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기획·디자인·음악·마케팅까지…
패션 브랜드 만드는 공식을 뒤집은 ‘오리지니티’
첫 프로젝트 ‘디스코테카’로 가능성 시험
패션산업에서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낯선 기술이 아니다. 생성형 AI로 광고 이미지를 만들고, 가상의 모델을 등장시키거나 상품 이미지를 제작하는 사례는 이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상품 추천이나 고객 상담에 AI를 적용하는 기업도 빠르게 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패션업계에서 AI는 대부분 기존 비즈니스의 일부를 효율화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사람이 브랜드를 기획하고 상품을 만든 뒤 촬영이나 광고, 마케팅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아예 뒤집으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AI를 마케팅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AI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브랜드 콘셉트와 세계관을 만들고, 가상의 인물을 탄생시키며,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제작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래픽과 상품 디자인, 콘텐츠, 자사몰과 커머스까지 연결한다.
20년 이상 패션 현장에서 상품과 브랜드를 만들어온 박지훈 CBO와 하성찬 CEO가 공동 설립한 AI 벤처 브랜드 스튜디오 ‘오리지니티(ORIGINITY)’가 시도하는 방식이다.
오리지니티라는 이름도 이들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시작을 의미하는 ‘Origin’, 정체성을 뜻하는 ‘Identity’, 무한한 확장성을 의미하는 ‘Infinity’를 결합했다. 이들이 만들려는 것은 하나의 패션 브랜드라기보다 AI 시대에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스템에 가깝다.
‘옷을 만들고 알린다’는 패션의 공식을 뒤집다
전통적인 패션 브랜드의 출발점은 상품이다.
시즌 콘셉트를 정하고 디자인한다. 샘플을 만들고 수정한 뒤 생산 수량을 결정한다. 공장에서 옷이 나오면 모델과 사진가, 스튜디오를 섭외해 룩북을 촬영하고 광고를 제작한다. 이후 유통망을 확보하고 마케팅을 시작한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소비자가 그 브랜드를 좋아할지 알기도 전에 이미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 상품기획과 디자인, 샘플, 생산, 촬영, 광고, 유통 등에 자본을 투입해야 하고 예상만큼 팔리지 않으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재고와 손실로 남는다. 특히 신규 브랜드라면 위험은 더욱 크다. 오리지니티는 이 구조를 반대로 돌린다.
옷을 만들기 전에 먼저 브랜드를 만든다. 정확하게는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세계’를 먼저 만든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설계하고 이미지와 캐릭터, 음악, 영상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먼저 보여준다. 사람들이 어떤 콘텐츠에 반응하는지 살펴본 뒤 가능성이 확인되면 이를 실제 상품과 공간, 커머스로 확장한다.
옷을 만든 뒤 그럴듯한 이야기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먼저 만들고 그 이야기에 소비자가 반응하면 옷을 만드는 방식이다. ‘MAKE-TEST-STOP-SCALE’를 브랜드 루프로 표현한 이유다. 브랜드 가설을 만들고 콘텐츠로 시장 반응을 시험한 뒤, 반응이 없다면 멈추고 가능성이 확인되면 투자를 확대한다.
패션 비즈니스의 고질적인 문제인 재고 리스크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기존 방식에서는 이미 제품을 생산한 이후에 소비자 반응을 확인한다. 판매가 부진해도 그동안 투입한 비용 때문에 브랜드를 쉽게 접지 못한다.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할인하고 다시 마케팅 비용을 투입하면서 손실이 확대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 오리지니티가 구상하는 모델에서는 여러 브랜드 아이디어를 상대적으로 작은 비용으로 시험할 수 있다. 반응이 없는 아이디어에는 더 이상 투자하지 않고, 반응이 확인된 브랜드에 자본과 인력을 집중한다.
결국 AI의 진짜 효용은 예쁜 이미지를 싸고 빠르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실패에 들어가는 비용을 낮추고 성공 가능성을 검증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AI가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방향을 정한 것은 사람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오리지니티의 실험을 ‘AI가 인간 디자이너를 대신한 브랜드’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경험 많은 패션 디렉터 한 사람의 능력을 AI를 통해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프로젝트다.
박지훈 CBO는 스포츠와 아웃도어, 라이프스타일 패션 분야에서 20년 이상 일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어패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비롯해 KANGOL, SUPRA, 2XU, NEPA, 데상트 등에서 상품기획과 브랜드 운영을 경험했다.
과거라면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디자인팀, 상품기획팀, 콘텐츠팀, 촬영 스튜디오, 영상 제작사, 웹 개발사, 마케팅 조직이 각각 움직여야 했다.
오리지니티에서는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을 AI가 ‘확장된 조직’처럼 수행한다.
박 CBO가 브랜드 콘셉트와 상품 구조를 설계하면 AI를 활용해 그래픽과 비주얼을 발전시키고 콘텐츠를 만든다. 이미지와 영상은 물론 음악과 가상 캐릭터까지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연결한다. 자사몰 구축과 운영 역시 이 시스템 안에 들어간다.
그렇다고 AI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AI는 수십, 수백 장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지만 어떤 이미지가 브랜드에 맞는지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어떤 실루엣을 상품화해야 하는지, 어떤 소재를 선택해야 하는지, 무엇이 시장에서 팔릴 가능성이 있는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박 CBO가 강조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AI는 ‘요술램프 속 지니’가 아니다.
목표가 잘못돼 있으면 아무리 많은 명령을 내려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정의하고, 조건과 우선순위를 제시하며, 결과물을 평가한 뒤 다시 방향을 수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AI 시대에 패션 전문가의 역할이 사라진다기보다 오히려 ‘안목과 디렉팅 능력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자료에서도 AI가 증폭시키는 것은 결국 사용자의 안목과 경험이며, 상품과 시장을 이해하는 디렉터가 사용할 경우 한 사람의 업무 영역이 조직 단위로 확장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패션 브랜드인데 옷보다 ‘밴드’를 먼저 만들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오리지니티가 처음 내놓은 프로젝트가 ‘디스코테카(DISKOTEKA)’다.
그런데 패션 브랜드를 만든다면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옷이 아니다. 밴드였다.
D.I.S.K는 단테(Dante), 아이리스(Iris), 솔(Sol), 키로(Kiro)로 구성된 4인조 혼성 가상 밴드다. 네 멤버의 이름 첫 글자를 조합해 밴드명을 만들었다.
오리지니티는 AI를 활용해 네 사람의 외모와 목소리를 설계했다. 여기에 음악과 앨범 아트워크,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했다. 작곡과 보컬, 캐릭터 비주얼과 영상 제작을 거쳐 총 8곡으로 구성된 첫 번째 앨범 ‘The Noise’도 완성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AI 가상 아이돌 프로젝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D.I.S.K의 목적은 음악 자체에만 있지 않다. 밴드는 디스코테카라는 패션 브랜드의 세계관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주인공이다.
설정도 구체적이다. D.I.S.K 멤버들이 성수동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하고 그 공간이 바로 ‘디스코테카’다. 가상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패션 상품과 오프라인 문화 공간으로 이어진다.
옷의 패키지도 LP를 연상시키는 박스로 설계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D.I.S.K의 음악이 재생된다.
‘Scan-Play-Wear’. 스캔하고, 음악을 듣고, 옷을 입는다.
패션을 시각적인 영역에 한정하지 않고 음악과 영상, 캐릭터, 공간과 상품을 하나의 경험으로 연결하려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옷은 브랜드 세계관의 출발점이 아니다. 이미 콘텐츠를 통해 만들어진 세계를 현실에서 소유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
마케팅을 위한 콘텐츠가 아니라, 콘텐츠가 마케팅이 된다 더 주목할 부분은 콘텐츠와 마케팅의 관계다.
기존 패션 브랜드는 상품을 알리기 위해 콘텐츠를 만든다. 룩북도, 광고도, SNS 영상도 궁극적으로 옷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수단이다.
디스코테카는 반대다.
소비자가 아직 옷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음악과 영상을 먼저 접한다. 콘텐츠가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이 나중에 브랜드의 잠재 고객이 되는 구조다.
실제 D.I.S.K의 ‘Paper Cut Moon’ 영상은 별도의 광고 집행 없이 유튜브에서 조회 반응이 나타났으며 쇼츠에서도 광고에 의존하지 않은 유입이 발생하고 있다고 회사 측은 설명한다. 다만 오리지니티 역시 이를 아직 ‘성공’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제품 정식 판매 이전인 만큼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실제 구매로 전환되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하다.
AI로 수십만 조회 수를 만드는 것과 패션 브랜드로 돈을 버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AI 캐릭터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뮤직비디오가 화려해도 소비자가 받아든 티셔츠의 원단이 좋지 않거나 봉제가 엉망이라면 브랜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핏과 소재, 가격, 생산수량, 배송, CS와 오프라인 경험은 결국 현실의 영역이다.
그래서 오리지니티에는 또 하나의 축이 있다.
공동창업자인 하성찬 CEO다. 하 CEO는 20년 이상 글로벌 패션기업에서 상품기획과 생산, 공급망 운영을 담당해온 인물이다. 박지훈 CBO가 AI를 이용해 가상의 세계와 콘텐츠를 만든다면 하 CEO는 이를 원가와 생산, 품질과 납기라는 현실의 패션 비즈니스로 옮기는 역할을 담당한다.
결국 이 회사의 경쟁력은 AI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20년간 브랜드를 만들어온 크리에이티브 경험과 20년간 상품을 생산해온 제조·공급망 경험 사이에 AI를 집어넣었다는 것에 가깝다.
AI는 패션의 ‘도구’에서 ‘운영체제’가 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오리지니티의 실험은 디스코테카라는 신생 브랜드 하나의 성공 여부보다 조금 더 큰 질문을 던진다.
AI는 패션산업의 비용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지금까지 패션기업들이 AI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 부분 ‘효율화’에 맞춰져 있었다. 광고 이미지를 더 싸게 만들고, 카피를 빠르게 쓰고,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하고, 상품 이미지를 생성하는 식이다.
오리지니티가 한 발 더 나아간 부분은 각각 떨어져 있던 AI 활용을 하나의 브랜드 비즈니스 안에 연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기획부터 세계관, 캐릭터, 음악, 영상, 디자인, 콘텐츠, 마케팅, 상품과 커머스까지 AI를 관통시키면 기존에 수십 명이 필요했던 브랜드 조직의 형태 자체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신규 브랜드에는 의미가 크다.
패션 비즈니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실패 그 자체보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수천 장의 제품을 생산하고 매장을 열고 광고비를 집행한 다음에야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브랜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AI를 통해 브랜드의 가설을 빠르게 만들고 콘텐츠 단계에서 소비자의 반응을 시험할 수 있다면 이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 여러 개의 아이디어를 작은 단위로 실험하고 살아남은 브랜드에만 생산과 유통 자원을 집중하는 일종의 ‘브랜드 포트폴리오 방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실험이다.
디스코테카는 이제 출발선에 서 있다. 회사 측 역시 제품 판매가 본격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 모델의 성공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인정한다. 콘텐츠의 조회 수가 구매로 이어지는지, AI가 만들어낸 속도와 효율성이 실제 상품의 완성도와 안정적인 운영으로 연결되는지 검증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 때문에 디스코테카가 더 흥미롭다.
AI가 만든 화려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캠페인이 아니라, AI를 패션 비즈니스의 중심에 넣었을 때 실제 브랜드가 어디까지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시장에서 시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패션은 옷을 먼저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오리지니티는 이야기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고, 사람을 모은 다음 옷을 만든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패션 브랜드의 창업 풍경도 달라질 수 있다. 거대한 사무실과 수십 명의 조직, 수천 장의 초도 물량을 준비하는 대신 경험 많은 디렉터와 AI, 그리고 생산을 현실화할 소수의 전문가가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오리지니티가 던지는 질문은 ‘AI가 디자이너를 대신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AI를 가진 디렉터 한 사람은 과연 어디까지 브랜드가 될 수 있는가’에 가깝다.
그리고 그 답을 확인하기 위한 첫 번째 트랙이 이제 막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소비자와의 접점을 강화하기 위해 성수 서울숲에 오프라인 1호 매장도 오픈했다.
이번 ‘디스코테카’ 론칭은 단순히 AI가 도입된 패션 브랜드라는 점에서만 출발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브랜드를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 https://fpost.co.kr/board/ )
원문기사링크 : https://fpost.co.kr/board/bbs/board.php?bo_table=special&wr_id=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