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삶의 벼랑 끝에 섰을 때, 그를 붙드는 것은 한 명의 전문가도 한 곳의 기관도 아니다. 그가 위험에 놓인 순간을 누군가 알아차리고, 적절한 도움으로 연결하고, 도움이 끊기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지역사회 전체의 작동 방식이다. 자살예방을 이렇게 바라보면, 그것은 의료와 상담, 복지와 행정의 문제인 동시에 사람과 자원, 기관과 제도 사이의 연결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살예방은 서비스디자인과 만난다.
지역 안에는 경찰, 소방, 응급의료기관, 자살예방센터, 행정복지센터, 복지기관, 주민조직이 함께 있다. 그러나 많은 주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전망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발견하고, 어디로 연결하며, 어느 지점에서 책임이 이어지고, 어떤 순간에 당사자가 다시 혼자가 되는가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의뢰했다", "연계했다", "안내했다"고 정리되는 과정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기다리거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설명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고립되는 시간일 수 있다. 기관 중심의 연계와 당사자가 체감하는 연결 사이의 간극, 백현정 연구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있다.
서비스디자인은 그 간극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 이해관계자 지도는 자살 고위험 주민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의 기관과 사람들이 어떤 거리와 접점에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서비스 블루프린트는 전면에서 보이는 서비스와 후방에서 움직이는 판단·연락·의뢰·조정의 흐름을 함께 드러낸다. 고객 여정 지도는 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고, 설명하고, 기다리고, 연결되거나 때로는 중단되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지나는지를 따라간다. 이 도구들은 새로운 사업을 하나 더 만드는 방법이라기보다, 이미 지역사회에 흩어져 있는 자원이 한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다시 이어지도록 돕는 방법에 가깝다.
백현정 연구자는 석사학위논문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을 적용한 생명존중안심마을 네트워크 개선방안 연구」에서 시흥시 정왕본동 생명존중안심마을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민·관 기관의 협력 과정을 살폈다. 산업단지와 인접해 인구 이동이 잦고 1인 가구와 임시 거주 주민이 많은 이 지역은, 자살예방이 개인의 심리적 어려움만이 아니라 생활환경과 관계망, 서비스 접근성을 함께 살펴야 하는 영역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백현정 연구자가 왜 이 주제에 주목했는지, 현장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자살예방을 비롯해 사회적 처방, 돌봄, 고립 대응처럼 개인의 고통을 지역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다시 읽어내는 영역에서 서비스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들어본다. 디자인이 생명을 직접 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생명이 위험해지는 순간 도움의 손길이 끊기지 않도록 길을 설계하는 일은 분명 디자인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백현정 시흥시정신건강복지센터 팀장
지역사회 정신건강 현장에서 22년간 일해 온 정신건강전문요원이다. 정신건강증진과 자살예방을 위한 상담, 사업 기획, 기관 간 협력 업무를 수행해 왔다. 정신질환을 가진 분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정신건강의 어려움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돕고 연결해야 할 과제임을 고민해 왔다. 생명존중안심마을 사업에 서비스디자인 관점을 적용해 주민 발굴, 서비스 여정, 협력 구조를 연구했다. 현재는 정신건강복지센터 실무자의 지역사회 서비스 협력 경험을 주제로 박사과정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비스디자인을 사람과 자원, 기관과 제도 사이의 끊어진 연결을 회복하는 공공 실천의 방법으로 탐구하고 있다.
Q. 디자인DB 독자 중에는 "자살예방을 왜 디자인에서 다루는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연구를 처음 접하는 디자인계 독자에게, 자살예방과 서비스디자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싶으신가요?
자살 고위험 주민을 만나며 자살예방은 어느 한 기관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자살예방은 위기 상황에 놓인 한 사람을 지역사회가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연결하며, 다시 고립되지 않도록 도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역사회 안에서 삶의 어려움이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접점이 있습니다. 행정복지센터의 창구 직원, 복지관 실무자, 경찰관, 소방관, 병원 관계자, 부동산 중개인, 주민조직, 이웃 등이 모두 그런 접점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는 그 짧은 만남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지금이 아니어도 내가 정말 힘들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인식이 남는다면, 그것 역시 자살예방의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서비스디자인은 이러한 과정을 이용자 중심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게 해주는 유용한 방법입니다. 지역사회 정신건강 현장에는 이미 많은 서비스가 존재하지만, 그 서비스가 이용자에게 어떻게 경험되는지, 어디에서 접근이 어렵고, 어느 지점에서 연결이 끊기는지는 충분히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서비스디자인은 자살 고위험 주민이 지역사회 안에서 어떤 접점을 지나고, 어떤 기관을 만나며, 어떤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다시 고립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예방에서 서비스디자인이 민·관 기관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실제로 필요한 사람에게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점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비스의 흐름과 접점, 관계를 사람 중심으로 살펴보고, 필요한 도움이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자살예방과 서비스디자인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자살예방은 흔히 의료, 상담, 복지, 행정의 영역으로 이해됩니다.
연구자께서는 어떤 계기로 이 문제를 '서비스 경험'과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나요?
지역사회 정신건강 현장에서 만난 자살 위기에 놓인 분들은 정신건강의 어려움뿐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 신체질환, 가족관계, 실직, 주거 문제, 외로움, 사회적 고립 등 복합적인 삶의 문제 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담이나 치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여러 기관의 지원이 함께 연결되어 조정되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관마다 기준과 역할이 다르고, 서비스가 제공되는 절차도 다릅니다. 한 기관에서는 상담을 제공하고, 다른 기관에서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또 다른 기관에서는 위기대응을 담당합니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어려움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늘 마음에 남았습니다.
자살 위기 상황에 놓인 사람이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네트워크, 한 사람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기관들이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가 가능한 한 원스톱 서비스에 가깝게 경험되는 관계망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저는 자살예방을 '서비스 경험'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의뢰했다", "연계했다", "안내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거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에서는 기관 중심의 협력 실적보다, 당사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연결의 흐름을 보고 싶었습니다.
서비스디자인과 네트워크 관점은 이 문제를 함께 보게 해주었습니다. 서비스디자인은 당사자의 여정과 접점을 보게 해주고, 네트워크 관점은 그 접점 뒤에서 움직이는 기관 간 관계와 책임의 흐름을 보게 해줍니다. 자살예방을 위해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네트워크 구조를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 이 연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Q. 논문에서는 생명존중안심마을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셨습니다.
생명존중안심마을은 어떤 사업이며, 기존 자살예방사업과 비교해 어떤 점에서 지역사회 네트워크가 중요한가요?
생명존중안심마을은 읍·면·동 단위로 자살예방 안전망을 구축하는 사업입니다. 자살 고위험군 발굴과 연계, 생명지킴이 교육, 자살예방 인식개선 캠페인, 자살위험수단 차단,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을 지역사회 기관들이 함께 수행하는 구조입니다. 당시 정책적으로 생명존중안심마을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로 제시되었습니다.
현장의 실무자 입장에서 보면 생명존중안심마을은 완전히 새로운 사업이라기보다, 기존에 수행해 오던 자살예방사업을 동 단위의 지역사회 안전망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영역별 기관을 모집하고, 몇 개 이상의 협력사업을 수행해야 단계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이 사업이 실제로 지역사회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함께 있었습니다.
정책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 취지가 현장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사회 민·관 기관 간 네트워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기존 자살예방사업에서도 지역사회 협력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존중안심마을은 그 협력을 마을 단위로 구체화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기관이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 안전망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 고위험 주민이 어느 접점에서 발견되고, 어디로 연결되며, 이후 누가 다시 확인하고 조정하는지가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존중안심마을은 사업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기관들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묻는 네트워크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연구대상으로 시흥시 동 단위 지역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지역의 사회적·공간적 특성은 자살예방 서비스 네트워크를 분석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연구지역은 시흥시의 동 단위 지역으로 산업단지와 인접해 있어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인구가 많고, 전입과 전출이 비교적 빈번한 곳입니다. 원룸과 고시원, 다가구 주택이 밀집해 있고, 혼자 사는 주민이 많으며, 지역에 오래 정착하기보다 일시적으로 머무는 주민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주민 간 관계망이 약화되거나, 위기 신호가 주변에 쉽게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과도 연결됩니다.
또한 이 지역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주민, 중장년 1인 가구, 고용과 주거의 불안정성을 경험하는 주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지역사회 자살예방이 왜 개인의 심리적 어려움만이 아니라 생활환경, 관계망, 서비스 접근성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상담실만이 아니라 거리, 상점, 주거지 주변, 행정복지센터, 복지기관, 경찰·소방과 같은 일상의 공간들이 모두 중요한 서비스 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2020년부터 자살예방을 위한 마을 단위 사업이 시작되어 민·관 기관 간 네트워크 경험이 축적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 자살예방 네트워크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어디에서 연결이 어려워지며, 어떤 접점이 더 세심하게 설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Q. 자살 고위험 주민은 위기 상황에서 경찰, 소방, 응급의료기관, 자살예방센터, 행정복지센터, 복지기관 등 여러 기관을 거치게 됩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확인한 서비스 단절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연구를 통해 가장 크게 확인한 단절 지점은 당사자가 서비스 이용이나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을 때 연결이 어려워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이용자의 동의 없이는 기관 간 정보를 공유하거나, 서비스를 연계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현장에서는 그 지점에서 연결이 멈추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자살 고위험 주민은 위기 상황에서 한 기관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논문에서 문헌고찰을 바탕으로 가상의 사례를 설정하여 자살 시도 이후 자살예방센터에 연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상자는 경찰관과 소방대원, 응급실 의료진,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 사례관리자, 자살예방센터 사례관리자, 행정복지센터 주무관 등 여러 기관의 담당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지역사회 서비스와 연결되기까지 여러 번의 접점이 생깁니다.
저는 이 접점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용자가 바로 전문기관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 만난 실무자가 어떤 태도로 설명하는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지, 다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떻게 남겨두는지가 이후의 연결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비스가 한 번에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만남이 완전히 끊어지는 경험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살예방 현장에서 단절은 단지 기관 간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가 다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Q. 이 연구에서는 이해관계자 지도, 서비스 블루프린트, 고객 여정 지도 같은 서비스디자인 도구를 활용했습니다.
이 도구들이 기존 행정·복지 분석 방식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무엇을 드러냈다고 생각하시나요?
서비스디자인 도구들이 가장 크게 해준 일은 그동안 현장에서 진행해 왔던 협력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정리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살예방 현장에서는 경찰, 소방, 응급의료기관, 자살예방센터, 행정복지센터, 복지기관 등 여러 기관과의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관별 역할표만으로는 전체 흐름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지도는 자살 고위험 주민을 중심에 두고 그 주변에 어떤 기관과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자살예방이 한 기관의 사업이 아니라, 여러 민·관 기관과 주민조직이 함께 관계를 맺고 있는 네트워크의 문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기관들이 자살 고위험 주민과 어떤 거리와 접점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서비스 블루프린트는 자살 시도 이후 대상자가 만나게 되는 기관들의 서비스 흐름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살 고위험 주민이 직접 만나는 서비스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 기관 내부의 판단, 연락, 보고, 의뢰, 조정과 같은 과정도 함께 이루어집니다. 기존 분석에서는 기관의 역할이나 서비스 내용을 보게 되지만, 서비스 블루프린트는 전면에서 보이는 서비스와 후방에서 작동하는 업무의 흐름을 함께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고객 여정 지도는 자살 고위험 주민의 입장에서 각 기관과 만나는 접점을 살펴보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기관을 언제 만나고, 그 순간에 어떤 생각과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지, 어느 지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어느 지점에서 다시 고립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연결했다고 생각한 지점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안하거나 혼자인 순간일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도구들이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문제를 함께 얘기할 수 있도록 표면으로 드러내는 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예방 네트워크 안에서 어떤 기관이 있고,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며, 어디에서 연결이 어렵고, 무엇을 다시 조정해야 하는지를 눈으로 보면서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Q. 고객 여정 지도를 통해 자살 고위험 주민의 경험을 살펴본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 당사자 인터뷰가 아니라 가상 사례를 바탕으로 여정을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점을 생각하게 되었나요?
이 연구에서 고객 여정 지도는 실제 자살 고위험 주민을 직접 인터뷰하여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자살 위기 경험은 매우 민감한 주제이고, 당사자에게 자신의 위기 경험을 다시 이야기하도록 요청하는 과정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에서는 연구지역의 특성, 자살예방 관련 문헌자료, 그리고 현장에서 자살 고위험 주민과 지역사회 기관을 만나며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사례를 설정하였습니다.
물론 이 점은 연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고객 여정 지도에 담긴 생각과 감정의 흐름은 실제 한 사람의 직접 진술이라기보다, 문헌자료와 현장 경험을 토대로 연구자가 해석하여 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 당사자의 경험을 일반화하기보다, 자살 고위험 주민이 지역사회 안에서 여러 기관을 만나게 될 때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는지 탐색적으로 살펴보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과정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낯선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자신의 상황을 반복해서 설명하며, 다음 도움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기다리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자살 위기 상황에 놓인 사람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 누구를 어떻게 만나는지에 따라 반응이 협조적으로도, 거부적으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객 여정 지도를 작성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보였던 것은 기관 중심의 '연계'와 당사자가 체감하는 '연결'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행정적으로는 다른 기관에 의뢰가 이루어졌더라도, 당사자가 그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음 기관으로 이동할 힘을 갖지 못한다면 여전히 불안하거나 혼자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에서 고객 여정 지도는 실제 당사자의 경험을 단정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지역사회 자살예방 서비스가 수요자에게 어떻게 경험될 수 있는지를 함께 질문하게 만드는 도구였습니다. 각 접점에서 만나는 실무자의 설명, 태도, 정보의 정확성, 그리고 연계 이후 서비스 제공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Q. 자살예방 현장에서는 긴급성, 전문성, 개인정보, 책임 소재가 모두 중요할 것입니다.
이런 민감한 주제를 서비스디자인 방식으로 다룰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윤리적 기준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자살예방 현장은 자살 위험 주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서비스디자인을 적용할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할 윤리 기준은 '참여보다 안전이 먼저'라는 원칙이라고 봅니다. 당사자나 유족, 실무자의 경험을 듣고 시각화하는 과정이 누군가에게 다시 고통을 주거나, 특정 개인과 기관의 책임으로 단순화되거나, 민감한 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해관계자 지도나 고객 여정 지도는 보이지 않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유용하지만 작은 지역사회에서는 익명화된 정보도 어떤 기관 또는 당사자를 추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위기개입이나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까지 공동창작이라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살예방 분야에서 서비스디자인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방법이기 전에 사람의 안전과 존엄을 지키면서 현장의 복잡한 연결 구조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누군가의 아픈 경험을 보호하면서 지역사회가 더 책임 있게 연결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Q. 연구에서는 접근성, 통합성, 전문성, 책임성을 전달체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이 네 가지 원칙 중 가장 취약하게 작동하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네 가지 원칙이 모두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가장 취약하게 작동한다고 느낀 부분은 통합성이었습니다. 자살예방 현장에서 만나는 주민은 한 가지 어려움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정신건강의 어려움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 주거 문제, 가족 갈등, 고용 문제, 의료적 문제가 함께 얽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 서비스는 기관별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신청 기준과 절차, 정보체계도 다릅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가 여러 기관을 오가며 자신의 어려움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거나, 어느 기관의 기준에도 명확히 들어맞지 않아 지원이 지연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럴 때 서비스가 한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작동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통합성이 취약해지면 책임성의 문제도 함께 드러납니다. 위기 상황에서 경찰, 소방, 병원, 자살예방센터가 함께 개입하더라도 어느 시점부터 누가 주도적으로 확인하고 조정할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역사회 자원으로 연계한 이후에도 실제 서비스가 제공되었는지, 거부나 지연이 발생했을 때 누가 다시 확인하고 조정할 것인지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습니다.
자살예방 현장에서 전문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양가감정을 가진 분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절망하는 분들이 다시 삶의 방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동행하는 일에는 깊은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 전문성도 한 기관 안에만 머물러서는 충분히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당사자의 삶은 여러 영역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개입 역시 지역사회 자원과 연결되고 지속적으로 조정될 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예방 전달체계에서 가장 보완되어야 할 부분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서비스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통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각 기관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을 넘어, 당사자가 필요한 도움에 실제로 도달했는지를 함께 확인하고 조정하는 구조로 발전해야 합니다. 자살예방 전달체계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원스톱 서비스에 가깝게 경험될 때, 통합성과 책임성이 현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Q. 생명존중안심마을 네트워크가 잘 작동하려면 중앙정부, 지자체, 지역사회 기관이 각각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특히 지자체의 역할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할까요?
생명존중안심마을 네트워크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 지자체, 지역사회 기관의 역할이 분명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정부는 자살을 국가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고, 자살예방 인프라 마련을 위한 재정과 인력 기준, 사업 지침, 성과관리 체계, 부처 간 협력의 기본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한 자살 고위험 주민에게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관련 사업들이 분절되지 않게 조정하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특히 지자체는 지역 자살예방에 대한 책무성과 행정적 권한을 가진 컨트롤타워로서 역할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단순히 중앙정부 사업을 전달하거나 기관을 모아 회의하는 수준을 넘어, 지역사회 연결망의 조정자이자 책임 있는 운영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서별로 나뉘어 있는 복지, 보건, 고용, 안전, 공동체 사업을 자살예방의 관점에서 연결하고, 자살 고위험 주민이 필요한 도움에 실제로 도달했는지를 확인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역사회 기관은 주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위기 신호를 발견하고 필요한 도움으로 연결하는 접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행정복지센터, 복지기관, 의료기관, 경찰, 소방 등은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만, 발견 이후 어느 기관으로 연결할지, 연결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함께 확인하는 협력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생명존중안심마을은 중앙정부가 방향과 기반을 만들고, 지역사회 기관이 생활 속 접점이 되며, 지자체가 그 사이의 끊어진 흐름을 조정할 때 네트워크가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지자체의 역할이 '사업 관리'에서 '지역사회 생명안전망을 설계하고 책임지는 역할'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이 연구도 개인의 고통을 지역사회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유사 연구들(예: 주하나 박사의 뮤지엄 사회적 처방 연구…)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자살예방, 사회적 처방, 돌봄, 고립 대응 같은 영역에서 서비스디자인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자살예방, 사회적 처방, 돌봄, 고립 대응의 영역에서 서비스디자인이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역들은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사업처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개인의 고통을 개인 안에만 두지 않고 지역사회 안에서 어떻게 발견하고, 연결하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살위험에 놓인 분들, 고립된 주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의 어려움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신건강의 어려움과 함께 경제적 불안, 관계의 단절, 주거 문제, 질병, 일상의 상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서비스는 기관별, 사업별, 자격 기준별로 나뉘어 있어 당사자의 삶의 흐름과 서비스의 흐름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비스디자인은 바로 그 어긋남을 드러내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고객 여정 지도, 이해관계자 지도, 서비스 블루프린트와 같은 도구는 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고, 설명하고, 기다리고, 연결되거나 때로는 중단되는 과정을 눈에 보이게 합니다. 또한 기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왜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연결된 서비스로 경험되지 않는지를 보여줍니다.
뮤지엄 사회적 처방 연구와 연결해 보면, 회복은 반드시 의료나 상담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 경험, 관계, 장소, 일상 속 참여를 통해서도 촉진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군가와 만나고, 어떤 장소에 머물고, 일상의 감각을 다시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과 지역사회에 대한 연결감을 회복하기도 합니다. 자살예방 역시 위기개입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한 사람이 다시 살아갈 이유와 관계, 생활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다양한 자원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서비스디자인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더 만드는 방법이라기보다, 이미 지역사회 안에 흩어져 있는 자원들이 한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돕는 방법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의 고통을 서비스 시스템의 언어로 번역하고, 분절된 기관의 역할을 당사자의 여정 안에서 다시 조정하는 일, 그것이 자살예방과 돌봄, 고립 대응, 사회적 처방 영역에서 서비스디자인이 맡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디자인DB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지요?
"디자인은 생명을 지키는 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연구자님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자살예방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의 고통은 한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어려움과 관계의 단절, 제도와 서비스의 빈틈 속에서 깊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디자인이 사람을 직접 구한다고 말하기보다 한 사람이 도움에 닿기까지의 길을 덜 막막하고 덜 복잡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제가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를 학문적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현장에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기관 간 협력의 어려움, 서비스가 연결되는 과정의 단절, 당사자가 경험할 수 있는 막막함을 서비스디자인이라는 도구를 통해 눈에 보이게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보람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방식이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위험 신호가 더 빨리 발견되도록 만드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문턱을 낮추는 것, 기관 간 연결이 끊기지 않도록 흐름을 설계하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지역사회가 함께 응답해야 할 과제로 바꾸어 놓는 것, 그 모든 과정이 생명을 지키는 디자인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저에게 서비스디자인은 사람과 자원, 기관과 제도 사이의 끊어진 연결을 회복하는 공공 실천의 방법입니다. 특히 자살예방과 같이 민감하고 절박한 영역에서 디자인은 개인의 경험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이 발생한 관계와 제도, 서비스의 맥락을 함께 읽어내며 지역사회가 더 책임 있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국 생명을 지키는 일은 한 사람의 전문가나 한 기관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으려면, 그 마음을 붙들어 줄 관계와 서비스, 장소와 제도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저는 디자인이 바로 그 연결의 구조를 보이게 하고, 다시 설계하게 하며, 사람을 중심에 둔 지역사회 생명안전망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림 : A씨가 자살시도 이후 처음 경찰관을 만나는 접점에서부터 시흥시자살예방센터 서비스를 종결하기까지의 고객여정지도

그림 : 자살 고위험군을 위한 협업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서비스 블루프린트

그림 : 정왕본동 생명존중안심마을 네트워크 시스템 맵(정책적 개선방안)
* 출처 : (논문)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을 적용한 생명존중안심마을 네트워크 개선방안 연구 - 백현정. 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