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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만에 사라진 컵라면의 ‘뜨거운 물’

한국에서 차갑게 먹는 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냉면과 막국수는 물론이고 여름이면 비빔면이 계절 대표 상품처럼 등장하며, 라면을 삶아 찬물에 헹군 뒤 차갑게 즐기는 레시피도 다양하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한 가지 과정은 빠지지 않는다. 차갑게 먹더라도 면은 먼저 뜨거운 물로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컵라면은 더욱 그렇다.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몇 분을 기다리는 과정은 오랫동안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너무 익숙해서 굳이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었던 조리법이다. 그런데 올여름 일본 닛신식품(日清食品)이 이 익숙한 공식을 뒤집었다. 지난 7월 출시한 ‘히야시 컵누들(冷しカップヌードル)’은 단순히 차갑게 먹는 컵라면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뜨거운 물을 사용하지 않는 제품이다. 냉장고에서 꺼낸 찬물을 붓고 5분을 기다리면 바로 먹을 수 있으며, ‘매콤한 김치맛(ピリ辛キムチ味)’과 ‘닭고기 소금 레몬맛(鶏塩レモン味)’ 두 종류로 출시됐다. 패키지에는 이러한 특징을 강조하듯 ‘뜨거운 물 금지’라는 문구를 큼직하게 내세웠다. 뜨거운 물과 찬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애초에 찬물로 조리하도록 만든 컵라면이라는 뜻이다. 방법만 놓고 보면 놀랄 만큼 단순하다. 컵라면에 찬물을 붓고 5분을 기다리는 것. 하지만 이 작은 변화는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컵라면의 조리법뿐 아니라, 어디에서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까지 바꿔놓았다. 

 

 

 All Images ⓒ NISSIN FOODS HOLDINGS CO.,LTD.

 

히야시 컵누들이 등장한 2026년은 닛신에게도 특별한 해다. 1971년 9월 18일 세계 최초의 컵라면으로 출시된 ‘컵누들’이 올해로 55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닛신은 이를 기념하는 해에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찬물만으로 조리할 수 있는 제품을 선보였다. 오랜 역사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55년 동안 이어져 온 가장 기본적인 조리법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 배경에는 최근 일본의 기록적인 폭염이 있었다. 기온이 오를수록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차가운 음식을 찾는 반면, 뜨거운 국물을 먹어야 하는 컵라면은 여름철에 손이 덜 갈 수밖에 없다. 닛신은 이러한 계절적 한계를 새로운 맛으로 보완하기보다, 아예 찬물로 만들 수 있는 컵라면을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실 차가운 컵라면에 대한 닛신의 실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에는 평소보다 적은 양의 뜨거운 물로 면을 익힌 뒤 얼음을 넣어 차갑게 먹는 ‘ICE 컵누들’을 선보였다. 당시에도 차가운 컵라면이라는 발상은 있었지만, 면을 익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뜨거운 물이 필요했다. 2026년에는 그 마지막 조건까지 없앴다. 닛신은 약 5년에 걸쳐 특허 기술인 ‘콜드 리하이드 제법(コールドリハイド製法)’을 개발해 찬물에서도 면이 제대로 풀리도록 만들었다. 냉수를 붓고 5분이 지나면 면이 부드럽게 풀리면서도 탄력과 매끄러운 식감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뜨거운 물로 먼저 익힌 뒤 얼음으로 식힐 필요도, 별도의 조리 도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이 차이는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도 흥미롭다. 한국은 비빔면을 비롯해 차갑게 즐기는 면 요리가 이미 하나의 식문화로 자리 잡았고, 여름마다 다양한 냉라면 레시피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뜨겁게 익힌 뒤 차갑게 식힌다’는 순서를 따른다. 닛신은 차가운 라면을 새롭게 제안하기보다, 라면을 차갑게 만드는 과정 자체를 바꾼 셈이다.

 

 


새로운 맛보다 새롭게 ‘먹는 법’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제품에 새로운 수요를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다. 맛이나 패키지에 변화를 주거나, 특정 계절과 소비자층을 겨냥해 라인업을 확장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번 신제품의 가장 큰 변화는 이보다 훨씬 기본적인 ‘먹는 방법’에 있다. 뜨거운 물 대신 찬물을 붓는 조리법은 더운 여름에도 부담 없이 컵라면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물을 끓이는 과정까지 사라지면서 캠핑이나 야외활동에서도 한층 간편해졌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조리 과정 하나를 덜어내니, 생각보다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그중 예상하지 못했던 쓰임은 재난 현장에서 나타났다. 히야시 컵누들은 처음부터 방재용으로 개발한 제품은 아니다. 닛신이 밝힌 개발 배경 역시 기록적인 폭염과 여름철 차가운 음식에 대한 수요였다. 그러나 출시 약 한 달 뒤인 8월, 닛신은 구마모토 지진 피해지역에 컵라면과 히야시 컵누들 등 약 3만 식을 지원했고, 현지 배식에는 이번 신제품도 포함됐다. 컵라면은 보관이 쉽고 조리가 간단해 재난 시 비축하기 좋은 식품이지만, 뜨거운 물이 필요하다는 한계가 있다. 수도나 가스, 전기가 끊기면 평소처럼 물을 끓이는 것조차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닛신은 한신·아와지 대지진과 동일본대지진, 노토반도 지진 등 대규모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급탕 설비를 갖춘 키친카를 현장에 보내 컵라면을 제공해왔다. 반면 히야시 컵누들은 별도의 열원 없이 물만 있으면 조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재난을 위해 개발한 기술이 아니라, 폭염이라는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던 아이디어가 결과적으로 비상시에도 유용하게 쓰였다는 사실이다. 여름철 제품이라는 범위를 넘어 재난 상황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제품의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익숙한 것에서 당연함을 걷어내다 

한국처럼 이미 다양한 라면과 차가운 면 문화가 자리 잡은 곳에서 ‘차가운 라면’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히야시 컵누들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너무 당연해서 의문을 품지 않았던 ‘면은 뜨거운 물로 익혀야 한다’는 전제를 다시 들여다봤다는 데 있다. 물론 이를 현실로 만드는 일은 조리법에서 ‘뜨거운 물’을 ‘찬물’로 바꾸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찬물에서도 면이 제대로 풀리고, 차가운 상태에서도 맛과 식감을 유지해야 한다. 닛신이 하나의 조리 과정을 덜어내기 위해 5년에 걸쳐 새로운 제법을 개발했다는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단순함 뒤에 상당한 기술적 고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없앤 하나의 조건은 예상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더운 여름을 위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야외에서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됐고, 실제 재난 현장에서는 열원이 필요 없다는 특징이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냈다. 여러 기능을 하나씩 더해 활용 범위를 넓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를 덜어냄으로써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낸 셈이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제품을 새롭게 만드는 방법은 꼭 새로운 맛이나 기능, 형태를 더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질문조차 하지 않았던 과정 속에서 하나의 전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55년 된 컵라면에서 닛신이 새롭게 디자인한 것은 제품의 형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온 ‘먹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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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issin.com/jp/company/news/1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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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연(일본(도쿄))
-Tama Art University 정보디자인학과 미디어 예술 학사 졸업
-GARDE Co.,Ltd.(ASIA PACIFIC 사업부 기획개발 본부 플래너)
(현) Apollo&Char Company inc. 크리에이티브 플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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