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을 디자인하는 조직, 정책랩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사회문제는 복잡한 난제(Complex Wicked Problems)로 변하고 있다. 기후변화, 공공보건, 지역 소멸, 사회적 고립, 청년 일자리 문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영역이 얽히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특정 영역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행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전통적 행정은 계층적이고 관료적 구조에 기반하고 있어 각 부처는 고유의 역할에만 집중한다. 통합적 대응이나 유연한 실험은 일어나기 어려운 반면 정책은 분절되고 중복되기 쉽다. 전에는 단단하고 견고하게 보였던 구조가 변화된 사회가 제시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는 완고한 꼰대가 되어버렸다. 10년 후, 20년 후를 생각해보라. 사회가 복잡해지는만큼 난제는 더 많아질 것인데 기존 칸막이식 행정 체계로는 대응이 더 어려워지지 않겠는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NPM)가 도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공부문 내 책임 분산, 협력 부족, 시민의 문제해결 역량 약화 등 새로운 부작용을 낳았다. 예산이 투입되지만 문제는 되풀이되고 국민들은 거듭 낭패를 겪는다. 현 구조는 임시 방편으로 물이 새는 배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격인데 이제는 배의 설계도를 다시 그려야 할 때이다. 구조를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 한, 행정은 같은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정책랩의 세계적 확산과 한국의 실패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정책랩(Policy Labs)’, '리빙랩' (living Labs)과 같은 참여 기반의 대안적 정책 실험 조직이 등장했다. (이 글에서는 정책랩에 대해서만 다룬다.)영국, 핀란드, 미국 등에서는 정책랩이 정부 내 실험 기능을 갖춘 혁신 조직으로 자리잡았으며,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주목했지만, 제도화에는 실패했다. 2018년, 기획재정부는 한국행정연구원을 통해 디자인씽킹과 열린정책랩의 세계 동향을 조사하고 국내 적용 방안의 연구를 시작했다. 5년간 ‘열린정책랩’이라는 이름으로 실험이 시도되었고, 툴킷 개발과 개념 정리 등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정책 설계 체계의 전환이나 정부조직 내 제도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국제 흐름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정책을 실험하고 재설계하는 기능을 실제 행정 시스템에 구현하지 못한 것이다. 보다 과감하면서도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 참고: 열린정책랩 관련 연구보고서, 한국행정연구원, 2018~2022
정책랩이란 무엇인가
정책랩은 행정의 구조적 한계를 인식한 국제사회에서 등장한 공공부문 혁신 조직이다. 이 조직은 정부 부처, 지자체, 공공기관 내부에 설치되며, 실험과 반복을 통해 정책을 재구성하고, 시민과의 협업을 기반으로 더 나은 해결책을 도출한다. 디자이너가 핵심 구성원으로 참여하며 디자인 방법론, 특히 서비스디자인을 활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정책랩은 문제를 시각화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실제 현장에서 테스트하며 정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구조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은 단지 실행의 수단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다시 묻고 접근 방식을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누구의 시선으로 문제를 정의할 것인가를 되묻는 그 순간부터, 정책은 기존과 전혀 다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정책랩이 활용하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접근 방식 자체를 바꾸는 방법이다. 단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누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정의할 것인지’를 먼저 묻는다. 이처럼 디자인은 기존의 해법이 놓치고 있던 물음부터 다시 꺼내게 한다. 덕분에 행정은 공급자 중심의 일방적 조치가 아니라, 시민의 삶에서 출발한 정책을 만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전환된다.
이러한 디자인적 관점을 실제 정부 운영에 도입한 대표 사례가 영국 폴리시랩이다. 초대 소장 안드레아 시오드목(Andrea Siodmok)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로, 대학에서 자동차디자인을 가르치다 정부로 진입했다. 내각부 부국장으로서 폴리시랩, 오픈이노베이션팀, 혁신 공간 네트워크 스카이룸을 총괄하며, 디자인 기반 정책 혁신을 제도화한 상징적 인물이다.
왜 어떤 정책랩은 성공하고, 어떤 정책랩은 실패하는가
영국은 성공했고, 우리는 실패했다.
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운영방식이나 툴킷에 있지 않다. 조직 내부에 디자이너가 있느냐 실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인가. 그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핵심은 방법이 아니라 관점에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폴리시랩의 창설자 안드레아 시오드목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로서 행정 시스템에 진입했고, 내각부의 제도적 보호를 받으며 정책 실험을 주도할 수 있었다. 즉, 디자이너가 내부인(in-house)으로 시스템을 흔들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반면, 한국의 시도는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정책랩이 제도화되지 못했으며 시범적으로 운영된 일부 정책랩에서조차 주요 역할은 행정 전문가와 연구자가 맡았고, 디자이너는 외부에서 자문하는 역할에 그쳤다. 디자이너가 문제를 재정의하고, 실험을 설계하고, 실패를 반복하면서 학습할 수 있는 조직적 권한과 보호 장치가 없었다. 서비스디자인은 단순 외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관점이며 문화이다. 조직 내부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어떤 좋은 도구와 방법론도 무용하다.
이 점에서 미국의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의 혁신센터 CFI(Center for Innovation)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메이오 클리닉은 미국 의료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기관 중 하나로, 2023년 기준 US News & World Report 병원 종합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진료 품질·환자 안전·연구 역량 면에서 압도적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명성과 권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메이오 클리닉은 ‘혁신’을 단지 기술 개발이 아니라 서비스 전반의 구조적 개편으로 이해해왔다. CFI는 미국 의료계에서도 서비스디자인과 시스템적 사고를 결합한 대표적 혁신 거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메이오 클리닉 혁신센터에서 배우는 덜 파괴적인 혁신』(2015, 바버라 스푸리어 외)에 따르면 이 센터는 총 60명의 구성원 중 무려 14명이 서비스디자이너다. 병원이라는 고도로 규제된 조직에서도 디자이너가 상시적으로 문제를 재정의하고, 실험을 설계하며, 실제 환자 경험과 시스템 구조를 동시에 다루는 핵심 인력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의료는 공공 행정과 유사하게 위험을 회피하고 통제를 중시하는 조직문화를 갖고 있다. 이는 지탄받을 특성이 아니라, 업역의 본질에 가까운 성향이다. 매번 새로운 시술법을 즉흥적으로 시도하려는 창의성과 도전정신에 가득찬 의사가 있다면, 누구도 그에게 치료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의료와 공공서비스는 신중하게 검증되고, 충분히 확인된 영역을 중심으로 아주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보수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이와 같은 조직이 혁신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실험’을 설계하고 추진할 수 있는 별도의 촉진자 역할, 즉 디자이너의 존재가 중요해진다. 그렇기에 CFI에 그렇게 많은 서비스디자이너가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실험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은 디자인 업역의 본질과도 같다. 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실험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존재 가치가 줄어든다. 메이오 클리닉은 이를 명확히 이해했고, 디자이너를 조직 내 변화의 진동을 일으키는 존재로 배치했다. 단 한 명으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그래서 혁신을 주도할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다르게 정의하고 실험의 방법으로 접근하는 존재가 시스템 안에서 주도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공공조직은 실패하고 있다.
한국의 중앙정부에도 ‘혁신행정담당관’, ‘청년 보좌관’, ‘혁신 어벤져스’ 같은 이름의 역할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성과 관리, 평가, 지표 정비 등 관리와 통제 중심의 역할을 수행한다. 창의성과 실험을 요구받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기능을 강화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 혁신을 통제한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적 구조다. 혁신과 통제를 한 사람이 동시에 잘 해내긴 어렵다. 어떤 사람은 질서를 유지하는 데 능하고, 어떤 사람은 기존의 룰을 의심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능하다. 두 역할은 모두 중요하지만, 같은 사람이 다 잘 할 수는 없다. 마치 규칙을 지키는 심판에게 동시에 새로운 경기 규칙을 다시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정책랩이라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 그 조직 안에 보호받는 진짜 디자이너들이 상주하며, 실험과 실패를 반복할 수 있도록 제도적 설계를 해야 한다. 이는 공공 부문의 조직 설계와 인사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지방정부, 광역지자체, 중앙부처까지, 각급 공공조직에 정책랩이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디자이너는 ‘외부 도움’이 아니라 ‘내부 촉매’로 위치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혁신은 말이 아니라 실행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가 단지 한 사람의 역량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영국 폴리시랩의 현재 운영 구조만 보아도 명확하다.
2025년 현재 폴리시랩은 30명 내외의 조직으로, 디자인연구자인 카밀라 뷰캐넌(Dr. Camilla Buchanan)과 예술가인 스티븐 R.G. 베넷(Stephen R.G. Bennett)이 공동대표이다. 이들은 행정 전문가나 전형적인 정부 관리자가 아니라, 새로움을 정의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디자인과 예술의 전문가가 조직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정책랩이 관리하고 통제하는 조직이 아님을 말해준다. 관행에 익숙한 사람이 혁신을 조직할 수는 없다. 혁신은 언제나 낯설고 불편한 질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뷰캐넌과 베넷은 질서에 도전하고, 실험을 기획하며, 기존 사고를 비틀 수 있는 리더로 정책디자인의 철학과 감각을 조직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정책랩은 ‘정책을 잘 운영하는 조직’이 아니라,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조직’이 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어떠한 경험도 없다. 시스템을 내부에서 흔들고 그 안에 새로움을 더할 역량을 가진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권위와 관행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성을 쌓고, 왜 혁신이 일어나지 않을까 한탄한다.
정책랩은 공간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관점과 구조적 권한을 함께 설계해야 하는 장치다. 그 안에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중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책랩은 왜 필요한가
정책랩은 정책 기획 자체의 기본값을 바꾸는 방식이다.
조직 간 협업을 가능하게 만들고, 시민과 함께 문제를 재정의하며, 정책을 실행 전에 실험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는 것. 이것이 정책랩의 본질이다.
행정에 디자인과 기술이 보완됨으로써 공공부문이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혁신 모델로서 지속성(viability), 적합성(desirability), 실현가능성(feasibility)의 세 요소가 두루 갖추어지게 된다. 정책랩은 복잡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공공부문 혁신의 핵심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그 구조를 알고 있음에도, 왜 여전히 실험하지 않는가?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시도할 용기다.
이어지는 글 예고
이제 우리는 다음 질문을 던질 차례다. 세계 각국은 어떻게 정책랩을 제도화했는가?
2편에서는 그 시작점으로 영국 폴리시랩(UK Policy Lab)의 사례를 살펴본다.
정책랩이란?
정책랩은 각국 정부가 공공부문 혁신을 위해 도입하고 있는 대안적 정책 추진 체계다.
사용자 중심 접근, 디자인씽킹, 서비스디자인 등 디자인 접근 방법을 활용해 여러 이해관계자와 협업하며 관행을 탈피한 수요자 중심의 정책을 개발한다. 서비스디자이너를 포함해 심리학, 데이터사이언스, 인지과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전문 분야의 인력으로 구성되며, 이는 기존 행정부 조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넓은 구성을 보여준다.
정책랩은 수요자 중심의 인사이트를 도출하기 위해 디자인이 주도하는 방식을 취하며, 심리학과 행동경제학 등 분야가 사용자의 심리와 행동을 분석해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볼 때 수요자 중심으로의 전환이 정책랩의 본질적 취지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디자인 씽킹과 서비스디자인을 통한 수요자 중심 문제 해결 접근법이 정책랩이 기존 정책 기능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정부 부처나 지자체, 공공기관 내부에 상설 조직으로 운영되며, 프로토타이핑과 반복적 테스트를 통해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고, 실제 문제 해결에 적용 가능한 정책을 제안한다. 정책랩의 목표는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정책 설계 과정에서 시민 중심의 문제 해결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랩들은 정부 혁신을 위해 다양한 실험적 접근을 통해 공공부문의 발전을 촉진한다.
정책랩의 공통점
(목적) 공공부문 혁신: 기존 정책 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접근법을 통해 사회적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
(조직) 정부 내부 조직: 정부 부처나 지자체 또는 공공기관의 상설 조직으로서 운영된다.
(협력)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 정책 기획 및 실행 과정에서 시민, 전문가, 공무원 등 다양한 그룹이 참여해 협력적인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
(방법) 디자인 씽킹과 서비스디자인: 창의적이고 사용자 중심의 방법론을 적용해 시민들이 실제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탐구한다.
(실험) 프로토타이핑과 테스트: 정책 아이디어를 실험적으로 구현하고, 반복적 테스트를 통해 정책의 효과성을 검증한다.
출처 : 윤성원. 2024.10.13. https://servicedesign.tistory.com/679
2025.5.23. 수정.
[세계의 정책랩]
약자의 목소리와 디자이너의 조력이 세상을 바꾼다 - 정책랩을 소개합니다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1 : 정책을 디자인하는 조직, 정책랩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2 : 영국 폴리시랩, BIT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3 : 미국 Lab·OPM, USDS, 18F, MONUM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4 : 캐나다 PHC, IIU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5 : 호주 A-Lab, BETA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6 : 일본 디지털청 서비스디자인 유닛(Service Design Unit)
정책디자인, 세계의 정책랩 7 : 덴마크 마인드랩, X-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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