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디자인(GD)제도의 탄생
히든코리아, 박희면, 2026.
일상에서 신뢰가 만들어지는 순간
아침에 집을 나서며 무심코 손에 쥔 물건들이 있다. 문고리를 잡고, 컵에 물을 따르고, 신발을 신고,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우리는 이 모든 순간에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좋은 디자인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불편함이 없고, 설명이 필요 없으며, 쓰는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는 것. 좋은 디자인은 늘 이렇게 조용히 삶 속에 스며든다. 사람들은 흔히 디자인을 눈에 띄는 장식이나 유행의 결과로 생각한다. 색이 예쁘고, 형태가 독특하면 ‘디자인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오래 남는 디자인은 대체로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손에 쥐었을 때 부담이 없고, 몸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며, 쓰는 동안 생각을 끊지 않는다. 이런 물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를 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 물건을 기준으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굿디자인(Good Design) 제도는 바로 이러한 신뢰의 축적에서 출발한다. 이 제도는 ‘보기 좋은 것’을 고르는 장치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검증된 선택’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약속이다.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이 물건은 사람의 삶에 어떤 태도로 다가오는가.” 굿디자인이 중요하게 보는 것은 형태 이전에 태도다. 사용자를 배려하는 태도, 환경을 고려하는 태도, 오래 쓰일 것을 전제로 한 책임감이다.
일본에서는 이 제도를 ‘G 마크’라는 간결한 기호로 표현했다. 이 마크는 국민들에게 신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기업은 G 마크를 통해 품질과 디자인 역량을 증명했고, 소비자는 그 마크를 보고 제품을 선택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발전했는데, 레드닷(Red Dot)과 iF 어워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단순히 제품을 심사하는 것을 넘어 기업의 혁신과 철학을 평가한다.
결국 굿디자인은 국가의 문화 수준과 산업 경쟁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굿디자인 제도가 도입되던 시기 역시 비슷한 고민의 연속이었다.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던 시절, 많은 제품이 만들어졌지만 ‘왜 이 형태여야 하는가’, ‘왜 이렇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수십 년간 이 제도를 운영하며 기업과 국가 경쟁력에 큰 힘을 얻고 있었고, 한국은 이제 막 디자인 산업을 제도화하려는 시점이었다.
나는 일본 산업디자인 진흥기관에서 몇 개월 동안 연수를 받으며 굿디자인 제도의 목적, 운영 방식, 심사 기준을 꼼꼼히 기록해 돌아왔다. 그 결과 한국에서도 GD라는 약칭으로 산업디자인진흥 정책의 핵심 제도로 1985년부터 한국에서도 굿디자인 제도가 도입되었다. 작은 씨앗 같은 일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한국 디자인 정책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한국은 호주와 MOU를 맺어 굿디자인 인증을 상호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호주 심사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는데, 놀라운 경험이었다. 호주는 100여 점의 제품을 무려 4일 동안 꼼꼼히 심사했다. 실제로 제품을 사용해 보고, 문제점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세심함까지 증명해 가는 과정이었다.
굿디자인 제도는 바로 그 질문을 제도적으로 끌어올린 장치였다. 디자인을 단순한 외형 경쟁에서 꺼내어, 삶과 연결된 문제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사람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자연스럽게 이끈다. 버튼의 위치 하나, 손잡이의 각도 하나, 화면의 흐름 하나가 사용자의 행동을 조용히 안내한다. 이때 사용자는 배웠다고 느끼지 않고, 이해했다고 느낀다. 굿디자인이 추구하는 경험은 바로 이런 상태다. 사용자가 주체가 되고, 디자인은 뒤로 물러난다.
굿디자인이 말하는 ‘좋음’이란, 삶을 방해하지 않는 정직함이다. 과장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며, 오래 함께할 수 있는 태도. 좋은 디자인은 늘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서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아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굿디자인은 제도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된다.
기준이 생기면 생활이 달라진다
사람의 하루는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컵을 쓸지, 어떤 의자를 고를지, 어떤 가전을 집 안에 들일지. 우리는 그 모든 선택을 매번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시간도 부족하고, 모든 정보를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는 기준을 찾게 된다. 굿디자인 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전문가만을 위한 평가 시스템이 아니라, 생활 속 선택을 돕는 사회적 약속이다.
굿 디자인의 성공 사례는 대개 거창한 발명보다 사람의 불편을 정확히 바라본 순간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표적인 생활용품, 주방용품 브랜드인 옥스(OXO)의 감자칼은 관절염을 앓던 아내의 손을 보고 탄생했다. 미끄럽지 않은 두툼한 손잡이는 누구에게나 편했고, 결과적으로 전 세계 주방의 표준이 되었다.
애플(Apple)사의 아이팟(iPod)은 버튼을 줄이고 휠 하나로 음악을 듣는 즐거움에 집중시켜, 기술을 감성으로 바꿨다. 또 무인양품은 브랜드를 드러내지 않는 선택으로 오히려 신뢰를 얻었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더하기’가 아니라 ‘덜어내기’다. 사용자의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때, 디자인은 설명 없이도 사랑받는다. 좋은 디자인은 그래서 조용하지만, 오래 흥이 난다
굿디자인 제도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물건을 골랐다. 오래 쓰는 브랜드, 주변에서 많이 쓰는 제품, 혹은 경험에서 얻은 감각이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산업이 복잡해지고 제품의 종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개인의 경험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공적인 디자인 기준이다. 굿디자인은 개인의 취향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최소한의 신뢰성을 제시한다. “이 물건은 적어도 사람의 생활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인 셈이다.
굿디자인 제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다. 외형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용성, 안전성, 지속 가능성, 환경에 대한 배려 같은 요소는 소비자가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굿디자인 심사는 이러한 요소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를 하나의 상징으로 전달한다.
소비자는 그 상징을 통해 복잡한 판단 과정을 간접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이것이 굿디자인이 단순한 상이 아닌 이유다. 이 제도는 기업의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굿디자인을 목표로 삼는 순간, 기업은 단순히 팔리는 디자인을 넘어 오래 살아남는 디자인을 고민하게 된다.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불편을 줄이며,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이는 곧 제품 개발 전반의 방향을 바꾸는 힘으로 작용한다. 굿디자인은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다.
한국에서도 굿디자인 제도는 점차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초기에는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산업 정책의 성격이 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용품, 공공시설, 건축공간, 서비스 영역까지 평가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는 디자인을 더 이상 특정 분야의 전문 기술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공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디자인이 생활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불필요한 기능과 과잉된 표현에 지친다. 굿디자인은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건다. 정말 필요한가, 정말 도움이 되는가, 정말 오래 쓸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굿디자인 제도의 가장 큰 힘이다.
결국 굿디자인은 선택을 대신해 주는 제도가 아니라, 선택의 질을 높여 주는 제도다. 생활 속에서 조용히 작동하며, 사람들에게 더 나은 기준을 건네는 일. 그 기준이 쌓일수록, 사회의 디자인 감각은 한 단계씩 성숙해진다.
제도, 기록, 그리고 생활로 이어지는 시간
좋은 디자인은 늘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생각한다. 굿디자인 제도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제도는 지금의 유행을 평가하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기준을 기록한다.
굿디자인 제도는 사회가 디자인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방식이기도 하다. 단순히 잘 만든 물건을 뽑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이유와 맥락을 함께 남긴다. 어떤 문제를 해결했는지, 어떤 생활 장면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를 기록하는 일. 이 기록은 곧 다음 세대를 위한 참고서가 된다. 디자인은 이렇게 축적될 때 문화가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공공 영역에서의 굿디자인이다. 거리의 표지판, 공공시설의 안내 시스템, 의료나 교통과 관련된 서비스 디자인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 모두의 안전과 직결된다.
이 영역에서의 디자인은 더욱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게 다뤄져야 한다. 굿디자인 제도는 이러한 공공성을 평가 기준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디자인을 개인의 미감이 아닌 사회적 약속으로 확장시킨다. 디자인 제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갱신해야 한다. 기술은 변하고, 생활 방식은 달라지며, 사회의 가치관도 이동한다. 과거에는 고려하지 않던 환경 문제, 접근성, 다양성 같은 요소들이 이제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었다.
굿디자인 제도가 의미를 유지하려면, 이러한 변화들을 기준 안으로 자연스럽게 흡수해야 한다. 좋은 디자인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고, 생활의 흐름을 부드럽게 만든다. 굿디자인 제도는 이러한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박수보다 기록에 가깝고, 유행보다 신뢰에 가깝다.
결국 굿디자인이 사회에 남기는 가장 큰 유산은 ‘기준을 갖는 문화’다. 무엇이 편리한지, 무엇이 오래 가는지, 무엇이 사람을 존중하는지에 대해 사회가 함께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 질문이 반복될수록, 디자인은 점점 더 생활 깊숙이 자리 잡는다.
좋은 디자인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매일의 생활을 조금씩 편하게 만들고, 그 변화가 쌓여 사회의 얼굴을 바꾼다. 굿디자인 제도는 그 과정을 기록하고 연결하는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살아 있는 한, 디자인은 늘 사람 곁에 머문다.

>> 우수디자인상품선정 제도 안내 (한국디자인진흥원) https://www.kidp.or.kr/?menuno=922

자료사진 : 우수디자인 심사 준비 장면 (한국디자인진흥원)
박희면
디자이너·작가.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27년간 국가 디자인 진흥과 굿디자인(GD) 제도 정착에 기여했으며, 2008년 산업포장을 수훈했다. 한국공학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세종캠퍼스에서 후학을 양성해왔으며, 현재 한국정리문화체험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이 수록된 책
『히든코리아: 한국의 문화와 공간, 사소한 기적들』은 디자이너 박희면이 한국의 도시와 골목, 건축과 생활도구, 자연과 산업 속에 숨어 있는 문화와 디자인의 의미를 기록한 인문·문화 에세이다. 공중전화기, 항구, 성곽, 정거장, 굿디자인 제도,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풍경과 사물을 통해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조형의식, 그리고 디자인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