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0 : 디자이너와 사회적 약자가 정책 설계에 참여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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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휠체어를 탄 한 남성이 망가진 경사로를 피해 돌아간다. 몇 번이나 바퀴가 도로턱에 걸리며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눈앞을 지나쳐갔다. 그는 이 도시가 자신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가 처한 상황과 좌절감은 정책 설계자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이 사회의 권한과 자원을 가진 이들은 그런 좌절감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문제를 알아차릴 수 없으면, 고칠 수도 없다.
우리가 마주한 많은 사회 문제는 불편을 느끼는 당사자가 직접 싸우고 목소리를 낼 때만 변화의 계기가 생겼다. 노예 해방, 여성 해방, 노동 운동이 그랬다. 불편한 현실을 바꾸는 힘은 늘 가장 약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오늘날의 정책 설계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정책은 여전히 행정가 중심으로 설계되고 있으며, 설계자와 수요자 사이의 단절은 정책의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
사용자 관점이 정책 설계에 개입될 수 있다면?
디자이너는 이러한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존재다. 감각과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불편을 구조화하고, 당사자의 경험을 구체적인 문제 정의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사회적 약자는 문제를 감지하고, 디자이너는 그것을 번역하며, 정책 설계자는 이를 반영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상적이지만, 실현 가능한 구조다.
이러한 시도는 프로젝트 단위에서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 브롱크스의 '멜로즈 커먼스' 프로젝트[1]에서는 주민과 취약계층이 도시 재생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해 계획을 주도했다. 이탈리아의 '파코 디자인 콜퍼러티브'[2]는 소외 청년들과 함께 지역 문제를 풀어가는 디자인 활동을 펼쳤다. 일본의 '트라이포드디자인'은 장애인을 리드유저로 참여시켜 누구에게나 편리한 제품을 설계했다.[3] 이런 사례들은 "약자와 디자이너의 협력"이 정책 설계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실험에서 제도로: 정책랩의 등장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제도화되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 것이 '정책랩'이다. 정책랩은 각국 정부가 정책 설계 과정에서 실험과 관찰을 '공식 절차'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이다. 이는 정부가 '정책은 분석이나 통계가 아니라, 실제로 관찰하고 실험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 덴마크의 '마인드랩(MindLab)'은 사용자 중심 정책 실험을 제도화한 선구적 조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2010년대부터 다양한 국가에서 정책랩 성격의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2014년 영국의 '폴리시랩(Policy Lab)'은 이러한 흐름을 본격화하고 확산시키는 대표적 사례로 주목받았다. 이들은 디자인 씽킹, 사용자 조사, 시나리오 기획 등의 도구를 활용해 기존의 공급자 중심 정책 설계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현재 운영 중인 대부분의 정책랩은 "디자이너와 사회적 약자가 함께 운영하는 조직"은 아니다. 디자이너가 핵심 역할자로 참여하며, 사회적 약자는 특정 프로젝트에 국한하여 참여된다. 즉, 아직은 제도화 초기 단계이며, 참여 구조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를 체감하는 사람과 문제를 번역하는 전문가를 정책 설계에 포함시키려는 제도적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정책 설계의 기본값을 바꾸려는 흐름이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다.
이 글은 그러한 흐름에 대한 서문이자, 정책 설계의 기본값을 묻는 문제제기다. 정책은 여전히 공급자인 행정가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수요자의 불편은 사후적으로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디자이너와 사회적 약자의 참여가 왜 중요한지를 다시 묻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 제도화 실험이 ‘정책랩’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서 시도되고 있다. 다음 글부터는 정책랩이 실제로 무엇인지, 어떤 나라에서 어떤 구조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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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욕 브롱크스의 멜로즈 커먼스(Melrose Commons) 프로젝트에서는 지역 주민들, 취약계층들이 도시 재생 계획의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했다. '우리는 여기 남는다(We Stay/Nos Quedamos)' 커뮤니티 조직은 주민들이 직접 정책 설계에 참여하도록 이끌며 지역 개발을 주도했다. 디자이너들은 조력자로서 주민들과 협력하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발을 이끌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와 같은 약자 주도의 정책 설계는 다른 국가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다.
[2] 이탈리아의 파코 디자인 콜퍼레이티브(PACO Design Collaborative)의 참여적 디자인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외된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디자이너들이 그들과 협력하여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디자이너들은 약자들의 아이디어와 요구를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3] 일본의 디자인기업 ‘트라이포드디자인’(tripod design)은 제품 개발할 때 만 명이 넘는 ‘리드 유저’(lead user)라는 사용자 풀(Pool)을 활용한다. ‘감각’이 앞서 있다는 뜻의 리드 유저는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로, 디자인 개발 시 아이디어의 도화선이 될 수 있도록 이들을 디자이너들과 함께 참여시키고 있다. 이들도 편하게 느끼는 제품이라면 비장애인에게는 더욱 편리할 것임이 분명하다. 아래는 트라이포드디자인이 개발한 제품의 예시이다. 완만한 곡면과 각진 면을 가져 힘을 주지 않아도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잘 구르지 않는 투명한 젓가락으로, 이것은 일본항공 JAL의 일등석용 제품의 원형이 되었다.
사진 : 장애인들은 아무리 기능이 편리하다 해도 독특한 형태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젓가락은 선호하지 않았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디자인의 컨셉이 나왔다. 이 젓가락의 사용은 좌석의 조명 아래 우아하고 마법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좌) 장애인과 협업을 통해 개발된 젓가락 (시제품), (우)JAL에 최종 납품된 젓가락 2008년 시카고 아테네움 굿디자인어워드 수상
출처 : 윤성원. 2024.10.11. https://servicedesign.tistory.com/678
2025. 5.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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