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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_ 그리고 문명

KBS 스페셜에서 방송한 도자기 6부작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간간히 시청률을 위한 문학적 수사가 아주 약간 거슬리기도 했었지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치 디자인과 문화 혹은 문명의 관계에 대한 대 서사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내내 흥분과 기다림 속에서 지내야 했죠. 단순히 화면과 배경음에 의한 심리적 반응이 아닌 그 내용에서 오는 약간의 기분 좋은 떨림 같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6편 ‘문명을 넘어’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디자인 사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윌리엄 모리스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붉은 집’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러스킨이나 웨지우드의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 등도 떠오르죠. 그리고는 생각합니다. ‘에게, 겨우 도자기...’ 언뜻 초라하게 생각됩니다. 참 소박하죠. 현재 우리에게 도자기는 그렇고 그런 생활용품 중의 하나일 뿐이고, 경제적인 측면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디자인계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모리스가 왜 도자기(다른 공산품들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에 열을 받아야 했는지도 산업혁명에 있어서 도자기가 왜 그렇게 자주 언급되는지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도자기’ 6부작을 보면서 도자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산업혁명기에 도자기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현대 디자인의 필요성, 그 의미와 역할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도자기에서였다는 막연한 역사가, 천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도 살아있는, ‘도자기’의 생명으로 다가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도자기를 통해 보여 지는 인간의 욕망(솔직히 말하자면 소비심리 혹은 허영심...)을 보면서, 디자인이란 것이 결국은 이러한 욕망의 도구일 뿐인가라는 생각에 암울해 지기도 합니다. 도자기라는 제품과 그 포장디자인(육로에서는 진흙을 쓰지만 해로에서는 볍씨를 사용하죠. 당시에도 농민에게 볍씨는 상당히 귀중한 것이었을 텐데... 전국시대의 묵가가 다시 살아나 사치를 일삼는 당시의 왕후장상에게 일갈할 지도 모를 일이죠.)에 숨어있는 환상의 발아... 전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지게 되는 마이센 도자기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자신의 욕망을 감춘 체 찬란한 유럽의 기록문화로 희석되어 버리고, 웨지우드 사에서부터 시작된 근대적인 분업화 생산시스템은 복제의 문제 그리고 대량생산에 의한 장인문화의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었지만, 단지 화려한 산업혁명의 시초로서 이야기 되어버립니다. 자포니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의 시작, 아르누보는 일본의 도자기 포장지, ‘우끼요에’에서 시작되죠. 하긴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고 현재 세계의 헤게모니는 자본에게 있습니다. 세계는 자본의 신화에 의해 별 탈 없이 굴러가고, 빅터 파파넥의 활동은 그저 가진 자의 일탈에서 오는 즐거운 유흥처럼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죠. (그가 원한 것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의 역사를 보면서, 문명과 문명의 만남을 보면서 도자기의 생명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게 되는 것은 왜 일까요? 조지 시저스(빅터 파파넥의 제자)가 만든 제3세계를 위한 라디오 수신기와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생뚱맞음과 이유모를 거부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문명, 그것은 분명 세계라는 전쟁터 안에 있는 하나의 군단을 부르는 이름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 중에 니므롯이라는 사냥꾼이 나타납니다. 세상의 영웅이자 신 앞에서 특이한 자... 그는 도시를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사냥꾼 혹은 용감한 전사에 의해 문명이 시작된 것이죠. 전쟁은 그치지 않으며... 피와 약탈의 역사는 어쩌면 영원한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욕망과 질투, 피와 복수...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알기 때문이며,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죠. 지금은 정식으로 출판되었지만, 예전에 ‘북두신권’이라는 이름의 해적판 일본만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보아도 상당히 하드고어한 내용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죠. 하지만 그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주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입니다. 정확하게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의지, 사랑에 대한 욕망과 결핍, 그 일그러진 현상에 대한 서사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비록 남녀간의 사랑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뒤로 갈수록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그 개념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의 현실을 미래의 세계에 투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잃어버림... 투쟁은 인류의 운명이겠죠.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는 바벨탑을 쌓으며 신과 대적하고 바벨탑이 무너진 후에는 각 부족끼리 싸웁니다. 인간은 영원히 삶을 위해 싸우고, 문명은 전쟁을 일으키죠. 마치 시지프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피곤과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합니다. 토템과 샤먼, 신과 제사장 그리고 ‘소도’...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담아 솟대를 세우고 피난처를 얻어냅니다. 솟대... 솟대에 담겨진 그러한 염원... 피난과 도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갈증은 차츰 형태(인공적인 표상물로서)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염원은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도자기의 유약이 바뀌고 채색법이 바뀌어도 깊이 잠재되어 변치 않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염원’에게 마저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얻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문명의 속성조차 이 ‘염원’을 더욱 강렬히 해 줄 뿐입니다. 마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로부터 꽃피운 일본의 도자기처럼...(왠지 열 받지만 그런 것은 역사와 정치의 몫으로 남겨두죠.)

도자기... 그것은 단순히 인류의 암울한 욕망이 투영된 것은 아닙니다. 도자기를 둘러싼 그 암울한 인간의 우매함을 넘어서 도자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해탈의 경지를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이센의 자기인형이나 금박을 입힌 셰브르의 도자기라해도 마찬가지이겠죠. 귀족들의 ‘허영’... 하지만 ‘허영’은 길가에 구르는 돌을 잡고 이게 멋있는 거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죠. 세상엔 수많은 벌거벗은 임금님들이 계시지만 ‘허영’이라는 권력과 부에 대한 의지 그 힘의 표출은 언제나 순수하고 예리합니다. ‘도자기 하면 조선의 백자가 최고다.’라는 아집 속에서 유럽의 자기가 가지는 장식성은 천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여태껏 가지고 있던 성리학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의 그 순수한 감성, 그 염원은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억눌려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미를 찾겠다고 시도하면서도 벽에 부딪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허영’도 결국은 인간의 순수한 염원... 우리가 사랑을 모른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도 복종도 질투도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지겠죠. 그리고 그 부질없는 사랑에 대한 갈구 속에서 다투고 상처받고 결국은 위로받기 위해... 결국 그렇게 문명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서로 물고 물리며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디자인하는 하며 살아가죠... 문명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사랑을 이야기 하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슬프게 그 잃어버림에 대하여 말할 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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