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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_작가와 관객의 소통에 대하여

이번 제5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물 한 방울 먼지 한 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동양적 사유의 담론을’ 안내하는 ‘표상’으로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국내외의 여러 작가들이 현재의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번 비엔날레를 소개하는 글 중에서 “...모더니즘의 쇠퇴 이후 지금까지 서구적 담론의 중심에 있는 해체주의나 탈 중심화 등 이미 관념화 된 담론과 문화정치적 용어들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고자 한다. (중략)... 해체를 중심으로 한 변증법적 대결보다는 통합과 종합을 통한 포괄적이고...” 라는 글을 보지 않았더라면, 보통의 작품들(작품의 퀄리티를 따진다는 등의 무의미한 작업을 떠나서 이미 5~6년 전부터 보아오던 전형적인 형식으로 제작된 작품들)과 그 작품들의 의미에 만족하면서 떠나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해체에서 변증법적 대결이나 통합, 종합이 의미를 가지는가 등의 골치 아픈 문제를 따지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광주비엔날레가 스스로 ‘벗어나고자’했던 해체 등의 관념화된 담론을 떠났는지, 떠나지 못했다면 왜 그러한 담론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이경호 작가의‘달빛 소나타’를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주전시장에서는 여러 작가들의 괜찮은 노작들을 볼 수 가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제4관의 ‘달빛 소나타’는 여러모로 관심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참여관객제도’를 시도했는데요,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관객’을 참여시켜 작품에 대한 ‘참여관객’의 시각을 작가에게 피드백 시킴으로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작품을 만들자는 의미였겠죠.) 이경호 작가의 ‘달빛 소나타’에는 그 유명한 ‘프라다’의 ‘미우챠 프라다’가 참여관객으로 함께 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달빛 소나타’의 어두컴컴한 전시실을 들어가자 중앙에 뻥튀기 더미가 전시실 바닥에 한 가득 쌓여 있고 한 쪽 벽면에 뻥튀기 기계가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우측의 벽면에는 영사기에서 쏘아진 둥근 빛(작가의 의도는 보름달을 상징하려는 게 아니었나 싶은데 관람객이 그 앞에서면 이미지가 변합니다.)이 있었고, 그 옆면(입구에서 정면 벽)에는 방에 설치된 뻥튀기 기계의 프래스 부분을 클로즈업(뻥튀기가 튀겨져 나오는 부분)하여 실시간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옆면(입구 좌측 벽)은 뻥튀기 기계의 뒷면에 보이는 체인과 기어가 돌아가는 모습, 그 옆면(입구 쪽 벽)엔 뻥튀기 기계의 옆에 달린 체인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시실의 입구가 벽면 우측 끝에 나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서 작품을 보면 입구 우측면에 보여 지는 둥근 달의 영상은 천천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 않더군요. 아무튼 전시실에 들어서면 중앙에 쌓여진 뻥튀기와 그 너머 입구 좌측면에 놓여진 뻥튀기 기계, 그 기계의 각 부분을 찍고 있는 카메라들과 그 카메라 들이 실시간으로 찍은 영상들을 보여주는 3면의 벽, 그리고 그 방을 흐르는 현대 그리스 음악의 장중함이 주는 압력을 느끼게 되어 있었습니다. (입구 쪽에 가이드를 설치했기 때문에 전시실 전체를 둘러보며 관람할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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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옆에 걸린 설명을 보면 “인터렉티브 설치작품인 ‘달빛 소나타’에서 관객은 기계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벽면 규모의 라이브 영상물을 대하면서 특수기계로 제작된 뻥튀기를 집어먹게 된다. 사운드와 스크린에 비친 인터랙티브한 달빛 이미지와 뻥튀기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참을 수 없는 소음을 통해 작품과 관념은 하나로 결합된다. 관객들은 이곳에서 참여관객 미우챠 프라다가 특별히 디자인 한 봉투에 담겨진 뻥튀기를 살 수도 있다.” 라고 되어 있었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전시가 끝나갈 때쯤이어서인지 이미 프라다가 디자인한 가방과 그 안에 담겨 팔리는 뻥튀기는 다 팔려서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곳에 있는 도슨트(작품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이해하고 관객에게 설명해 주는 가이드)에게 프라다 가방에 대해 물어보니, 그냥 아무렇게나 디자인한 오렌지색의 싸구려 비닐 가방이었다고 하더군요. 비엔날레 도록에 이경호 작가님이 써놓은 글을 보면 마지막에 독백하듯이 “...세상에서 가장 싼 뻥튀기를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가방에 담는다.”라고 되어 있던데... 프라다 씨의 배포가 그리 크진 않았나 봅니다.

전시실 외에도 전시실 들어가는 입구 옆에 그 문제의 뻥튀기가 담긴 프라다 비닐백을 파는 매점(이미 다 팔려서 매장은 철수 했더군요.)이 있고 그 위에 대형 화면이 설치되어 있고, 편집한(뻥튀기 기계가 고속 연속동작으로 뻥튀기를 튀기는)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뻥튀기는 기계 소리도 계속 들리는데 전시실의 음악과 함께 듣는 것이 감미로운 음악으로 들리지는 않더군요. 아무튼 기계시대, 대량생산체제 하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장중한 음악과 기계의 소음 그리고 화면에 보여 지는 기계들의 움직임(보통 때는 가만히 있는 모습밖에 못 보지만, 간혹 시간이 되면 전시장 진행요원이 직접 뻥튀기 기계를 가동시키고 뻥튀기를 나눠주더군요.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벽면에 실시간으로 보여 집니다.)이 암시하는 이 세계의 구조와 억압에 대한 연출들... 작가는 이 뻥튀기 기계를 총신대 부근을 지나다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퍼뜩 스치는 많은 이미지들과 그 이후로 떠오르던 이미지들... 뻥튀기는 소리와 전쟁의 소음, 쌓여가는 뻥튀기와 오버 랩되는 시신들, 뻥튀기처럼 찍혀지는 듯한 일상과 알게 모르게 그렇게 규격화되어가는 사람들, 그러나 뻥튀기가 무인도에 있다면 그것은 생명이 되고, 뻥튀기가 담겨진 프라다 가방은 그저 버려지겠죠. 그런 연출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관객들의 등 뒤 벽면(입구 왼쪽 벽)에 비치는 보름달의 이미지(물론 관객이 보름달이 비치는 벽에 서면 이미지가 바뀝니다. 그 판타지적 요소가 희망적 메시지인지 절망에 대한 도피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런 연출 속에서 뻥튀기를 먹는 관객들... 전시실에 한 무더기의 관객들이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기 전에 (사실 저는 또 다른 목적 때문에 이 작품을 관찰하며 꽤 오랫동안 죽치고 서있었습니다.) 그 뻥튀기 기계를 돌리기 위해서 진행요원이 뻥튀기 기계를 사포로 무척 열심히 갈아내고, 훅 하며 한 숨에 사포에 갈린 프레스의 철가루를 날리고는 바로 거기다가 뻥튀기 쌀을 넣고 튀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행주로 한번 닦아주기라도 하시지...) 철가루 범벅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뻥튀기를 이후에 들어온 관람객들에게 나눠주고 먹는 모습... 저도 하나 먹었습니다만, 정말로 그런 기분... 온 몸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던 메시지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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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자체는 해체적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의 현실을 표현해 낸 수작인 것 같았습니다만... 이번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이런 형식의 설치미술작품들을 여러 다른 미술관에서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관객들은 이런 작품들의 해체적 접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런 해체적 작품들만이(달빛 소나타 외의 작품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전시됨에도 불구하고, 이번 광주비엔날레가 해체를 뛰어넘어 새로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시대, 혹은 그 시대의 담론을 파괴하고 뛰어넘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히 단 기간에(2년 터울로?) 몇 자의 글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텐데... 우리는 말의 그럴듯함에 빠져 현실 보기를 등한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사실 해체를 뛰어넘지 않더라도, 이번 비엔날레에 전시된 것들 중에 ‘달빛 소나타’처럼 좋은 작품들도 많았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한 것들도 많았고요. 전라의 남자를 세워놓고 간간히 물을 뿌리는 영상작품, 오토바이 배기구에 트럼펫을 붙이고는 끝없이 달리며 경적소리를 내는 영상작품 등 권력의 신화를 드러내고 이를 해체시키려는 작품들... 또는 전시실에 연못을 만들고 팔각으로 책장 혹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살의 격자처럼 보이는 벽을 설치해 작품 어디서나 그 격자를 통해서 작품속으로 떨어지는 물방울과 수면의 파문, 그리고 그 반대편을 보게 만든 작품 등...
사실 저로서는 이번 비엔날레가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참여관객제도’라든지 ‘도슨트 제도’등 관객이 작품과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점, 혹은 작품과 관객의 소통에 대해서 좀더 신경 쓰려 했다는 점(지금까지의 여러 전시처럼 ‘이해하면... 좋고, 못하면 바보’식의 방식을 버린 점) 전시공간의 확대(광주시립미술관 내부 외에도 광주 여러 곳에서 또 다른 비엔날레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등 여러모로 괜찮은 시도들이 있었고 그 결과도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다만 ‘참여관객제도’를 위해 선정된 ‘참여관객’이 작품제작에 함께 한다는 것이 관객의 시점으로 작품과 피드백을 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참여관객’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인지(작가와 참여관객이 만든 작품은 완성된 형태로 전시실에 놓여집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작품을 다만 감상? 하게 되죠. 그렇다면 결국 참여관객은 작가의 위치에서 관객과 소통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작가와 참여관객의 좌담회를 보여주는 TV브라운관을 보는 느낌이랄까요?)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시도된 제도(‘참여관객제도’와‘도슨트제도’)가 현실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들을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은 어떤 작품이나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관객들 때문이죠. 위의 ‘달빛 소나타’를 관람할 때 관람자는 분명 그 중압감에 눌리고 불쾌감을 느껴야 작가, 작품과 소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수많은 학생들과 아저씨∙아주머니들이 보고 느낀 것은, 뻥튀기가 전시실에 있다는 것과 그 뻥튀기가 ‘맛’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뻥튀기네.” “뻥튀기가 여기 왜 있냐?” “옛날에 이거 먹을 때 말야...” 조잘조잘 재잘재잘 떠드는 관람객들... 솔직히 ‘달빛 소나타’의 그 장엄함, 엄숙하고 비장함은 그렇게 바로 그 전시실에서 실존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들뢰즈의 ‘텍스트’로서의 속성, 그 즐김에 의해서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사물 혹은 작품이 가지는 (이데아? 적)속성 때문이겠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물자체’에 대하여 말한 것은 결국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에 대해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죠. 즉 우리의 인식은 우리가 육체를 통해 받아들이는 지각의 현상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불완전한 것이라는 뜻이죠. 단지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그 감각의 느낌만을 가지고‘안다’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 결국 우리는 칸트에 따르자면‘물자체’로 불리워지는 외부세계 혹은 그 대상들이 가진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손 되고, 결핍된 의미가 인류가 가진 인식의 저장과 흐름을 통해 들뢰즈가 말하는‘텍스트’로서의 현상을 제공하는 것이겠죠.

(들뢰즈는 작가의 작품은 과연 창작물일까?라고 묻습니다. 인류의 모든 인식은 역사성을 가집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재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인식을 계속적으로 바꾸게 됩니다. 푸코에 따르면 예전에는‘광기’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두려운,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저 비정상적인 혹은 병리학적으로 격리시키고 치료해야 하는 통재되어야 할 그 어떤 것으로 그 인식이 바뀌어 졌습니다. (물론 푸코가 이야기 하려던 것은 그런게 아니지만 어쨌든...) 어느 현상이든지 혹은 대상이든지 우리는 그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우리의 방식대로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 진실이 아니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성, 의미의 흐름은 장소성?,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또 다시 의미의 분절이 일어납니다. 같은 시대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에 따라 그의 경험은 달라지게되죠. 하나의 대상을 보더라도 그 의미는 그 사람의 경험에 따라 또다시 달라지니까요. 결국 글 혹은‘텍스트’자체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시니피앙, 기의들이 변화하고 움직이는‘물자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제 작가는 허공에서 글자를 만들어 의미를 정의하고 글을 쓰는,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내고 의미를 부여한 단어들 혹은 기호를 가지고 글을 짜 맞추기만 할 뿐입니다. 작가는 그저 그 의미들을 조합하는 사람에 불과하고 관객 또한 그렇게 던져진‘텍스트’를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즉, 즐기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들은 또다시 변화되어 갑니다.) 들뢰즈는 단지 글쓰기에 한해서 말한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사물도 시니피에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같은 경우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시실에서 작가와 관객은 설치작품이라는 겉으로 드러난 상황을 공유하지만 작가와 관객이 가진 정보, 경험, 느낌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나 연출은 관람객에게서 전혀 엉뚱한 결과만 생성해 내어버릴 수도 있죠. ‘달빛 소나타’에서 작가는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인지와 이해를 통해서 그 의미에 대한 많은 암시를 보여줬지만, 일상의 삶마저 바쁜 관람객들은 그저 생활 속에서의 느낌과 경험 즉,‘뻥튀기’의 맛과 '뻥튀기'가 전시장에 있다는‘색다름’외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그 어떤 현상이라도 그 곳에 무엇인가가 존재했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죠. 그것이‘나’라는 존재에게 어떠한 것인가라는 인식과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겠죠. 그리고 그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는 그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구요. 결국 전시실의 상황을 보드리야르의 시선(그가 해체의 끝에 서 있는지, 아님 해체를 벗어난 것인지는 제 수준으로는 잘 모르겠지만...)으로 보자면 제1,2열의 시뮬라크르(단순한 복제, 상황의 재현)가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제시된 시뮬라크르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도슨트 제도가 필요해 집니다. 작가가 항상 전시실에 있을 수도 없고, 무슨 대상을 어떻게 복제했기에 이런 표상이 나왔는지는 비슷한 수준의 경험과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알아보고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미술, 혹은 예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관람객에게 전시장에 제시된 시뮬라크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도슨트’라는 가이드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작가가 직접 관객과의 소통(작가와 관객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의미의 생성과 복제, 재복제 까지를 포함하여)을 의도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전시실과 관객 그리고 도슨트에 의해 그렇게 작품의 의도가 배재된 현실의 시뮬라시옹은 시작되고... 어쨌든 관객이 전시장에서 소외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뭐랄까... 앞으로는 도슨트가 필요 없는 관객,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려나... 어쨌든, '어떻게든 작품과 소통하고 있는 관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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