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목소리를 하나의 구조로 만드는 일
산업단지정책해커톤 서비스디자이너, 최소윤 디자인내일 연구원 인터뷰
2026년 4월 열린 산업단지정책해커톤에서 최소윤 서비스디자이너가 함께한 팀은 산단 근로자의 자기계발과 자부심 문제를 다뤘다. 1박 2일의 논의 끝에 팀은 ‘썸단’이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산업단지와 지역사회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안과 밖을 부드럽게 잇는 완충 서비스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같은 팀에는 비주얼라이터 김민채와 산업통상부 김일호 사무관도 함께했다. 김민채의 인터뷰가 흩어진 말을 시각 언어로 붙잡았던 기록이라면, 김일호의 인터뷰는 정책 담당자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을 때 보게 된 다른 풍경의 기록이었다. 최소윤의 인터뷰는 그 사이에서 팀의 목소리가 어떻게 하나의 문제정의와 정책 구조로 정리되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최소윤은 디자인내일 연구원·서비스디자이너로, 공공서비스디자인과 국민정책디자인 과제에서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한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이 인터뷰는 서비스디자이너가 현장 기반 해커톤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배웠으며, 다음에는 무엇을 더 정교하게 해야 한다고 느꼈는지를 복기한 기록이다.
인터뷰 - 산단과 지역민 사이, 완충지대에서 시작된 자부심
최소윤 디자인내일 연구원, 서비스디자이너
2025 행정안전부 장관 개인표창, 과제우수성과창출
2025 공공서비스디자인, 해양수산부 울산항만공사(국무총리상, 금상, iF디자인어워드 본상), PM
2024 공공서비스디자인, 산림청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국무총리상 금상)·부산광역시(국무총리상, 은상), 서비스디자이너
2023 국민정책디자인, 부산시 수영구(국무총리상, 은상), 서비스디자이너
2022 국민정책디자인, 부산광역시 영도구(대통령상, 대상), 서비스디자이너 등
두근거리는 마음과 무거운 마음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처음 이 해커톤에 참여한다고 들으셨을 때, 솔직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두근거리는 마음과 무거운 마음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공공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현장에서 수요자를 직접 만나고, 그 목소리를 반영해 정책을 기획하는 일을 해왔지만 이번 해커톤은 그동안의 프로젝트와는 조금 결이 달랐습니다. 1박 2일이라는 정해진 시간 동안, 서로 다른 지역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 함께 정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가는 자리였으니까요. 그 과정 자체가 설레면서도,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서 솔직히 행사 전 일주일 내내 얕은 잠에 시달렸습니다. 그래도 서비스디자이너로서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이런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감사했습니다. 부담이 컸던 만큼, 어떻게 하면 처음 만난 분들이 ‘산업단지’라는 공통된 주제에 몰입하고 각자의 경험을 쉽게 꺼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키워드 카드’를 준비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산단은 닫혀 있는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행사 전에는 산업단지를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작년 경인지방데이터청의 ‘안산시 반월국가산단 주차 문제 개선 프로젝트’ 과제를 시작하기 전까지 ‘산업단지’라는 단어 자체가 저에게는 조금 낯설었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도시의 어딘가 외곽에 있는 공간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 산업단지 안전디자인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산단을 조금씩 더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경험이 아주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직접 발을 디뎌보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수록 처음에 알던 산단과 실제 산단은 굉장히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일터나 공장 군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정말 다양한 삶의 결이 존재하고 여러 문제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내부는 수많은 삶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외부 사회나 도시의 일상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기에 이번 해커톤 직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산단의 이미지가 ‘닫혀 있는 공간’에 가까웠습니다.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바깥에 사는 사람이 서로를 잘 모른 채 각자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공간으로 보였습니다. 1박 2일이 끝났을 때, 저희 팀이 결국 산단과 지역민 사이의 ‘완충 서비스’를 이야기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소개팅에서 인기가 없다는 말이 정적을 만들었습니다
“‘이건 진짜 산업단지 현장의 문제다’라고 느끼신 순간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한 팀원께서 ‘똑같은 기업에 다녀도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면 소개팅에서 인기가 없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말이었지만, 다 함께 바닥에 엎드려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다른 분들이 일제히 ‘맞아요’ 하며 깊이 고개를 끄덕이시는 순간 분위기가 잠깐 멈췄습니다. 그 짧은 정적이 제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산단의 진짜 문제는 물리적인 시설의 낙후나 편의성의 부족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본인의 일터를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 그 순간 선명해졌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의 63%가 산업단지에서 나오고 수많은 가족의 생계와 국가 경제가 그 공간에 얹혀 있는데도, 정작 그 안의 사람들은 어디서 일하는지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운 구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외부의 차가운 시선이 내부의 자조 섞인 인식으로 굳어지는 현상이야말로, 그 어떤 인프라 문제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진짜 산단 현장의 문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농담처럼 시작된 말은 팀의 시선을 바꾸었다. 산단 근로자의 자부심은 개인의 태도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속한 일터를 지역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그 시선이 다시 근로자의 자기 인식에 어떻게 스며드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안에서만 보던 문제가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해커톤 하면서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활동 중에 바뀐 부분이 있었다면 무엇이었고, 왜 바뀌게 되었나요?”
“가장 큰 변화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확장이었습니다. 서비스디자인에서는 보통 핵심 수요자의 시선에 깊이 집중합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저희 팀의 세부 주제였던 자기계발에 맞추어, ‘산단 근로자들은 왜 퇴근 후 자기계발에 소극적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그들의 출퇴근과 일과, 퇴근 후 일상 등 내부의 디테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첫날 중반쯤, ‘산단을 바깥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이 테이블에 던져진 순간 논의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산단 인근 주민이나 친구, 가족들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외부의 시선이 더해지자, 내부의 문제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근로자가 스스로 자기계발을 하지 않고 수동적인 삶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단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이 내면화된 결과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발견이 저희 팀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내부만 바라볼 때는 ‘근로자에게 어떤 교육 프로그램을 더 제공해야 하는가’가 해결책이 되지만, 안과 밖을 함께 바라보니 ‘안과 밖 사이에 무엇을 두어야 하는가’로 질문이 진화했습니다. 저희 팀이 결국 ‘완충 서비스’라는 핵심 개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시점이 한 차례 넓어진 그 순간 덕분이었습니다.
솔직하게 회고하자면, 둘째 날 오전에도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날 잡아둔 단단한 맥락 위에 참가자분들의 열띤 아이디어들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AI 기술 접목이나 거점 대학 연계 등 규모가 크고 좋아 보이는 요소들이 더해지며 최종 발표안은 한층 화려해졌지만, 반대로 처음 기획했던 단단한 구조는 다소 느슨해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확장이었는지, 아쉬운 분산이었는지는 서비스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로서 지금도 양가적인 감정이 듭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팀이 도출한 기획의 진정한 본질은 처음에 다 함께 발견했던 그 핵심 흐름, 즉 수동적 부품으로 여겨지던 산단 근로자가 스스로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깨닫고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산단의 안과 밖을 부드럽게 이어내는 ‘완충 서비스’를 기획했다는 그 확고한 방향성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장 기반 해커톤에서는 다양한 참여자의 경험이 계속 더해진다. 그 풍성함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정책 구조로 정리해야 하는 과제를 만든다. 최소윤은 이 과정을 팀 안의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서비스디자이너가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를 묻는 경험으로 받아들였다.
‘썸’이라는 비유가 정책 구조가 되었습니다
“팀의 아이디어가 ‘의견’에서 ‘정책 제안’으로 바뀐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비유가 하나 잡아히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개팅 이야기에서 출발해 자부심의 부재라는 문제까지 도달한 뒤, 저희는 한동안 막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잡혔는데 어떻게 풀어낼지가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누군가 ‘사실 서로를 잘 모르는 것뿐이지, 알면 잘 어울릴 수 있는 사이’라는 말을 하셨고, 그 말이 ‘썸’이라는 비유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곱씹어보니 정확한 비유였습니다. 산단과 지역민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모르는 사이입니다. 멀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연애 초기의 썸이 그렇듯,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되는 단계가 있다면 관계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 비유가 자리 잡으니 정책 구조가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1단계로 서로의 오해를 풀고, 2단계로 상대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고, 3단계로 함께하는 시간을 만든다. 막연한 의견이었던 ‘인식을 바꾸자’는 말이 단계가 있는 정책 제안으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제 이름도 자연스럽게 ‘썸단’이 되었답니다.”
후반에 발견한 진짜 문제는 ‘시선의 순서’였습니다
“팀의 아이디어가 ‘의견’에서 ‘정책 제안’으로 바뀐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첫날에는 ‘안과 밖의 시선이 다 부정적이다’라는 사실까지는 비교적 일찍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 두 시선의 무게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안의 자조도, 밖의 편견도, 각자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요.
후반에 가서야 그 두 시선이 같은 무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부의 시선이 먼저였다는 것을요. 지역 사회가 산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것이 근로자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자조가 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니까 내부의 자조는 결과지 원인이 아니었던 것이죠. 이 순서가 보이자 해법도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안에서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바깥의 시선이 그대로라면 효과가 제한적입니다. 먼저 외부의 시선을 바꾸어 근로자가 외부로부터 인정받는 경험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가 ‘오해를 풀고 → 인정받고 → 함께하고’라는 단계를 잡은 것도, ‘완충 서비스’라는 개념에 도달한 것도 이 발견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자부심의 회복은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 사이의 관계를 다시 짜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 이것이 1박 2일 동안 저희 팀이 도달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자부심은 결심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이 하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시선을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 팀이 도달한 해법은 교육이나 홍보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산단 안과 밖의 관계를 다시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기다려야 할 때와 개입해야 할 때가 모두 있었습니다
“퍼실리테이터가 개입하지 않고 기다려야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사실 이번 해커톤에서 가장 어려웠던 판단은 ‘언제 기다리고 언제 개입할 것인가’였습니다. 두 순간 모두 필요했고, 그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서비스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의 핵심 일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기다려야 했던 순간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는 참가자분들이 최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판을 넓게 열어두는 것을 우선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끌어가기보다 일단 충분히 듣고, 김민채 비주얼라이터님과 함께 그 흩어진 이야기들을 분류하고 패턴을 읽어내며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다른 분의 기억을 끌어내고, 그 기억이 또 다른 분의 경험과 만나 진짜 문제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흐름을 제가 너무 일찍 정리해버리면, 정작 꺼내져야 할 진짜 이야기들이 묻혀버리거든요.
반대로 개입해야 하는 순간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특히 한두 분의 강한 의견이 팀 전체의 흐름을 끌어가기 시작할 때입니다. 모두가 동의해서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큰 의견에 다른 분들이 점차 말을 아끼게 되는 흐름이 보일 때요. 그럴 때는 부드럽게 다시 질문을 던지거나, 잠시 말수가 적었던 분께 시선을 돌려 의견을 청하면서 균형을 잡으려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균형을 잡는 일이 1박 2일 내내 가장 어려운 판단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개입하면 자발적인 흐름이 끊기고, 너무 늦게 개입하면 본질이 흐려지니까요. 이 감각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제가 다음 프로젝트에 가져갈 숙제이기도 합니다.”
퍼실리테이션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다. 서비스디자이너는 많은 말을 끌어내야 하지만, 동시에 말의 양에 휩쓸리지 않도록 구조를 잡아야 한다. 기다림과 개입은 반대가 아니라 같은 일을 이루는 다른 방식이었다.
수요자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는 것과 그것을 요리하는 일은 다릅니다
“반대로 ‘아이디어는 좋지만 실행은 어렵겠다’고 느끼신 아이디어가 있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팀의 아이디어가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희가 처음에 잡았던 ‘썸단’의 본질, 즉 근로자가 수동적 인간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산단과 지역 사회 사이의 ‘완충 지대’를 디자인한다는 핵심 흐름은 정말 단단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둘째 날 발표안을 다듬고 수렴하는 과정에서 좋아 보이는 요소들이 하나씩 더 얹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첨단 AI 기술 접목, 거점 국립대학과의 대규모 연계, 다양한 홍보 채널 운영 등 각각은 모두 의미 있는 방안들이었지만, 하나의 정책 제안 안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는 현실적인 실행의 허들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정책 제안의 진정한 실행 가능성은 ‘얼마나 많은 좋은 요소가 들어 있는가’가 아니라, ‘핵심적인 한 줄의 메시지가 얼마나 흔들림 없이 살아 있는가’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저희 팀의 최종 발표안은 초반에 도출했던 그 단단한 본질이 덧붙여진 여러 거대한 요소들에 다소 가려진 면이 있었습니다. 서비스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로서 중심 뼈대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그 아쉬움은, 제가 서비스디자이너로서 다음 프로젝트에 가져갈 가장 큰 숙제가 되었습니다.
이 경험이 제게 가르쳐준 건 서비스디자이너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의 실마리가 됩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날것 그대로 결과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요자의 목소리에서 출발하되, 그 수많은 목소리들 사이에서 진짜 본질을 가려내고 하나의 단단한 구조로 정제해내는 것. 그것이 서비스디자이너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이번에 다시 한번 깊이 느꼈습니다.
수요자의 의견을 그릇에 담는 것과, 그 그릇에 담긴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서비스디자이너는 현장의 모든 목소리를 존중하면서도, 결과물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도록 끝까지 구조를 잡아내는 것, 그 마지막 정제의 책임까지가 서비스디자이너의 몫이라는 것을 이번 해커톤이 가장 명료하게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좋은 의견이 많이 나올수록 결과물은 풍성해진다. 그러나 정책 제안으로 남기 위해서는 그 풍성함을 하나의 방향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소윤은 그 일을 서비스디자이너의 중요한 책임으로 보았다.
서비스디자인은 현장의 경험을 ‘내 일’로 바꾸는 방식입니다
“서비스디자인 방식이 일반 회의나 일반적인 워크숍과 다르게 느껴진 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산단 근로자의 경험과 마음에서 시작하고, 창의적으로 풀어가는 서비스디자인 방식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가장 큰 차이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을 정답이라 단정 짓지 않고, 문제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과정에 시간을 쏟았다는 점입니다.
보통의 회의였다면 눈에 보이는 문제와 해법을 한 호흡에 이으려 했겠지만, 이번 해커톤에서 저희는 ‘정말 교육이 부족해서 안 하는 걸까?’, ‘스스로를 수동적이라 느끼게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라며 서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생각의 범위를 넓혔다가 다시 핵심을 향해 좁히고, 또 다른 각도에서 다시 넓혀보고 또 좁히고. 그렇게 저희 팀이 함께 확산과 수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보이던 ‘출퇴근 문제’, ‘교육의 부재’, ‘개인의 무관심’ 같은 표면적인 문제들은 걷히고, 그 밑에 숨어 있던 ‘자부심의 부재’와 ‘외부의 부정적 시선’이라는 진짜 구조적인 문제가 비로소 드러났습니다.
처음엔 ‘근로자에게 무엇을 더 제공해야 할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는데, 대화를 주고받으며 넓히고 좁히기를 거듭하면서 끝내는 ‘안과 밖 사이에 무엇을 두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다다랐습니다. 같은 산단 이야기인데도 질문이 한 번 바뀌니까 해결 방안이 완전히 새롭게 도출되었습니다.
결국 서비스디자인은 거창한 이론이라기보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날것 그대로의 경험을 방치하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정해진 정책의 틀 안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장 분들이 직접 자기 입으로 문제와 답을 말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남의 일이 아니라 온전히 ‘내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우리 팀과 함께 해커톤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경험한 서비스디자인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전체가 가능했던 건 제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흐름을 만들어준 김민채 비주얼라이터님과 끝까지 마음을 열어주신 우리 팀 참가자분들이 있었기에,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서도 그 깊은 질문들에 함께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산단 정책은 지역 전체가 함께 바라보는 관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이 해커톤 이후 산업단지 정책이 달라져야 한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업단지를 ‘안쪽의 문제만 해결하는 정책’에서, ‘지역 전체가 함께 산단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산단 정책은 주로 산단 내부의 환경을 정비하고 편의시설이나 복지를 확대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물론 꼭 필요한 일이고 그간의 성과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해커톤을 통해 근로자들의 자부심이나 정주 여건은 산단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산업단지는 도시와 동떨어진 섬이 아니라, 지역 사회와 연결되어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산단을 바라보는 지역 사회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산업단지를 우리와는 다른 닫힌 공간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의 중요한 자산이자 함께 상생해야 할 우리 일상의 일부로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근로자들 또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일터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정책 역시 ‘산단과 지역이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라는 관계적 측면에서 새롭게 디자인되어야 합니다.
이번 해커톤에서 다양한 주체가 모여 산단의 미래를 함께 고민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정책은 산단을 닫힌 생산 공간이 아닌 지역과 함께 공존하는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팀의 아이디어, 기술교환 플랫폼에도 깊이 공감했습니다
“가장 공감하신 아이디어는 무엇이었고, 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가장 깊이 공감한 아이디어는 ‘잘산단말이야’ 팀의 ‘기술교환 플랫폼’이었습니다. 발표를 듣는 내내, 현장에서 일하는 청년 근로자들이 느낄 막막함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다들 AI 시대라고 떠들썩한데, 정작 현장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도태될까 봐 두려워하는 청년의 이야기는 뼈아픈 산단의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저희 팀이 ‘스스로를 수동적인 부품처럼 여기며 자부심을 잃어가는 근로자의 마음’에 집중했다면, 잘산단말이야 팀은 거대한 기술의 파도 앞에서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막막함’을 짚어냈습니다. 무엇보다 이 아이디어가 뭉클했던 이유는 문제 해결의 ‘태도’에 있습니다. ‘알아서 시대에 맞춰 공부해라’라며 근로자 개인에게 짐을 떠넘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국가와 대학, 연구소가 나서서 근로자가 현장에서 두려움 없이 기술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구조를 짜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희 팀과 잘산단말이야 팀은 출발점은 달랐어도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산단 근로자를 단순히 지시받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고 성장하는 ‘능동적 주체’로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 현장 청년들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을 개인의 몫으로 두지 않고, 이를 해결할 구체적이고 든든한 시스템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깊이 공감했습니다.”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든 뒤
“1박 2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무엇이었습니까?”
“크게 두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는 팀의 방향성이 처음 잡히던 순간, 참가자분들과 다 함께 바닥에 엎드려 아이디어를 적어 내려가던 장면입니다. 처음의 낯설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우리가 풀어야 할 진짜 문제가 ‘산단 근로자의 자부심 부재’라는 데에 공감대가 형성되자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변하셨습니다. 피곤함도 잊은 채 바닥에 엎드려 포스트잇을 붙이고 치열하게 논의하시던 그 표정들은 서비스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든 뒤, 김민채 비주얼라이터님과 동틀 때까지 발표 장표를 다듬던 새벽의 시간입니다. 사실 이번 해커톤에서 김민채 님은 단순히 ‘시각화를 담당한 분’이 아니라, 저와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이 팀을 이끌어간 든든한 동료에 가까웠습니다. 하루 종일 참가자분들이 쏟아낸 날것의 거친 언어들과 뜨거운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의 흐름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공감하는 시각적 결과물로 표현할지 새벽 내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제가 대화의 맥락을 뼈대로 엮어내면, 비주얼라이터님이 그것을 한눈에 들어오는 시각 언어로 구현해 주시며 서로의 빈틈을 채웠습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시너지를 내며 선명한 정책 형태로 구체화되던 그 과정 자체가 참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 새벽까지 잡아둔 흐름이 다음 날 모든 부분에서 그대로 발표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둘째 날 오전부터 활기차게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추가되었고, 정리해 놓은 구조 위에 좋아 보이는 요소들이 하나씩 더 얹히면서 처음의 단단함이 조금씩 풀어지기도 했습니다. 서비스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로서 그 흐름을 어디까지 지키고 어디까지 열어둘지에 대한 판단이, 사실 그때 제게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그 새벽의 장면이 기억에 더 깊이 남는 이유는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민채 비주얼라이터와 함께 맥락을하고, 시각 언어로 옮기며, 발표를 준비했던 시간은 동시에 현장 기반 해커톤에서 구조와 확장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얻게 되었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다면 사전 리서치, 경쟁 구조 보완, 후속 공유가 필요합니다
“현장 기반 정책 해커톤을 다시 진행한다면 꼭 보완했으면 하는 점들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크게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사전 리서치와 현장 맥락의 사전 공유입니다. 1박 2일은 몰입하기에 정말 좋은 포맷이지만, 라포 형성부터 문제 정의, 아이디어 도출과 발표 준비까지 모두 소화하다 보니 첫날의 상당 시간이 맥락을 맞추는 데 쓰이게 됩니다. 만약 본 행사 전에 각 팀이 다룰 주제와 관련된 현장 리서치 자료, 근로자분들의 인터뷰 영상이나 실제 일상 데이터가 미리 제공된다면 어떨까요? 책상 위에서 상상하는 산단과 실제 현장의 모습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그 간극을 사전에 좁혀놓고 출발한다면 같은 1박 2일이라도 논의의 밀도 자체가 훨씬 깊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째, 해커톤 특유의 경쟁 구조에 대한 보완입니다. 1박 2일 동안 수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모든 팀이 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더 화려하게 보일까’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리게 됩니다. 본질을 짚어낸 단단한 한 줄보다, 보기 좋은 요소를 많이 얹는 방향으로 흐르기 쉬워지는 것이죠. 이는 어느 한 팀이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이라는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압력입니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두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1) 서비스디자이너의 명확한 역할 합의입니다. 이번 행사에서 공식 명칭은 ‘서비스디자이너(퍼실리테이터)’였지만, 현장에서는 아무래도 분위기를 만들고 의견을 끌어내는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에 무게가 쏠리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서비스디자이너에게는 흩어지는 의견들 속에서 문제의 구조를 읽어내고, 본질이 흐려지려 할 때 단호하게 방향을 잡아내야 할 전문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입이 참가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이 사전에 충분히 공유된다면, 저희 역시 수렴이 필요한 순간 망설임 없이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각화된 시상 방식도 필요합니다. 승패가 명확히 나뉘는 구조는 참가자들이 문제의 본질보다 발표의 완성도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각 팀의 결과를 다양한 관점에서 인정해 줄 수 있는 시상 방식이 마련된다면, 경쟁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팀이 끝까지 본질을 지켜내는 동력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정책 해커톤의 경쟁력은 팀 간의 경쟁이 아니라, 얼마나 양질의 결과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도출해 내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행사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후속 공유의 장’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번 해커톤이 청년디자인리빙랩 등 다음 단계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졌다는 점은 정말 훌륭한 강점입니다. 이 연결 고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참가자들이 낸 아이디어가 이후 실제 정책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구현되었는지 꾸준히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낸 작은 의견이 현장을 바꾸는 진짜 정책이 되었다는 ‘효능감’이야말로 참가자들에게는 최고의 보상이자, 다음번에도 기꺼이 사회 문제 해결에 참여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마치며 — 같은 팀, 세 개의 이야기
이 시리즈에는 케더산 팀의 인터뷰가 세 편 있다. 비주얼라이터 김민채는 여러 사람의 말을 그림으로 붙잡은 사람이었고, 산업통상부 김일호 사무관은 앉은 자리를 바꾸어 다른 풍경을 보게 된 사람이었다. 최소윤은 그 과정에서 여러 목소리가 하나의 문제정의와 정책 구조로 이어지도록 도운 사람이었다.
같은 1박 2일이었지만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장면을 기억한다. 김민채는 말이 그림이 되던 순간을, 김일호는 정책 대상이 정책 동료가 되던 순간을, 최소윤은 다양한 목소리 속에서 문제의 본질을 정리해가던 과정을 말한다. 세 인터뷰가 겹치는 지점에서 케더산 팀이 무엇을 했는지가 더 입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최소윤의 인터뷰가 던지는 질문은 ‘좋은 정책을 만드는 자리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는 일과, 그 목소리의 본질을 분명하게 정리하는 일은 어떻게 함께 가능할까’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회고는 이 질문이 서비스디자이너 개인의 숙제이자, 현장 기반 정책 해커톤이 더 정교해지기 위해 함께 다뤄야 할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정리 :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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