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이 가장 많이 본 디자인 뉴스
해외 리포트
인스타 아이콘 인쇄 아이콘

헌옷이 런웨이를 걷다 — ‘구미래’라는 패션의 언어

 


@TOKYO VINTAGE FASHION WEEK

 

2026년 3월, 도쿄 신주쿠의 한복판에서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트랙팬츠를 입은 모델이 런웨이를 걸었고, 닥터마틴 10홀 부츠가 스트로브 조명을 받으며 빛났다. 이 옷들의 공통점은 모두 헌옷이라는 것. 일본 최초의 빈티지 패션 위크, '도쿄 빈티지 패션 위크(Tokyo Vintage Fashion Week)'가 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TOKYO VINTAGE FASHION WEEK

 

 


도쿄 크리에이티브 살롱 실행위원회가 기획한 이 행사는 중고 의류 박람회의 형식을 띠면서도, 처음부터 "패션 위크"라는 이름을 달고 출발했다. 국내 최대 크리에이티브 축제 '도쿄 크리에이티브 살롱'의 공식 이벤트 중 하나로 편성됐고, 행사 기간 내내 100여 개의 헌옷 매장이 플리마켓 (flea market)을 운영하는 한편, 별도로 구성된 패션쇼 공간에서는 오직 헌옷만으로 완성된 25가지 룩이 런웨이 위에 올랐다.

 

쇼의 테마는 묘하게도, 일상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희귀 빈티지가 아닌, 동네 헌옷 가게에서 오늘도 팔리고 있는 바로 그 옷들.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의 스리스트라이프 팬츠, 닥터마틴 10홀 부츠처럼 누구나 한 번쯤 손에 쥐어봤을 법한 아이템들이 스타일리스트 하라다 마나부와 에리(eri)의 손을 거쳐 조금 다른 표정으로 등장했다.

 

에리는 쇼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에서 마주치면 뒤돌아볼 멋쟁이 — 그게 이번 쇼의 테마였습니다. 지나치게 연출하지 않고, '나도 따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친근감. 그 균형을 잡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운영하는 빈티지 숍 '뎁트(DEPT)'는 도쿄 헌옷 씬에서 꾸준히 주목받아온 공간으로, 이번 쇼는 그녀가 평소 추구해온 방향을 무대 위에서 풀어낸 자리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쇼를 본 직후 바로 옆 플리마켓 (flea market)으로 걸어가 그 스타일을 직접 탐색해볼 수 있었다. 런웨이와 벼룩시장이 물리적으로 연결된 구조는 이 행사만의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다. 쇼에서 영감을 받은 뒤 곧장 옷을 고르는 흐름 — 그것이 이번 행사가 기존 패션 위크와 다른 결을 만들어낸 방식 중 하나였다.

 

 

일본의 재산은 역시 헌옷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보다 물량이 많고,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 덕분에 보존 상태도 좋습니다.

— 마쓰이 토모노리, ワンオー(원오) 대표

 


@TOKYO VINTAGE FASHION WEEK

 

이 행사를 만든 남자 — 마쓰이 토모노리의 비전


이 행사의 설계자는 PR 에이전시 '원오(ワンオー)'의 마쓰이 토모노리 대표다. 패션 디자이너도, 환경 운동가도 아닌, 브랜드의 이야기를 세상과 연결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헌옷 패션 위크'를 구상하게 된 건 어쩌면 그의 일이 늘 그래왔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이미 존재하는 가치를, 어떻게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

 

마쓰이 대표의 출발점은 간단한 질문이었다. 세계 5대 패션 위크 — 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 도쿄 — 각 도시에는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 파리에는 럭셔리, 이탈리아에는 테일러링, 뉴욕에는 비즈니스 감각이 있다면, 도쿄는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가 주목한 것은 古着(헌옷)이었다.

 

실제로 일본의 헌옷 시장은 세계적으로도 눈에 띄는 규모다. 수십 년간 쌓인 방대한 물량, 일본 특유의 '모노즈쿠리(物づくり)' 정신에서 비롯된 뛰어난 보존 상태, 그리고 하라주쿠와 시모키타자와로 대표되는 헌옷 스트리트 문화의 깊이. 이런 배경이 일본을 전 세계 빈티지 바이어들이 주목하는 곳으로 만들어왔다.

 

마쓰이 대표는 이번 행사의 방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트렌드를 발표하는 장과, 헌옷으로 순환된 옷을 즐기는 장.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세계에 아직 없는 패션 위크를 만들고 싶다." 희귀 빈티지보다는 '레귤러 빈티지' —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헌옷 — 를 중심에 놓은 것도 이번 행사의 결정 중 하나였다. 코어 마니아층뿐 아니라 헌옷을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이들도 편하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TOKYO VINTAGE FASHION WEEK

 

 

패스트패션의 시대 끝에서 — 세계 친환경 트렌드와의 접점

 

도쿄 빈티지 패션 위크가 흥미로운 건, 이 행사가 단지 헌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축제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전 세계 패션 산업이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전환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파리 기후협약 이후, 패션 산업은 세계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 중 하나로 거론되어왔다. 매년 약 920억 벌의 의류가 생산되고, 그 중 상당 부분이 팔리지 않은 채 폐기된다는 통계도 이미 여러 차례 공론화됐다. 소비자들의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 건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 변화 중 하나가 '세컨드핸드(중고 의류)' 시장의 성장이다. 글로벌 리세일 플랫폼 스레드업(ThredUp)의 리포트에 따르면, 전 세계 중고 의류 시장 규모는 2023년 약 2,280억 달러에서 2028년에는 3,5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디팝(Depop), 베스티에르 콜렉티브(Vestiaire Collective), 더 리얼리얼(The RealReal) 같은 플랫폼들이 빠르게 성장하며 이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의류 기업들에게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도입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법제화를 추진 중이며, 프랑스는 패스트패션 광고를 법으로 규제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산업 전반을 향한 제도적 변화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도쿄 빈티지 패션 위크는 이 흐름에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제도적 압박이나 윤리적 계몽의 언어 대신, '쿨함(coolness)'을 택한 것이다. 헌옷을 선택하는 일이 의무의 언어보다 감각의 언어로 읽히기 시작할 때, 소비 문화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이번 행사는 그 가능성을 런웨이라는 형식으로 조심스럽게 타진해본 시도이기도 했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들의 최근 행보와도 겹치는 지점이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지속가능성을 브랜드의 핵심으로 삼아왔고, 파타고니아는 'Worn Wear' 캠페인을 통해 자사 중고 제품을 직접 판매하며 독자적인 팬덤을 만들었다. LVMH와 케링 그룹 역시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행하며 이 의제를 경영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TOKYO VINTAGE FASHION WEEK

 

 

동묘와 하라주쿠 사이 — 한국 헌옷 씬의 현재

 

한국의 헌옷 문화도 나름의 두께를 가지고 있다. 서울 동묘 벼룩시장은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알려진 공간이 됐고, 광장시장의 빈티지 골목은 패션 유튜버들이 자주 찾는 촬영지 중 하나다. 홍대 인근의 구제 숍들은 세련된 큐레이션으로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K-팝과 K-드라마가 만들어낸 한류의 영향 속에서 '서울 스타일'을 찾는 해외 팬들의 시선도 이 구제 감성 위를 스치고 간다.

 

다만 이 모든 에너지가 아직 하나의 '씬(scene)'으로 응집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각지의 헌옷 가게, 온라인 플랫폼, 팝업 행사들이 제각각 움직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도쿄 빈티지 패션 위크처럼 그것을 하나의 문화적 사건으로 묶어내는 구심점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분산된 에너지가 어떤 방식으로 모이게 될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소비의 방식이 바뀌는 속도에 대하여

 

도쿄 빈티지 패션 위크가 남긴 인상 중 하나는, 1만 8,600명이라는 숫자보다 그 숫자가 만들어진 방식에 있다. 희귀 아이템을 찾는 마니아도 있었겠지만, 처음으로 헌옷 매장 앞에 선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런웨이 옆에 프리마켓이 붙은 구조 덕분에, 쇼를 보고 영감을 받아 바로 옷을 고르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패션은 시대와 함께 움직여왔다. 1970년대 히피 무브먼트가 군복과 청바지를 다른 언어로 읽어냈고, 1990년대 그런지는 낡고 헐렁한 옷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했다. 2020년대의 헌옷 부활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하나의 답으로 정리되기보다는, 각자의 소비 방식에 대한 질문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떠오르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도쿄 빈티지 패션 위크는 그 질문을 런웨이라는 형식 안에서 꽤 유연하게 다뤘다. 의무나 캠페인이 아닌, 스타일의 언어로. 그 방식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만들어낼지는 아직 열려 있는 상태다.

 

 

 

 


@TOKYO VINTAGE FASHION WEEK

 

 

 

 

 

 

 

 

 

 

박혜연(일본(고베))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 학사 졸업
-영국 왕립예술대학원 제품디자인 석사 졸업
-생테티엔(프랑스)비엔날레 참여작가
-스왈로브스키 본사(오스트리아)협업작가
-런던디자인뮤지엄레시던시 작가
(현) 프리랜서 디자이너 / 작가
·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영리를 목적으로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본 콘텐츠를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 등에 게재 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필자에 의해 제공된 콘텐츠의 내용은 designdb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Tag
##도쿄빈티지패션위크 #빈티지패션 #지속가능패션 #패션지속가능성 #헌옷패션 #세컨드핸드패션 #리세일패션 #친환경패션 #패션트렌드2026 #도쿄패션 #일본패션 #하라주쿠패션 #시모키타
"헌옷이 런웨이를 걷다 — ‘구미래’라는 패션의 언어"의 경우,
공공누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 이미지, 일러스트, 동영상 등의 일부 자료는
발행기관이 저작권 전부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있으므로, 자유롭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목록 버튼 이전 버튼 다음 버튼
최초 3개의 게시물은 임시로 내용 조회가 가능하며, 이후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 임시조회 게시글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