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단지의 ‘틈’을 디자인하다
창원 청년디자인리빙랩, ‘마이크로 틈새문화’ 현장에서
9월 18일 창원국가산업단지 기업사랑공원에 나왔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운영하는 ‘창원문화선도산단 청년디자인리빙랩’의 핵심과제인 ‘마이크로 틈새문화’ 프로그램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기 위해서다.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어렵게 준비한 행사가 제대로 열릴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날씨가 화창해졌다. 비가 지나간 공원에는 오히려 시원하고 쾌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전에 신청한 시민들과 점심시간을 맞아 공원을 찾은 근로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잔디밭에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아 쉬는 사람, 스트레칭과 지압 도구를 사용해보는 사람, 프로그램 안내판 앞에 멈춰 내용을 읽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점심시간 20분을 활용한 러닝과 요가가 시작되자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한데 모였다. 현장을 걸어보고 직접 의자에도 앉아보고 프로그램에도 참여해보니 이 서비스가 무엇을 하려는지 더 분명하게 보였다. 산업단지 근로자 하루 속에 존재하지만 그냥 흘려보내던 짧은 ‘틈’을 휴식과 운동의 시간으로 다시 디자인하는 것이다. 점심시간 20분도 하나의 서비스가 될 수 있다
기업사랑공원에는 서로 다른 방식의 쉼을 경험할 수 있는 세 공간이 마련됐다.
Charging Zone에서는 공원의 자연과 풍경을 바라보거나 필사를 하며 잠시 머문다.
Relaxation Zone에서는 여러 형태의 쉼 의자에 앉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시간을 경험한다.
Momentum Zone에서는 지압과 스트레칭처럼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활력을 되찾는다.
쉼을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쉼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좋은 휴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POP UP LAB’도 운영됐다. 참가자들이 여러 방식의 쉼을 직접 경험한 뒤 어떤 방식이 자신에게 맞았는지 의견을 남기고, 온라인 설문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산업단지에서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쉬고 싶은가’를 현장에서 다시 묻는 장치인 셈이다.
이런 구조는 리빙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정해진 해답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경험해보게 하고, 그 경험을 다시 다음 디자인의 자료로 삼는다.
점심, 퇴근 후, 주말에 맞춰 달라지는 프로그램
운동 프로그램 역시 산업단지 근로자의 실제 생활시간을 기준으로 구성했다. 9월 18일 점심에는 20분 동안 ‘틈 러닝’과 ‘틈 요가’를 진행했다. 틈 러닝은 기록이나 속도보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틈 요가는 장시간 업무로 굳기 쉬운 목·어깨·허리를 중심으로 몸을 풀 수 있도록 했다.
퇴근 후에는 한 시간 동안 ‘퇴근 런’을 운영했다. 워밍업에서 러닝, 쿨다운 걷기까지 이어지며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을 풀도록 구성했다.
토요일에는 프로그램의 폭을 조금 넓혔다. 오전에는 동물의 움직임을 응용한 애니멀 플로우, 오후에는 조깅과 팀 트레이닝이 진행됐다. 특히 토요일 오후는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시간이었다. 낮 기온이 29도까지 오르면서 오후 2시 잔디밭에서 예정했던 팀 트레이닝을 그늘이 있는 쉼터로 옮겼다. 예상보다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해온 참가자들도 많아 운동 강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졌지만, 팀별 게임과 미션을 섞은 방식으로 진행돼 분위기는 시종 즐거웠다.
F45 상남점의 진행자들은 참가자들의 움직임과 반응을 계속 살피면서 강도를 조금씩 높이거나 낮췄다. 참가자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다음 동작의 난도를 높이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보이면 다시 조정했다. 정해진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진행하기보다 날씨와 공간, 참가자의 운동 수준을 읽으면서 그 자리에서 프로그램을 조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운동 프로그램은 수행사인 에스큐브디자인랩이 기획·운영하고 F45 상남점이 전문적인 웰니스 프로그램 운영을 지원했다. 정선희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는 Momentum Zone에서 활용한 스트레칭 시퀀스 역시 전문가 자문을 거쳐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짧게는 점심시간 20분, 길게는 주말의 90분 프로그램이다. 직접 참여해보니 운동의 종류보다 ‘20분이면 할 수 있다’는 조건이 더 흥미로웠다. 근로자에게 별도로 한두 시간을 내라고 요구하는 대신 점심시간, 퇴근 직후, 주말 오전과 오후처럼 실제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택했다. 서비스는 내용만 좋아서는 이용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지가 이용 여부를 결정한다.
현장에서는 반응이 바로 보인다
한쪽에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사람들이 의견을 남길 수 있는 게시판이 마련돼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이런 말들이 남겨져 있었다.
“다시 이용하고 싶다.”
“바쁜 가운데 여유를 찾는 순간이었다.”
“점심시간에 소화도 잘되고 기분이 리프레시된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기분이다.”
“쉴 수 있어 좋아요.”
이 메모들을 하나씩 읽다 보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큰 문화시설이나 긴 프로그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곳 가까이에 잠시 앉을 곳이 있고, 점심시간에 20분 정도 몸을 움직일 기회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산업단지에서 보내는 하루의 경험은 달라질 수 있다.
현장에서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반응도 볼 수 있었다. 어떤 의자에는 사람들이 오래 머물렀고, 어떤 체험은 그냥 지나치다가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와 따라 해보기도 했다. 프로그램 안내를 읽다 옆 사람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작은 행동은 설문지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이번 운영에서 확인한 이용행태와 POP UP LAB, 현장 의견수렴을 통해 얻은 결과는 프로그램을 개선하고, 향후 남천 일대에서 추진되는 ‘아름다운 거리 플러스’ 사업과 연계해 산업단지 근로자와 주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휴식·운동 서비스를 구체화하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산업단지에 관계를 시작할 작은 계기를 만들다
현장에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참여자들의 밝은 표정과 활기찬 대화였다. 늘 같은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뿐 아니라 달리기나 요가, 운동에 관심이 있다는 이유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함께 몸을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바로 흩어지지 않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산업단지에서 부족한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보다 관계를 시작할 계기인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서로 모른 채 지나쳤을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인다. ‘운동을 좋아한다’거나 ‘잠시 쉬고 싶다’는 작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함께 뛰거나 몸을 풀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큰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도 이렇게 가벼운 활동을 반복하면 사람들 사이에 느슨한 관계가 생길 수 있다.
산업단지의 문화는 반드시 큰 공연이나 축제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서로를 알아갈 작은 계기를 반복해서 만드는 것 역시 산업단지의 문화를 바꾸는 방법이다.
창원의 산업을 문화로 바꾸는 또 하나의 실험
창원 청년디자인리빙랩 수행사인 에스큐브디자인랩은 두 번째 핵심과제인 ‘무기대전’도 준비하고 있다. 창원의 대표 산업인 방위산업을 ‘K-방산 Play Ground’라는 콘셉트로 재해석해 시민과 청년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만드는 시도다.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국립창원대학교에서 열리는 무기대전에서는 군복과 밀리터리 소품을 직접 체험하고, 군용장비에 활용되는 몰리시스템과 파라코드를 일상적인 물건과 연결해 경험할 수 있다. ‘나와 어울리는 K-방산 무기 찾기’와 같은 참여형 콘텐츠도 마련된다.
전시에서는 창원 방위산업의 역사와 대표 장비를 소개하는 한편, 국립창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학생들과 함께 미래 전장 시나리오와 미래형 무기·장비도 상상한다.
‘방산을 일상으로, 기술을 문화로.’ 산업을 생산시설이나 제품으로만 보여주는 대신 시민이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역의 문화로 번역해보려는 실험이다.
아이디어는 현장에 나왔을 때 잘 보인다
이 두 과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프로그램이 아니다. 2025년 청년디자인리빙랩에 참여한 지역의 청년과 근로자, 주민들이 워크숍과 인터뷰, 설문을 통해 창원 산업단지의 문제와 가능성을 찾았다. 그렇게 발굴한 12개의 아이디어 가운데 ‘마이크로 틈새문화’와 ‘무기대전’이 올해 실제 현장에서 구체화할 핵심과제로 선정됐다.
올해는 그 아이디어를 회의실 밖으로 꺼내놓는 단계다. 사람들이 어디에 머무는지, 무엇에 관심을 보이고 무엇은 그냥 지나치는지, 어느 시간대에 참여하는지, 다시 이용할 생각이 있는지를 실제 행동을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때로는 토요일 오후처럼 예상보다 날씨가 더 덥기도 하고, 예상보다 참가자들의 운동 수준이 높기도 하다. 그런 변수가 생겼을 때 장소를 옮기고 프로그램의 강도를 바꾸는 과정까지 현장 검증에 포함된다. 서비스디자인에서 현장은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다음 디자인을 위한 조사 장소이다.
좋은 서비스는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제와 가능성을 반영하면서 조금씩 정교해진다.
구미·완주에서 부산·원주·인천까지
청년디자인리빙랩은 2025년에는 구미·완주·창원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세 산업단지에서 지역대표단과 참여단이 워크숍, 인터뷰, 설문 등에 참여했고 총 38개의 과제를 발굴했다. 올해는 각 지역에서 선정한 핵심과제를 구체적인 서비스로 발전시켜 현장에서 검증하고 있다. 2026년에는 부산·원주·인천이 새롭게 참여하면서 모두 6개 산업단지로 확대됐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은 현재 2차년 수행사(디자인기업)를 모집중이다.
창원에서는 근로자의 짧은 휴식시간과 방위산업이라는 지역 정체성이 과제가 됐다면, 다른 산업단지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발견될 수 있다. 이동, 식사, 여가, 교통, 관계, 공간환경 등 산업단지마다 사람들의 생활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 산업단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찾고, 그 지역에 맞는 서비스를 만들고, 현장에서 직접 시험해보는 것. 그것이 청년디자인리빙랩의 방식이다.
9월 18일과 19일 창원에서 본 것도 그 과정의 한 장면이었다.
산업단지를 생산하는 곳으로만 보지 않고 사람들이 하루를 살아가는 곳으로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면 디자인해야 할 대상도 달라진다.
공장과 도로뿐 아니라 점심시간의 20분, 잠시 머물 의자 하나, 더운 날 운동할 그늘, 처음 만난 사람과 말을 섞게 만드는 프로그램까지 디자인의 대상이 된다.
‘일하다 잠깐, 나를 회복하는 시간.’
현장에 붙어 있던 마이크로 틈새문화의 문구처럼, 창원의 작은 ‘틈’에서 시작된 실험이 산업단지의 하루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정리 : 한국디자인진흥원 서비스·안전디자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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