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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 프랑세즈-프랭크 게리

앙리 랑글루아.
68혁명.
누벨바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1948년 10월26일 빠리의 첫 번째 영화 박물관인 시네마테끄 프랑세즈가 개관하였다.
시네마테끄 프랑세즈는 고전 영화를 소개하고 상영하며 미래의 영화에 대한 조명이 활발히 이루어 지는 곳이었고 20년대부터 시작된 시네클럽 의 활동을 하나로 묶는 시네필들의 모임의 장소이자 토론의 장소였다.
당시 시네마테끄 프랑세즈의 규모는 객석 50석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늘 붐볐으며 활기로 가득했다.

이곳의 설립자 앙리 랑글로와는 영화교육은 지식을 전수하고 배우는 학교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느끼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의도처럼 시네마테끄 프랑세즈는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모이게 했으며 잠재적 미래의 영화감독들은 그곳에서 또한 영화의 영사와 예술적 관념들과 정신도 세울 수 있었다. 장 뤽 고다르는 " 영화에 관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시네마테끄에서 배웠다 " 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그들의 열정과 꿈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1968년 2월9일, 드골정부의 문화부 장관 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하기로 결정한다.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그들의 팬들과 감독과 배우들은 해임반대 시위를 시작하고 알프레드 히치콕, 장 르누아르, 구로사와 아키라, 찰리 채플린, 잉마르 베리만 등 저명한 감독들 또한 랑글루아의 복직을 요구하고 나선다. 
그 해 빠리의 이 랑글루아 사건 (l""affaire Langlois) 는 이해겨울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었고 4월 앙리 랑글루아는 드디어 복직되게 이른다.
영화 논쟁에서 촉발되었던 이 ""랑글루아 사건""은 같은 해 5월 68혁명의 시발이 되었던 것이다.

시네마테끄 프랑세즈는 이토록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런 큰 의미를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영화가 이미 일상처럼 자리잡고 있는빠리지엥들 에게 시네마테끄 프랑세즈의 재개관은 이미 큰 의미가 있다.
Bercy 거리51번지에 얼마 전 새롭게 문을 열어 찾아간 시네마테끄 프랑세즈 에는 역시나 새로 단장한 문화놀이터를 보러 온 남녀노소를 불문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 건물은 구 미국문화원 건물을 리모델링 한 것인데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다. 4개의 상영관, 전시장, 도서관, 레스토랑, 미디어테크 등의 시설이 있다.

 

 

 

 

 

 

 

 

 

 

 

 

 

 

 

 

 

지금 현재 인상주의 작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들과 그의 둘째 아들이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감독중 하나로 칭송받는 장 르누아르의 작품이 음악, 사진, 영상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는데 아버지에게서 사물을 보는 엄격한 눈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 삶과 예술에 대한 숭고한 철학을 물려받았다. 두 거장들이 아버지와 아들로써 그리고 예술가로써 서로 주고 받았던 영향들을 상상할 수 있었던 재미있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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