역발상적 가치를 지닌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 트렌드는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편집 기술을 익힐 필요 없이 가장 적은 노력으로 참여할 수 있으면서도, 결과물은 고퀄리티 AI 이미지 사이에서 어설픔, 저화질, 엇나감이란 결함으로 눈에 띄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AI 시대엔 인간적인 투박함도 무기다

AI가 그려준 디지털 인사이트 매거진 표지(자료=나노바나나2 이미지 생성)
그렇다면 실무자들은 이번 트렌드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핵심이 의도된 불완전함, 인간적인 투박함의 매력에 있다고 분석하며, AI 시대 브랜드와 디자인이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무결점을 추구하기보단, 오히려 불완전함과 유머를 포용해 인간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제 해외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크리스틴 타일러 힐(Christine Tyler Hill)은 글로벌 매체 뉴요커(The New Yorker)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최근 아티스트들이 사람이 작업한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작품에 오타를 남겨두는 걸 이야기하는 걸 봤다”며 “이제 우리는 그런 사소한 디테일과 오류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시야를 공유했다.
글로벌 브랜딩 에이전시 래기드 엣지(Ragged Edge)의 공동 설립자 맥스 오티뇽(Max Ottignon)역시 “최근엔 매끄럽고 정교해 보일수록 오히려 AI가 생성했다는 의심을 사기 쉽다”라고 말하며, 완벽한 고퀄리티 이미지가 외면받고 있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오히려 조악하고 엇나간 어설픈 그림판 이미지는 독보적인 시각적 예외를 형성하며 대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조언했다.
올인원 AI 구독 플랫폼 Lorka 또한 “마케팅과 콘텐츠 관점에서 이 트렌드가 흥미로운 이유는 AI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뒤집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 트렌드는 완벽함, 극사실주의, 높은 제작 수준을 추구하는 대신, 불완전함과 유머를 포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AI에 대한 대중의 태도와 콘텐츠 패러다임의 변화
일각에선 이번 트렌드가 단순한 온라인 상의 재미난 유행이 아니라, 대중이 AI 기술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AI 시대 콘텐츠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정표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1세대 웹사이트 구축 전문가이자, AI 전문 강연자겸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조엘 컴(Joel comm)은 이번 트렌드를 두고, 대중이 AI 기술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일상 소통 방식의 일부로 흡수하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이정표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수년간 우리는 AI가 할 수 있는 일에 경이로움을 느꼈지만, 이제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일부러 AI에게 형편없이 일하라고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유창성(Cultural Fluency)’이다”라고 덧붙이며 AI 기술과 대중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국내 또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브랜딩 및 디자인 전문기업 블렌드를 이끌고 있는 신경철 대표이사는 이 독특한 트렌드가 단순 찰나의 유행이 아니며, 완벽함이 아닌 더 기억에 남는 콘텐츠가 주목 받게 될 AI 시대 콘텐츠 생산 방향의 변화 신호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제 AI가 단순히 잘 만드는 도구를 넘어 ‘실패마저도 디자인하는 도구’가 됐으며, 기계적 완벽함 대신 인간적인 친근함으로 대중과 호흡하는 법을 AI와 기업이 습득하고 있다고 평했다.
출처 :
( https://ditoday.com/news/ )
원문기사링크 : https://ditoday.com/%ec%99%84%eb%b2%bd%ed%95%98%ea%b8%b0%eb%a7%8c-%ed%95%b4%ec%84%a0-%ec%99%b8%eb%a9%b4%eb%b0%9b%eb%8a%94%eb%8b%a4-%ed%95%98%ec%b0%ae%ec%9d%80-ai-%ea%b7%b8%eb%a6%bc%ec%9d%b4-%eb%9c%a8%eb%8a%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