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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디자인_두 개의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는 일본의 만화작가 츠치야 가론(만화작화: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올드보이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배경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차이점을 빼면 그다지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일본의 만화원작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결말을 만들어 내면서, 원작에 녹아들어 있던 일본의 문화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해 내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올드보이의 실험은 단순히 영화의 성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문화가 담겨진 원작에서 한국적 문화를 담아낸 영화로 변형을 가능케 한, 한국적인 것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니까요.

영화와 만화에서 기본적인 스토리는 거의 비슷합니다. 15년 동안 빌딩의 층과 층 사이에 만들어진 사설감옥에서 만두만을 먹으며 살아야 했던 남자가 풀려나면서 그를 가두었던 사람을 만나고 그가 제안하는 게임을 통해 자신이 왜 갇혀야 했는지를 추리해야만 한다는 스토리 자체에는 영화와 원작의 차이가 없습니다. 이 스토리는 그 구조자체가 일본과 한국의 현재 모습, 혹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계층간의 갈등 들을 보여주는 무대장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죠. 갇힌 자와 가둔 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구조 혹은 힘에 의해 통제되는 현대인의 현실에 대해 은유함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고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영화나 원작에서 주인공은 이전까지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그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인공은 스스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죠. 15년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감금당하고, 풀려난 이후에도 자신이 왜 갇혀야 했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을 가둔 자와 게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두었던 남자(영화에선 우진, 만화에선 카키누마)에게서 단서를 제공받지 않으면 왜 자신이 갇혀야 했는지에 대해서 어떤 실마리도 풀지 못하고,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해 결국 게임에 지고 맙니다. 결말에서조차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가둔 사람을 응징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의 복수(주인공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죠. 고토는 사건이 끝난 몇 년 후에도 다시 자신의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고 오대수는 미도 혹은 자신을 위해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립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우진과 카키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들과 대립하는 조연마저 없습니다. 원작에서 카키누마의 안배에 따라 각 캐릭터들은 어쩔 수 없이 카키누마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나, 영화에서 오대수와 미도가 만나는 것, 오대수와 철웅이 아옹다옹 다투며 대치하는 것도 우진의 결정에 좌우됩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우진과 카키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림으로써, 주인공이 그러한 절망스러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들어 버리죠.
우진과 카키누마로 표현되는 성공한 부류 혹은 가진 자에 의한, 고토와 오대수라는 평범한 사람의 고난이 드러내는 것은 현대의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 내에서의 소외와 저항에 대한 불안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을 가둔 자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자신을 가둔 자가 스스로 자신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 존재를 짐작하기만 할 뿐, 누구인지?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절대로 알아내지 못합니다. 단지 돈만 있다면 돈을 위해 일 할 사람들은 어디에나 널려있기에 주인공을 가둔 자는 뒤에서 조용히 주인공의 세계를 컨트롤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조그맣고 사소한 거액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는 힘이 됩니다. 도시의 소시민들에게는 마치 신에 대한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먹는 일들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15년을 감금당하고 그 세월이 가지는 무게, 왜 자신이 갇힌 채 인생을 소모해야 했는지에 대한 물음 때문에, 풀려난 이후에도 자신을 가둔 자가 제시하는 게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15년 동안의 감금 이후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이 왜 이러한 상황에 처해야 했는지에 대한,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궁금증 뿐이죠. 게다가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결국 알아냈을 때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의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라는 설정은 90년대의 일본의 장기불황과 2000년대의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보통의 사람이 느낄 수밖에 없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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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시의 소시민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공의 태도는 일본의 원작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작의 경우 고토가 15년 동안 감금되어야 했던 이유는 카카누마의 고독을 알아차렸다는 것이죠. 머리가 좋다는 것을 빼면 거의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카키누마에 비해 고토는 평범하지만, 주위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카키누마는 그런 고토에 대해 질시를 느끼지만, 그 질시는 곧, 증오로 바뀝니다. 어느날 음악시간에 카키누마가 불러야 했던, ‘꽃동네’ 속에는 카키누마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집니다. 자신의 고독함... 카키누마의 노래 속에서 그 진실을 발견한 고토는 눈물을 흘리고 그 것을 목격한 카키누마는 고토에 대한 증오를 가슴에 새깁니다. 자신이 질시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들켜버렸다는 당혹감은 결국 복수(고토를 폐인으로 만들기)를 다짐하게 하죠. 그러한 다짐은 고토의 아내에게 2중의 최면을 걸어 버림으로써, 카키누마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고토가 결코 편안한 삶을 살도록 놔두지 않는 집요함을 보여줍니다.
한국적인 정서로 보자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집요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갖게 합니다. 겨우 자신이 보여주기 싫었던 모습을 들켰다는, 우리의 정서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까지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만화라지만, 한국인으로서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지극히 일본적이다라고 생각이 들게도 만듭니다. 지독하게 물고늘어지는, 근성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치 삼류개그와 같은 느낌을 받기 쉽죠. 사실 15년 동안의 감금과, 이후 카키누마에 의해 진행되는 게임, 그 게임을 하기위한 조건으로서 최면이라는 소재 자체가 만화라는 형식이 아니었다면 현실성을 가질 수조차 없는 것들이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일본의 집요함이 극단에 까지 이르렀을 때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카케누마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그의 주장은 상당한 논리성과 심리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와 그 주체성은 무엇을 통해 그 근거를 얻는가?, 나는 무엇을 통해 형성되는가? 라는 질문은 심리학의 병리적 현상(동일시의 포기에 의한 퇴행과 이로인해 나타난 반동과 감정전이?)과 맞물려 매우 개성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는 현실성을 지닐 수 있는, 카케누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확실한 논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설정자체도 이것저것 끌어 모아 만들어낸 캐릭터이긴 해도, 얼핏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관객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상식적 근거 위에서 현실성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어쨋든 일본에서는 이러한 설정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이 한국보다는 덜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의 정서상, 만화적 상상력 하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진 것이기에 어느 정도의 성공을 하고 한국에까지 얼굴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겠죠. 한국만화시장의 구조적 모순을 떠나서, 한국의 정서상 작품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데, 이런 설정으로 한국에서 나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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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작의 이야기나, 다른 일본 만화 등을 보면 한 가지 공통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선과 악으로 규정된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지만, 그 선과 악의 구분은 모호합니다. 내가 옳기도 하고 타인이 옳기도 합니다. 단지 서로 지향하는 방향이 틀리기에 서로 충돌하죠. 서로 치열하게 싸우지만, 굴복한 적들은 아군으로 친구 혹은 수하로써 함께 합니다. 어떤 도그마에 매달려 끝까지 싸우고 장렬히 산화하는 것은 조연의 조연들(적으로 규정된 배역 혹은 집단의 졸개들) 뿐이죠. 아마 그들의 문화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신화적 모티브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창조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무지하게 많은 신들과 세상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자연스런 위계 속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그리스의 신들처럼 생존을 위한, 또는 생존이라는 진리를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처절한 투쟁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화의 후기로 내려올수록, 신성도 점차 사라지고, 인간이 신과 비슷한 위치에 오르기도 하죠. 단순히 힘의 우열 정도로 그들의 위계를 구분하여 복종할 뿐, 절대적인 질서 혹은 명분으로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일본의 모신 이자나미는 자신의 자녀 신을 낳다가 죽어버리는 모습까지 보이는 게 그들이 생각하는 신이지요. 게다가 그들의 신은 아시다시피 무지하게 많습니다. 아마도 힌두교의 신들과 맞먹을 정도의 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일본인들이 모시는 신 중 에는 한국에서 넘어간 사람들조차 상당수 있을 정도이죠.
그리고 인간도 신격화될 수 있다고 믿기에(한국인이 기원인 일본 토착신의 특징은 장보고를 해신으로 묘사한 일본 승려 엔닌의 서술이 보여주듯이 그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오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으로 일본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이죠.) 내가 알 수 없는 힘, 그것은 신비롭고 두려운 것이기에 숭배의 대상이 되고, 받들어 집니다. 결국 신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일본에서 신은 그저 인간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이고 언제든지 더 나은 신, 또는 힘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받드는 신은 인간이었기에 약하고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후대로 올 수록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숭배의 대상에서 벗어나 지도자가 됩니다. 결국 나보다 나은 존재에 대한 복종이 숭배를 대체합니다. 절대적인 기준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없기에, 이런 사회에서는 서로 싸우고 우열을 가른 후, 승자를 따르게 됩니다. 다만 따른 다는 의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이기에 승자를 가리는 싸움은 언제나 치열하긴 하죠. (이러한 성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드래곤 볼, 북두의 권, 혹은 바람의 검심 등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여담이지만, 'THE FIVE STAR STORY'의 아마테라스는 신화적 모티브를 차용하긴 하지만, 일본우익의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그들의 사상을 프로파간다화 하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원작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원작에서 각 인물들은 개성적이며, 서로간의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다릅니다. 카키누마는 고독하고 섬세하면서도 표독하게, 고토는 인간적이면서 집념을 가진 사람으로, 초등학교 선생님은 지적이면서도 시니컬하게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카케누마에게 적의를 드러내거나 윤리적 정죄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극에 나오는 모든 조연급들은 오히려 카케누마가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에 의해 자신이 움직여지는 것을 알게 되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카케누마의 복수를 위해 사건에 휘말려 든 고토와 그의 여자, 초등학교 은사는 카케누마와 대립하려 합니다. 고토의 여자는 카케누마가 보낸 히트맨을 피해 다니며 고토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고, 초등학교 은사는 고토와 함께 카케누마의 비밀을 찾아내려 하죠. 하지만 결국 그들은 카케누마의 안배에 따라 자신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경악하죠. 카케누마와의 대립에서 진 것입니다. 결국 모든 캐릭터들에게 이 사건이 어느 정도 게임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캐릭터들은 그 상황자체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대응합니다. 이미 사건의 주도권은 카케누마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그들은 카케누마가 만들어 놓은 채스 판의 말과 같이 카케누마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고 그 상황을 만든 카키누마 자체에 대한 평가를 보류해 버립니다. 그들은 카키누마에 의해 적으로 규정되면서도 이미 그에게 패배한, 그럼으로써 하수인이 되어 움직여야 하니까요.

결국 원작을 보면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미 마련된 그들의 세계관과 설정이 세트된 무대 안에서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뿐입니다. 작가 자신이 느끼는 세계에 대해서 관객에게 설명하는 거죠. 그리고 관객들은 그러한 질서 속에서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카키누마의 어설픈 증오와 집요한 복수도 이런 상황에 대한 하나의 시뮬레이션으로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죠. 이런저런 설정과 논리들이 있으니, 이럴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러하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섬세한 그러나 답답한 모습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인격이 박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만화 그리고 이 원작 속에서 인격은 오직 승리한 자들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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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일본의 문화를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한국적 감성으로 재구성한 한국적인 문화, 우리의 체험과 세계관을 어떻게 채워 넣을 것인가, 혹은 현재의 우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찾아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오대수 또한 고토 못지않게 우진에게 휘둘리고 그가 계획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대수는 고토처럼 얌전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또한 우진도 카키누마처럼 그렇게 침착하고 치밀한 성격을 띄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대수가 15년간의 감금에서 풀려나고 미도를 만났을 때 그의 행동은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에 따라 움직입니다. 억지로 키스?를 하려다 수치심에 도망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15년간 감금당한 후의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죠. 오대수가 자신을 가둔 조폭들과 싸운 후에 그를 도우며 자신을 알리는 우진의 모습은 치기어린 아이의 장난처럼 보입니다. 우진이 pc방에서 대수의 친구를 죽이는 장면도 상당히 충격적이지만, 우진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보아온 관객은 살인을 하는 우진의 심리를 조금은 공감합니다. 다만 그 행동이 과했다고 느낄 뿐이죠. 우진과 관객은 거의 패닉에 가까운 감정에서 대수 친구의 죽음을 우발적인 사건, 그럴수도 있는 일에 재수없이 걸려든 사례로 넘겨 버립니다. 최 실장이 마지막에 대수에게 귀가 찔리자 혼란 속에서 오대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나, 그러다가 우진에게 죽임을 당해 버리는 것, 우진의 누나가 자살한 것도(우진의 기억을 보면 계획적으로 죽은 것 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계획적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이 실연당한 것도 아닌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지요. 우진이 팔을 잡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더더욱... ) 결코 그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기획해서 만들어낸 상황이 아닙니다. 오대수와 미도의 만남조차 우연을 가장한 최면이 매개가 되었을 뿐, 대수와 미도의 감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건들, 만남이나 무수한 죽음까지 살펴보면 각 캐릭터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발적 혹은 감정적인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캐릭터들. 사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 또한, 오대수가 지나가며 한, 말 한 마디였지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그저 단순히 말해버리고 싶어서 친구에게 말해버린 비밀. 그리고 그가 모르는 사이에 생긴 사건, 자살, 그 사건에 대한 증오를 과격한 방법에 의지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복수를 하는 복수자의 감정 등, 주인공이든 주연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서로를 밀어넣고, 상처받고 복수하고 울고 웃기를 반복 합니다. 원작처럼, 조용하면서도 아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밀하게 사람의 피를 말리는 듯한 복수라기보다는, 폭발해 버리는 격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 고조선의 신화에서 웅녀의 이야기가 그러한 감정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하는 거겠죠. 학계 일부에서 제기되듯이 한국의 선조를 곰을 숭배하던 부족이 아니라 호랑이를 섬기던 부족으로 봐야한다면, 한민족의 성격을 이만큼 잘 표현해 내는 것이 있을런지...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에게조차 복종을 못해서 뛰쳐나가는 성질머리를 이어받은 민족이 있다면 우리 말고 더 있으려나?

하지만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바로 당연함이라는 장치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격정적인 것은 스스로 자신이 있을 때,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믿음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죠. 영화에서 우진의 복수는 카케누마의 쪼잔한 자기정체성이라는 개인적인 인식 혹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물론 제대로 따지면 카케누마가 더 골치 아픈 문제를 내포하긴 합니다만...) 오대수의 우발적인 말 한마디에 망가진 우진과 누나라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설정은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죠. 물론 이 당연함은 영화의 마지막에 반전을 통해 그 당연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 당연함(오대수 때문에 죽은 누나, 그것에 상처받은 우진은 복수할 수 있다.)을 만들어 낸 것은 오대수이며 우진은 이에 기대 오대수에게 복수를 합니다. 하지만, 오대수는 이 당연함(우진의 복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이 당연함의 결과가 근친상간이라는 전혀 당연할 수 없는 상황으로 그를 내몰았으니까요. 결국 오대수는 근친상간의 지속을 선택함으로써 그 당연함(근친상간을 범해서는 안된다)을 깨뜨려 버립니다. 우진에 의해 뒤틀려 버리긴 했지만, 당연함의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랑이라는 본능에게 그는 솔직하게 다가간 것이죠. 그는 지금 어쨌든 미도를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그 속에 오대수가 있고 관객이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느끼고 있는 시대에 대한 상실감, 이 사회에서 느끼는 모호함, 이 사회를 지탱하기에는 너무도 낡은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도그마들과 그 속에 감추어진 현실 혹은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느끼는 혼란은 현재의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감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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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원작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메시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대수가 한국인으로서 살아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표현하는 것에 박찬욱감독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야기해낸 것입니다.
오대수가 우진에게 자신의 비밀을 전해들었을 때, 자신의 당연함(근친상간을 범해서는 안된다)이 무너졌을 때, 그가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변조된 일렉트라 콤플렉스의 현존)을 거부하기 위해 오대수는 자신의 혀마저 자릅니다.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며 개같은 수모를 감내하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또 살아갈 것을 천명합니다. 미도가 받아야 할 충격을 없애기 위해 아주 구차하게 우진에게 구걸하기는 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삶이기에 오대수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진에게 매달립니다.
이 장면에서 우진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오대수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너는 뭐지?’ 오대수... ‘뭐하고 있어?’ 한번만 봐줘... ‘왜, 그러는데?’ 난 미도의 아버지다. ‘미도... 아버지... 그럼 너의 실수로 죽은 누나는 뭘까?’ 제발... 우진은 일부러 오대수에게 리모콘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오대수가 리모콘의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우진은 오대수와 마지막 대화를 합니다. ‘너가 죽이려는 난 뭐지?’ 내가 죽이고 싶은 놈... ‘왜 죽여야 해?’ 날 이런 상황에 몰아 넣었으니까. ‘그럼 왜 그렇게 나에게 구걸했어?’ 아버지니까... ‘아버지, 오대수? 그럼 미도는?’ 죽일 놈... ‘너도 똑같아! 이제 알겠어?’ 오대수가 리모콘을 누르자 나오는 오대수와 미도의 거친 숨소리는 우진의 승리를 경축하는 팡빠레와도 같은 것이죠. 결국 우진이 복수하려 한 것은 오대수가 아니라 자신의 누나가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이 사회의 관념 자체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진이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남겨놓은 오대수로부터 아이러니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극을 지탱했던 당연함이 그 당연함을 통해 무너져 버립니다.
우진은 자신이 만든 상황에 만족하며 죽어버리지만 오대수는 살아남았습니다. 다만 살아남을 후의 오대수는 더 이상 아버지 오대수가 될 수 없게 되지만, 어쨌든 오대수는 우진이 만들어낸 오대수, 미도의 애인으로서의 오대수가 아니라, 나, 오대수로서 살아남으려 합니다. 우진이 만들어 놓은 나의 위치, 미도의 애인으로서 우진를 이해하라는... 감정의 강요, 오대수에게 상처받은 우진의 행동은 정당할 수 있다는... 당연함의 강요. 그리고 결국 이 사회의 관념... 근친상간은 죄악이라는... 정의의 강요마저 거부해 버립니다. 오대수는 자신의 처절함을 숨기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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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과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오대수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이 상황 모두를 깨닫게 되고, 이러한 현실을 짊어져야 하는, 마치 순교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당연함들을 거부합니다. 오대수는 스스로 우진과의 대화를 계속 합니다. ‘결국 그런거잖아.’ 아니 그렇지 않아.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겠지. 하지만 당연한 것도 아니야... 오대수는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미도의 애인으로서 남죠. 비록 원치 않는 결말이지만요.오대수와 우진은 그렇게 서로에게 말합니다. 우진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그것을 인정받기 원하고, 오대수는 그럼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때때로 치고받기도 무릎 꿇기도 하지만, ‘나’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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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것이 고토와 오대수, 혹은 일본과 한국의 차이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키누마의 자살은 고토가 게임에서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었죠. 고토는 끝까지 카키누마가 왜 자신을 감금했는지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카키누마 스스로 고토에게 자신이 왜 고토를 감금했었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던 증오에 대해서도 고토에게 말해 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카키누마는 스스로 자신이 고토에게 가졌던 증오의 원인, 스스로 느꼈던 자격지심을 깨닫죠. 자기 자신이 이미 고토에게 패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정해 버립니다. 주인공은 고토였지만,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카키누마가 이끌어가죠. 결국 카키누마는 자살한 후에도 고토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패배자가 된다 할지라도 고토를 끝까지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렇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각 캐릭터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죠. 원작에서 카키누마는 자살합니다. 영화에서도 우진은 자살을 택합니다. 그리고 스토리 전반에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죠. “게임이 끝나면 난 이제 뭘 하지?”. 우진은 카키누마처럼 자기자신의 성찰을 통해 자살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마치 그리움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복수 혹은 오대수에 대한 계도?를 마쳤으니 당연히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이죠. 우진이 필요한 것은 강자의 위치가 아니라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할 대상이니까요. 오대수에게 그의 실수를 깨우쳐 줌으로써, 이 사회의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우진은 자기가 할 일을 다 한 것이기에 누나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를 인정받으면, 나를 이해시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오대수는 오대수대로 남아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처절하게 선택합니다. 현실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죠.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요. 모든 것은 나로써 살기위해서, 비록 격정적이고 감정적이긴 해도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서로의 인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원작에서 보이는 무력감, 그 무력감을 만들어내는 상황의 설정 자체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영화에서 우진과 오대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고 서서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이겨내려 합니다. 단지 타인에 의해 상처받고 쓰러지고, 자신의 의지를 꺾기기는 하지만, 오대수에게 ‘나’라는 것은 결코 스스로 남에게 자신의 인격을 바치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원작과 영화의 차이는 바로 주인공을 비롯한 캐릭터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 했었는가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원작과 영화가 있게 한 각 나라만의 문화일 것입니다. 그저 바쁘게 카키누마가 안배해 놓은 대로 뛰어다닌 고토와 조연들, 결말이 어떻든 결국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오대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문화적 성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현재 어떠한 모습이고, 어떠한 모습으로 남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너무 성급한 생각이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정형화된 디자인의 형태를 강요하는 문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살아남으려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오대수에게 우리는 고토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산업의 역군으로써, 단지 산업을 위한 문화, 정형화된 형식들을 받아들이고 배끼는 것 이상은 하기 힘들죠. 클라이언트 혹은 선임의 의지 아니면 자신의 교육받았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생각보다는 카피된(일단 완성되고, 검증된 형식) 것을 선호하게 되지만, 그것만이 우리에게 맞는 방식이 아니겠죠.

우진과 대수는 서로 뒤엉켜 아웅다웅 다투지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단순히 누군가의 위에서서 군림하며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감을 나누기를 원하죠. 어쩌면 서로에게 정이 가기에... 함께 만주에서 말달리며 휴식을 취할 때도 한 솥 밥을 나눠먹던 고구려의 병사들처럼 끈끈한 동지애 같은 것이 우리에게 원형으로 남아있는지도 모릅니다. 디자인 할 때 마다, 외국의 디자인 작업물을 참고하며 어떻게든 클라이언트의 클래임을 줄여보려고 노력할 때 마다,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우리들 끼리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한국 디자인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생명력, 끈질김이라기보다는 이리저리 부딪치고 깨져도 ‘나는 나야.’라고 외치며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그 어디에도 얽매여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지 않으려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같이 공감하려고 하는 우리의 원초적인 힘을 표현한다는 것은 힘든 작업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생각에 더욱 맞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단지 외국의 것이기에, 인정받고, 상업적으로 검증받은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마케팅적인 부분을 고려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케팅 자체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나 문화에 대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디자인의 문화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문화라는 겉치레식 단어로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이윤창조만을 생각하게 되고, 영원히 우리 스스로를 위한 디자인은 만들어내지 못하겠죠.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의 디자인은 소비자가 비웃는... 아무리 심플하고 화려한, 빛나는 디자인이라 할지라도 타국의 문화, 타국의 정신을 카피하는... 아류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박찬욱 감독이 오대수의 마지막 선택을 보여준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현재 모습, 우리가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우리에게 강요된 그 모든 현실 속에서 ‘과연 이대로 있을 것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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