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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와 오리엔탈리즘

히로시게와 아와즈전을 보면서 투덜거렸던 오리엔탈리즘.
그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개념들을 따다 붙여 누더기를 기워 입은것 처럼 되었지만, 그런 생각들을 모아서 이런 식의 주장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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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의 발생은 비록 그 문화적 성격이 서양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한 동양 이미지의 차용이었다고는 해도, 세계화를 통하여 각 대륙별 문화가 서로 융합되어졌다는 의미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하나로 통합되어진 동, 서양 문명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새로운 페러다임, 새로운 문명이 출현했으며 아르누보가 이러한 현상을 드러낸 최초의 양식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문명의 시작점에 위치하는 아르누보가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간직하고 이것을 강조함으로써 현재까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신화’로써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업혁명에 의한 사회의 변화는 이전까지의 문화를 현실과 유리시켰으며,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문명을 형성하면서 이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합한 새로운 예술적 양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자본에 의한 산업의 대량생산과 대중소비라는 새로운 경제체제가 제시하는 ‘복제’(포디즘으로 대변되는 대량생산 그리고 복제의 자가증식)라는 문제에 대하여 이전까지의 ‘복제’(구텐베르그의 활판인쇄와 같은 소량의 장인적 수공생산에서 나타나는 미메시스적 성향)가 형성하고 있던 사회ㆍ문화적 양식들이 문명의 변화에 따라 그 실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사회ㆍ문화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20세기에 들어서서 현대 디자인의 발생으로 그 해결을 모색하지만, 당시에 제시된 ‘복제’(대량생산적 의미)와 세계화(각 대륙별 문화의 통합)의 문제들은 이미 아르누보를 통해 그 이면에 내재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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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이전 그리고 아르누보


19세기부터 서양문명은 지금 현재의 사회를 규정하는 많은 사상과 양식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아직은 당시의 소소한 것들의 영향력까지도 기억되고 있지만, 그 의미들은 서로 유사한 성향을 보이며 서로 모호하게 얽혀있다. 아르누보 또한 빅토리아와 함께 그 모호함 속에 숨어 자신의 ‘신화’(새로운 문명의 시작과 그 문명의 기저에 깔린 자본의 통제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 혹은 지배라는 ‘자명한’ 이미지에 가려진다.)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두 흐름은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에서 거의 공존하다시피 하며 이 시대의 문제점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 양식의 의미, 혹은 그 양상이 가져온 결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의 간격을 통해 아르누보는 그 성격을 좀 더 확연히 나타내 보이고 있다.

1796년 바바리아 알로이스 세네펠터는 석판인쇄를 발명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지엽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의미도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제시된 ‘복제’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되어 준다. 이전까지의 목판이나 동판이 이루어낼 수 없었던 석판인쇄의 생생한 재현(그라데이션을 통한 묘사는 거의 사진과 흡사하다.)은 이전까지의 인쇄물이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의 제약, 상징적 의미를 통한 정보의 전달을 현실적인 이미지의 현현으로 대체하였으며, 이러한 즉물적 이미지를 통해 자본은 보다 쉽게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까지 실물에 근접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은 오직 캔버스 위에 화가의 작업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그것도 이 세상에 오직 하나만이 존재했다. 또한 이것은 완벽함이라는 이상의 추구와 상징(기호적 특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복제’(미메시스)는 관념과 상징의 이미지에 의해서만 가능했었다. 이전까의 ‘복제’(미메시스와 이의 단순한 복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편집디자인에서 타이포그래픽은 그 속에 내재된 의미와는 별도로 타이포그래픽 형태의 조화와 구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러스트레이션은 그것이 아무리 현실적인 이미지의 재현을 추구한다고 하여도 상상화(화가의 묘사보다는 경험자의 구술에 의한 모호한 재현을 선의 중첩에 의한 거친 에칭기법으로 표현)가 전부였다. 그 어느 복제 이미지도 현실적인 재현 보다는 상징의 전달에 그 가치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복제되는 정보는 상징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었고 정보, 그 상징성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지배와 피지배가 나뉘고 있었다.
그러나 석판인쇄를 통한 이미지의 재현은, 이미 사진의 출현 이전에 대중에게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보다 쉬운 접근과 즉물적 지각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전문제작자의 손을 빌어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그것이 사진처럼 대중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도록 해 주지는 못했지만,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값싼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게는 만들어 주었다. 점점 현실적이 되어가는 이미지는 그 현실의 재현을 통해 그 자체로서 가질 수 있는 상징적 요소를 덜어내고 있었으며, 그 상징적 정보의 질과 양의 저하를 통해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정보가 일방적이면서도 대량으로 주어짐으로써 대중에 대한 프로파간다와 이에 의한 통제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현상들을 통하여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들이 수많은 목적들을 위해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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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사회전반에 걸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사회적 지위와 능력, 힘의 이미지들은 자본의 속성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소유할 수 있는 것들 이었다. 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조악하며 값싼, 단순히 ‘복제’(복제-미메시스된 것의 형상복제)된 것들이었다. ‘Art & Craft movement'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며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윌리엄 모리스가 그의 테마인 ‘고딕’을 통하여 정화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난잡함이었다.

1851년의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박람회가 젊은 모리스에게 남겨 놓은 것은 온갖 종류의 조악한 제품들이 보여주는 천박함이었다. 크리스탈-펠리스의 진열된 제품들은 모두 순결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소유자의 지위와 성격을 보여주던 이전의 장식과 기술(장인들에 의해 미메시스된 진리를 표상하는 예술로써)을 통해 수공으로 생산되던 공예품들은, 어느새 단순 기술자들에 의해 그러한 형태들이 차용되어, 저질의 재료와 비숙련자의 싼 임금 등으로 값싼 공업제품이 되어 생산되었다. 진실은 사라지고 오직 겉모습만이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다. 세계는 ‘트리클다운’(계층간의 욕망에 의한 유행패턴)과 ‘디드로효과’(종합에 대한 심리적 욕구에 의한 소비패턴)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빅토리아양식의 화려한 소용돌이 문양은 원본 혹은 진실이 사라진 채 즉물적 욕망만이 남은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지만, 진실이 사라진 텅 빈 공간 속에서 욕망은 아무런 의미도 될 수 없었다. 시대는 유토피아의 환상 속에서 해매고 있었다.
그 욕망의 집합소, 크리스탈-펠리스의 그 조악한 장엄함은, 소비를 위한 무비판적 생산을 기반으로 새워진 것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존재한다. 펠리스를 지탱하며 대중을 끌어들이는 그 파사주 안으로 전 세계의 정보와 제품들이 모여들고, 빅토리아양식의 그 잡다한 진열 속에서 소비의 꿈, 생산의 환상이 시작되었다. 제국들은 스스로 생산자가 됨으로써 소비자가 되어야 했으며, 그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다시 시장을 재생산해 내어야 했다. 인구는 제한적이었지만 자본은 순환하며 자가복제를 통해 집중(자본에게로 자본이)과 확산(자본의 지배력이)을 계속한 것이다. 생산은 계속되었으며, 제국들은 서로 클리스탈-펠리스 안에서 경쟁해야 했다. 결국 다윈의 ‘적자생존’은 모든 것의 가능성을 무시한 채 오직 선택의 문제(선택될 수 있는가 아닌가, 우성인가 열성인가, 지배하는가 지배받는가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서 세상을 갈라놓았다. 나와 나를 위한 너만이 세상의 진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중국의 도자기마저 크리스탈-펠리스 안에서 진열되어야 했다. 이미 아편전쟁은 끝났다.(이미 1787년 플래시전투 이후 인도의 무굴제국과 주변의 아프가니스탄등은 영국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으며, 1842년 아편전쟁을 끝으로 중국을 위시한 극동지역마저 유럽 자본의 시장으로서 재편되고 있었다.)

지속적인 생산을 통해 산업사회의 체제는 서서히 소비의 사회로 이행했다. 소비를 위한 시장, 대중은 그 등장과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었다. 대중은 생산의 의미를 고찰하기에는 생산과 너무도 동떨어졌다. 점점 개인이 장인으로서 작업에 임할 수 있는 영역은 줄어들어 사라졌고, 효율적 생산을 위해 분화된 단순작업만이 공장에 남았다. 이전의 체계는 사라지거나 혹은 그 자리에 박제되어야 했다. 햄릿은 오직 극장 안에서만 ‘아우라’를 뿜어낼 뿐이었으며 그의 존재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할 수 없었다. 그의 독백은 더 이상 음미되지 않으며, 이 새로운 사회에 공허하게 공명했다. 오직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것만이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햄릿의 환상이 주는 그 고고한 위치의 이미지는 소비를 위해 차용당할 뿐이었다. 소비자도 소비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리고 오직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에만 집착해야 했다. 텅빈 껍질로서의 빅토리아양식은 소비를 통하여 계급을 구분지었으며, 소비에 의한 계급의 환상은 대중을 이 새로운 세계의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어쨌든 대중은 열광했으며, 이 새로운 텅빈 시대에 프로파간다는 더욱 쉽고 활기차게 퍼져나갔다. 남은 것은 즉물적 감각, 사회는 이 새로운 시대의 흥분을 지속시킬 힘을 찾아 열광했다. (현대를 표현할 예술의 모색은 이후 계속 이어져,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지각의 한계점을 찾았으며, 속도에 열광하게 된다. 새롭게 제시된 사회에서 유토피아의 방향성은 모호했고 이 후에 나타난 다다주의 등도 알 수 없는 감각적 지각, 혹은 재미를 위하여 작업을 진행하며 그 즉물성을 표현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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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지각의 흥분, 의미의 공동 속에서 유럽의 유토피아는 프로파간다화 되어갔다. 세계 그 어디에서도 유럽을 볼 수 있었지만, 유럽은 사라졌다. 모든 것은 유럽으로 모여들었으며 그 주체할 수 없는 부유함은 빅토리아의 차고 넘치는 양식으로 표출되었다. 이전까지 유럽이 찾아 해매던 유토피아에 대한 꿈과 그 의미는 사라졌다. 공장에서는 7~8세의 아이들이 굶주리며 노동을 했지만, 이미 시대는 화려한 빅토리아 양식의 차고 넘치는 장식으로 치장된 유토피아였다. 그 허망한 유토피아의 프로파간다 속에서 자본만이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통제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혼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혼돈은 사회의 변화, 산업사회로의 진입이라는 현상(‘복제’의 복제, 자가증식적 대량생산)은 서양의 근본적인 이념이 무너짐에 따른 결과였다. 유토피아, 유럽이 꿈구던 이상, 혹은 종합, 완전함으로 묘사되는 절대의 공간은 자기기만 속에서 사라졌다. 당시는 서양의 절대와 상대라는 인식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이기도 했다. 서양의 사상은 크게 그리스도교와 그리스철학, 이상과 현실이라는 개념의 대립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절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서로 상호보완되고 있었다. 이는 신의 존재로서 대변되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음 하에서, 플라톤의 선험론적 이상과 스토아 철학의 경험론적 실제가 그 변증법적 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르네상스시대 조차도 유럽은 절대적인 그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절대적인 기준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탐구하던 수학을 비롯한 여러 영역들 또한 신의 부재를 가정한 상태에서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근대 이전까지 화가들의 작품은 모두 수학과 과학에 기대어 구도, 색체 등의 미적 기반을 확립하고, 이러한 수단들을 통하여 완벽을 추구함으로써, 그 완벽함과 그 완벽함을 만든 역사를 찬미한 것이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역설, 니체의 생의 관점에서의 비판마저, 신이 사라진 세계의 절대성을 가정하여 그 절대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려는 노력의 결과들이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서양이 처했던 문제는 절대라는 전제하에 신과 인간 중 무엇이 절대성을 획득할 주체인가에 대한 것이었으며, 인간의 자유와 이에 대한 규제의 문제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이 모든 것들을 상대적인 현실로서 단지 반복되는, 복제의 순환으로 바꾸어 버렸다. 산업혁명의 유물론적 페러다임의 등장은 서양이 지금껏 만들어낸 이념의 몰락을 가져왔다. 절대성은 파괴되고 있었다. 흄의 회의주의는 절대주의의 해체를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고, 현대 현상학은 이미 절대성이 파괴된 자리에 성립되었다. (후설은 이전부터 있어왔던 절대성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판단중지’를 통하여 인간의 인식이 결코 절대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가정 하에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현실 그 자체로서 보이는 것은 오직 자본의 끊임없는 순환과 자가증식, ‘복제’(대량생산을 넘어 복제가 가지는 가치와 이미지의 재생산)였다. 절대성에 대한 신화는 사라졌으며, 인간의 윤리에 의한 사회통제는 힘을 잃었다. 광기는 신을 떠나 원형탑 안에 갇힌 채 길들여지고 있었으며(광기는 신의 계시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모호함 속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광기는 중세를 벗어나면서 점차 통제되어야 하는 병리적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절대에 대한 믿음은 실존에 대한 물음으로 대체되어갔다.(윤리는 절대적 가치로서, 광기는 그 모호함을 통해 신의 절대성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 모든 현상들은 단지 인간에 의한 합의와 통제의 문제로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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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양식의 그 조악한 풍성함과 에펠탑의 삭막한 기술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직 진열과 선택을 위한 것이다. 장식으로 붙은 과도한 문양에 숨은 기하학적 패턴들과 부스러기들은 그 형태적 의미조차 잃어버린 채 그저 관습적으로 만들어지고 그 생명력은 소멸했다. 오직 신과 복종만이 전부처럼 여겨지던 시대에 서양은 신과 그 절대성에서 떠났다. 모리스가 이상으로 삼았던 ‘고딕 성당’(그는 건축을 통한 예술의 종합으로써 이 세계에 구원의 메시지를 남기려 했다.)의 예배자들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성당은 더 이상 신의 나라에 대한 재현으로서 건축될 수 없었다. 세계는 변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변화의 축이었던 이들조차 그들의 변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든 것은 표피적인 현상으로 집중되었고, 오직 반복적으로 예전의 것들을 복재해 내고 있었다. 빅토리아양식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세계의 부를 마치 코흐곡선의 증식처럼 예전의 장식적 형태를 통하여 부풀리고만 있었다. ‘복제’는 더 이상 원본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미메시스는 단순한 현상이 될 뿐이며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현실의 재현, 그럼으로써 ‘복제’는 스스로 이 새로운 시대에 ‘신화’(복제, 대량생산과 소비는 상식적, 당연한 것으로서 자본은 그 안에서 자신의 페러다임을 구축하고 통제를 강화한다.)가 되었다. 대량으로 반복생산되고 자가증식하는 복제는 고딕의 순수함으로 정화되기 이전에 이 세상에 쏟아져 들어갔다.

윌리엄 모리스가 ‘붉은집’을 시작으로 인간적인 예술을 외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그의 예술사적 한계를 말하기 이전에 그 당시의 사회변화와 이로 인한 모랄의 붕괴를 주지해야 한다. 모리스의 실패는 이미 그의 곁에 남겨진 수공장인들과 함께 예견된 것이었으나, 절대의 붕괴 속에서 찾아 해맨 것은 이전시대의 절대성, 인간에 대한 희망 혹은 완전함의 회복을 지적했던 것이다. 빅토리아양식의 주체할 수 없이 무거운 장식의 가벼움과 화려함 속에 함몰되어지는 인간에 대해(비록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떤 절대적인 것(혹은 문화적 측면의 인권)의 의미를 생각하게끔 경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새롭게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흥분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물신(승리, 장엄함과 화려함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너저분함이 주었던 환상은 자본이 추구하던 유토피아였는지도 모른다.)을 찾아 크리스탈-펠리스의 파사주 아래를 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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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은 따로 유니크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들은 그 존재 자체로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었고, 세상은 ‘코기토’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절대적인 것, 이상 혹은 사상, 정치, 경제, 모든 것은 그것이 진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직 확고한 질서 속에서 유럽의 유토피아를 향해 전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승리하였다. 크리스탈-펠리스 안에 진열된 빅토리아양식은 그 새로운 현실을 이전 형식들의 반복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의 반영이 될 뿐 새로운 시대를 표현해 내기에는 너무도 직설적이었으며, 낡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빅토리아로 표현된 모호한 제국주의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이를 숨기기 시작했다. 세계는 새롭게 시뮬라시옹화 되었다. 통제의 시대, 모든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스스로 조작되기 시작한다. 어눌한 빅토리아의 옛 양식에 대한 집착은 산뜻한 새로움, 아르누보의 자연스러운 생명력으로 바뀌고, 어느새 인간과 그 상상력은 주체의 자리를 현상의 실존, 즉흥과 즉물의 감각에 내 맡겼다. 그리고 그렇게 내던져진 현상은 사진과 영화로 기록되어졌다. 인간은 더 이상 환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절대의 꿈에서조차 깨어나야 했다. 햄릿의 인격은 극장에 남겨져 그 인격마저 기록되고, 축적된 햄릿의 아우라에 대한 자료들은 측정되어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 필름 속에 남겨진 현상들은 인간의 절대성에 대한 추구마저 파괴했다. 사진의 완벽한 모사는 그러나 그 완벽함으로 인간의 불완전함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모리스의 반동은 결코 이상이 아니었지만 현실이 될 수 없었으며, 새로운 시대와 함께 숭고의 파괴(‘표현 없는 것’의 침묵을 통해 복제의 현상이 드러나고,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파편들은 침묵을 통해 ‘복제’를 저지 혹은 파괴한다.)는 시작되었다. 그 불완전한 모습(무분별한 생산, 복제의 자가증식은 그 소비의 페러다임을 지탱할 ‘신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을 그대로 자신의 양식적 현상을 통해 담아내고 있는 빅토리아는 이 새로운 시대를 완벽히 표현해 냄과 동시에 그 가치를 잃어버렸다. 빅토리아는 자본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그 승리를 알리는 트로피가 되었지만, 자본은 자신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자신을 숨겨야 했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승리와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지만 아르누보는 새로움의 이미지를 통하여 자신을 감추었다.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함으로써 그 신화 속으로 자신의 주체를 숨겨야 했다.

자본은 산업혁명의 ‘복제’를 통해 형성되고 있던 시뮬라시옹의 사회를 유럽을 향한 자본의 흐름과 대중 그리고 소비의 이미지, 대륙별 문화의 집산으로서 표출하고, 그 이미지를 ‘복제’(복제의 재복제를 통한 의미의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신화’로 만들어 내었다. 그럼으로써, 이 새로운 문명의 자본에 의한 통제라는 현실은 아르누보의 등장과 함께 그 기저로 숨어들었다. 아르누보의 형태적 유려함과 구도 속에 숨겨진 것은 이 시대가 아니라 이 시대가 지향해야만 하는 미래였다. 그 유려한 선의 흐름 속에서 유럽이 지금껏 가꾸던 완벽함에 대한 꿈, 종합, 기하학적 이상은 그 남아 있던 양식까지도 모두 사라진 채 알 수 없는 새로움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절대는 숭고의 이름으로 방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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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그리고 우끼요에


‘절대’가 사라진 자리에 차지하고 들어선 즉물적 물신들은 동양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양은 아직 이데올로기의 표상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없었다. 동양, 태고부터 이어진, 상대와 순환의 대륙은 그러나 자신이 지닌 세계의 논리를 이해받을 곳이 없었다. 비록 유럽이 ‘절대’를 무너뜨렸지만, 그 자리를 동양의 ‘상대’가 이데올로기로서 차지할 이유는 없었다. 유럽이 받아들인 것은 오직 표상물로서의 이미지, 상대성의 파편들뿐이었다. 주역의 괘는 상대성에 대한 상징으로서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었고, 도자기는 오직 그 화려함을 통해 귀족의 자기과시를 돕고 있었다. 중국의 이미지들은 오직 귀족의 살롱에서 그 가치를 지니고 그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 값비싼, 그리고 진솔한 가치는 ‘복제’(자가증식된 복제의 미메시스)의 원본으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상대성을 표현할 절대적인 표상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복제’의 문제를 비껴간 이것들은 자본의 형상으로서, 이 새로운 유토파아에서 인간이라 불려 질 수 있는 계급의 문화로 존재할 뿐이다. ‘고색’으로 표현되는 이전의 문화, 장중하고 고귀한 그리고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내던 문화가 바라보는 ‘복제’는 쓰레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세계의 문명은 ‘복제’를 통해 움직여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국의 고귀함은 귀족의 색다른 취향을 만족시킬 수 는 있었지만, 당시에 제기된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 ‘복제’를 표현할 수 있는 미적형식이 될 수는 없었다.
‘복제’는 자신의 성격을 제대로 작동시킬 매개체가 필요했다. 동양은 동양이기에 유럽에게 선택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복제’의 속성과 함께 신선함으로 대중을 기만해야 했으며, 이전까지의 절대를 부수어야 했다. 그리고 우끼요에가 선택되었다.

우끼요에는 철저한 상업주의에 기초하여 발생된 것이다. 17세기 지금의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와 거대한 상권이 형성됨에 따라 시민계급과 그 시민계급의 문화가 자생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에도문화는 청과 조선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을 기초로 하여 일본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장한 상인계급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내고 있었다. 시민계급의 부상과 함께 그들을 위한 문화적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고, 유곽과 가부키 등도 활발해 졌다. 그리고 그 중에 우끼요에가 있었다. 우끼요에는 가부키의 배우 특히 여배우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경과 카타르시스 그리고 경배의 환상을 위해 시민들은 기꺼이 그들의 주머니를 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는 경직되기 시작했으며, 여배우의 모습이 담긴 우끼요에는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우끼요에는 서서히 시들어져 갔으며, 그 검열을 피하면서도 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재와 방법이 필요해 졌다. 히로유키는 이러한 시대에 나타났으며, 시민들에게 우끼요에만의 감동을 선사했다. 그러나 당시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끼요에는 저급한 현상의 모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우끼요에에는 동양의 미적 가치관이 보이지 않는다.
동양의 사상이 바라보는 우주의 원리는 ‘리’와 ‘기’로 나뉘어 진다. 이 ‘리’와 ‘기’는 ‘태극무극’의 원리 즉, 순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리와 기가 서로 맞물려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리와 기는 서로 태극과 무극의 흐름과 변화로써 존재한다. 이러한 우주의 표현은 단순한 표상적 형태나 미메시스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표상의 기저에 흐르는,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극의를 통해서, 이 극의를 붓 끗에 담아냄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동양화에 표현되는 정신은 이러한 상징성에 기초하고 있다. 우주의 섭리, 자연에 대한 순응과 거기서 오는 페이소스, 붓 끝의 한 획 한 획이 이루어 내는, 그 선 하나, 점 하나에 담겨진 표정, 그 단순함에 우주가 녹아들어 드러나야 했다. 그러나 우끼요에 있어서 선은 단순히 세밀하게 가공되어지는 경계의 의미 그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 선은 그 선 자체의 표정을 띠고, 사무라이의 왜도처럼 날카로운 단순함만이 남는다. 선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있지 않다. 오직 그 선들이 모여 이루는 형상들과 그 형상들의 구도를 통한 미쟝센의 발현이 보여주는, 사물에 대한 직선적인 관조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원경과 중경 근경의 시점으로 구성되는 파격적인 구도, 단순한 사실의 묘사와 울긋불긋한 채색은 그저 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싸구려 벽지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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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나 이것이 유럽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유럽은 이 새로운 즉물적 패턴에 열광했다. 결국 자신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을 찾아낸 것이다. 건축과 가구, 패션과 제품디자인은 이러한 유려한 선과 그 반복 그리고 과다한 식물장식으로 채워졌다. 이전까지의 형상은 상징적 선의 여러 가지 성향(붓의 흐르는 듯한 드로잉, 자연형상의 단순화, 평면적 실루엣과 이를 구성하고 채색함으로써 얻어지는 원근, 패턴의 장식화 등)으로 변화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오브리 비어즐리의 작품들은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 디자인적 요소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이전의 편집물이 보여주던 장중함과 인간성에 대한 존중은 가볍고 산뜻한 패션의 즉물적 감각으로 대체되었다.(당시의 모리스가 편집한 ‘트로이 역사의 회상’과 오브리 비어즐리의 ‘아더왕의 죽음’은 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우끼요에의 미적, 형태적 특성들은 자본을 위해 유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트렉의 포스터에서 보여지는 평면적 구성의 특성이후로 그 드러난 형태적 특성은 내제된 이미지로 녹아들었다.
아르누보가 택한 것은 동양 혹은 일본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우끼요에의 내제된 속성이었다. 모네나 고흐등의 당시 화가들이 심취한 우끼요에는 그 자신의 특성을 빼앗겨야 했다. 캔버스에 그려진 우끼요에의 실루엣은 동양의 마지막 잔재도 잃어버리고 빠레트의 물감과 함께 섞이고 문대졌다. 이미 그것은 우끼요에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우끼요에라는 이름의 환상을 제공할 수 있는 표상이었으며, 그 ‘복제’성에 대한 검증된 결과물로서의 이미지였다. 상업적 목적 하에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이 새로운 방식은 그 내재된 성향, ‘복제’성에 의해, 그 본래의 속성과 저급함을 떠나 이미 새롭게 변한 시대의 각 문화에서 그 형태적 효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즉물적 감각 속에 담겨진 이국적 향취는 새로운 시대, 각 대륙의 문명의 통합을 위한 상징이 되었다. 이 새로운 현상에 대한 표상으로서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자신을 드러내며 자본에 대한 ‘신화’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그 자신이 우끼요에의 가치를 알 수 없었으며, 서양이 우끼요에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이고 아르누보의 유려한 선을 만들어 내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본 내에서는 그저 우끼요에의 장인들로서 취급되던 히로시게나 샤라쿠의 가치가 형성된 것도 유럽에 의해서였다. 아르누보는 서양에 의해 형성되어졌으며,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에 의해서 우끼요에는 상품이 되었으며, 아르누보는 성공한 동양의 이미지로서 오리엔탈리즘의 형성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어수룩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 서양에 의한 동양의 이미지(이국적이라는 환상의 생성)를 자신들의 유산(스스로도 잊어버린 채, 이미 의미마저 상실해버린 예전의 유물로서)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이 후 그 속에 담겨진 동양은 이 지역적 동양을 영원한 동양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동, 서양의 구분과 차이를 통하여 동양을 새로운 문명의 한 축이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상실한, 자본의 영원한 시장으로서 기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누보의 ‘신화’를 통하여 동양은 서양이라는 구별된 존재를 계속적으로 인식해야만 했고 이를 벗어난다는 명분 하에 동양이 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양은 새로운 문명의 출현이후로도 스스로를 이 새로운 문명과 구분 짓고 동양의 옛 잔재가 남기는 페이소스에 잠겨, 이 새로운 문명에 동양의 껍데기를 씌우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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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그 후


결국 동양(문화적 혹은 이미지로서)은 이 새로운 문명에서 떨어져 나와 주변부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어쩌면 그 이전에 우리가 세계의 주변부로 강등되었기에 우리를 세계와 구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신화’의 작용에 의해 전혀 낮선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회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산업혁명 이전의 모든 것들,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불렀던 그 모든 것들은 단지 그 이전 역사의 승리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그 예전의 이미지들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동양이라는 옛 것에 대한 향수만이 남아있다. 이미 지금의 시대와 그 현실적 연결고리들이 끊긴 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령처럼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주변을 맴돌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지나간 세기의 시작을 알린 기념으로서 아르누보는 아직 살아있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동양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자신의 존재를 허구로 만들고 있는) 동양은 서양의 영광을 찬미하고 시기한다. 주체와 객체, 동양은 진정 주변부로서의 그 자리를, 약속받은 헤게모니에서의 약자라는 자리를 감격하며 받아들였다. 이미 현재는 문화의 단편들 속에서 하나의 문명으로 변해버렸지만, 동양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동양, 이미 사라져 실존적 의미를 거세당한 이미지들은 옛 영광의 흔적으로서 욕망의 매개체로 변화될 뿐이다.
단순히, 옛 양식을 되살리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얼마나 될까? 아르누보의 신화에 가려진 이면을 해체하지 않는 이상 오리엔탈리즘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르누보는 이미 새로운 페러다임을 제시 했으며, 숭고의 알레고리(아르누보의 ‘신화’가 작동함으로써 숭고는 그 수동적 직관을 알레고리로서 드러낸다.)가 작동되었다. 동, 서양은 이미 파괴되어 있고, 이 새로운 문명은 자본에 의해 통재되고 있으며, 대중은 단순한 소비자로서 더 많은 이미지를 투여받음으로서 길들여지고 있다.
아쉽게도 아르누보의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한 일본은 이미 스스로 서양이 되었고, 자본의 주체로서 한 축이 되었다. 동양,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그 실존성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은 아직도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 자본은 보이지 않는 신이 되었고, 동양의 지성들은 신의 제사장이 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의 이름이 바뀔지라도, 제사장의 위치는 변하지 않고 있다. 그것을 바람인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서 그 일부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실존성을 찾지 못하고, 생명력을 틔워낼 수 없다. 여전히 옛 유물들의 선을 추출하면서 죽어버린 장식들을 덧붙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동양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 그 안에서 단지 주변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위치를 인정하고(잃어버린 문화의 역사와 미국문화에 종속까지도)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떠한 형식으로 존재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 그 생명력을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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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특별히 발췌한 부분이 없어서(사실은 귀찮기도...) 그냥 도움받은 책들만 열거함니다.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 필립 B 맥스 _ 디자인하우스
20세기 디자인 : 카와사키 히로시 _ 조형교육
서양 미술사 : E. H. 곰브리치 _ 열화당
기호학과 시각예술 : 노만 브라이슨 외 _ 시각과 언어
예술과 앤트로피 : 루돌프 아른하임 _ 눈빛
기독교 철학 및 문화관 : 프란시스 쉐퍼 _ 생명의 말씀사
현대미학 강의 : 진중권 _ 아트북스
문화와 소비 : 그랜트 맥크레켄 _ 문예출판사
감시와 처벌 : 미셀 푸코 _ 나남출판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_ 예문서원
시뮬라시옹 : 쟝 보드리야르 _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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