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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사랑한다''_ ''본다''라는 행위가 가지는 힘

디자인이란 흔히 소비를 위한 여러 요소들을 디자이너가 종합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된 제품들이 과연 디자이너의 의도한 모습 그대로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질까요?
디자인이라는 것, 보여지는 이미지들, 그리고 ‘본다’라는 행동이 가지는 힘, 인간이 느끼는 감각이라는 것, 혹은 생각한다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디자인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단순한 드라마가 보여주는 현상들(시청자들 혹은 마니아들이 보여주는 현상까지 포함하여)은 여기에 약간의 힌트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마니아층을 확보한, 그러니까 성공한 트랜드 드라마라고 볼 수 있는 ‘미사’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참신한 이야기? 버림받은 아이, 시한부 인생의 주인공이 가지는 비장함 그리고 그런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연인의 이야기, 그 잃어버림에 대한 아픔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의 역사는 제 또래의 시청자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렇기에 ‘신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고까지 말하는 신문기사도 있었던 것이겠죠. 그렇다면 시대적 문제의식? 물론 주인공은 입양아로 설정되어 저 멀리 호주에서 대한민국으로 날아옵니다. 첫 회에서 보여주는 입양아들에 대한 인터뷰 장면은 이 드라마가 어떤 사회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라는 헷갈림을 제공하기도 하죠. 하지만 극중에서 주인공은 입양아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괴로워하다 죽어간 것이 아니라 인간 차무혁으로서, 고아도 아닌 단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로서 죽습니다. 차무혁은 한국에 부모를 찾으러 온 순간부터 죽을 때 까지 그 짧은 순간을 호주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적응해 살다가 죽죠. (농담입니다만 차무혁은 발음까지도 한국에 더 잘 적응하더군요.)
그리고 시청자들은 무혁의 그런 삶을 보기위해 매주 월, 화요일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찜찜한 결말(윤이 자신을 입양아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요즘 유행어로 말해 정말 ‘생뚱맞죠’, 게다가 무혁이 오여사를 용서하는 것이나, 전직기자분이 무혁의 메모만으로 오여사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는 장면 등을 보면, 결국 드라마는 총알박힌 머리, 시한부 인생, 입양아, 버려진 아이와 부유한 가족 등의 이미지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체의 이야기 구조는 모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을 보면서, 특히 차무혁이라는 인물과 연체의 아버지라는 인물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이 드라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신파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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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무혁의 안타까운 현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정서라고 생각하던 ‘한’을 만들어 냅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죽어가는 신세가 되고(해어진 동거녀를 살리기 위해 총을 맞고),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당하면서도(먼 타국 땅에서 뒷골목을 해매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무혁은 자신의 어머니는 힘들게 살기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라는 분은 한국에서 성공한 배우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있죠.) 윤이 입양아라고 말하자 복수를 포기 합니다. 윤과 함께 어머니에게 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조차 포기합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았나요? ‘아,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시구나. 어머니는 죄가 없으시구나.’ 정말 그런 건가요? 극의 구성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오여사는 죄가 없지요. 오직 은체의 아버지나 윤의 비양심적인 행동만 아니었다면 무혁은 행복하게 어머니의 품에서 죽었을 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드라마에서 무혁은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그리워하다 죽습니다.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당신의 자식입니다.’라는 말 한마디 못 한 채 말이죠. 왜 그래야 할 까요? 극 중에서 무혁이 말했듯이 ‘어차피 버려진 자식은 이미 끝난 사이’라서? 그렇다면 친자식인 자기를 버리고 입양아를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의 가증스러움에, 윤에 대한 오여사의 사랑에 대해 더욱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는 게 보통 아닐까요? 최소한 어머니가 왜 자신을 버렸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나요? ‘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상당히 지능적이면서도 저돌적인 행동력을 보여주던 무혁이, 어머니를 보기 위해 윤의 메니저를 자청하고(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 무작정 라면도 끓여달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의 사랑을 간절히 바라던 무혁이, 이젠,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도 않고서 죽어버립니다. 어쨌든 윤은 무혁의 심장을 얻고... 무혁은 속세에서 해탈한 것일까? 자의 반 타의 반, 남은 뉘우치지도 않는데, 아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어진 것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자기혼자서만 용서 하다가 ‘넌 내 아들이야’라는 말도 못 듣고 죽어버리죠. 참 ‘한’스럽네요. 근데 그게 우리의 민족성이었던가? 강감찬, 이순신등의 옛 장수들이 ‘아 우리나라 침공하셨네요. 우리국민 많이 죽이셨을 텐데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용서해 드릴께요. 제 운명이죠 뭐.’라며 항복하던가요?

은채의 아버지... ‘미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분이시죠. 이미 무혁이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복수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다음에도, 입양아인 ‘윤’마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시는 오여사에게 무혁의 출생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사회에서 혈연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죠. 혈족이 아니기에 입양조차 꺼려 수많은 고아들이 무혁이처럼 해외로 입양되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해어진 가족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몇 년째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나라에서, 그러한 프로그램이 이 드라마의 초반에 극의 배경이 될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은채의 아버지는 무혁의 출생에 대해 침묵합니다. 옛 주인마님에 대한 충성일까? 은채의 아버지는 극의 모든 문제를 만들어낸 주역 중의 하나이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입니다. 젊은 청년시절도 아니고 이미 40을 넘긴, 냉철하게 생각할 수 있는 나이인데... (오여사가 무혁을 찾아갈 때 그는 인륜을 생각하며 오여사를 만류합니다. 그 정도의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 혈육의 관계를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받게 될 리스크가 얼마나 될까? 그는 단지 이사를 감으로써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도망칠 생각만 하죠.) 부담은 되겠지만 자신의 위치와 오여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말 못할 것도 없습니다. 직접 내다버린 건 그이지만 무혁을 버리도록 명령한 것은 오여사의 어머니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갈등하면서도 끝내 침묵합니다. 그리고 평생 복수를 준비한 늙은 전직 기자와 함께 무혁의 죽음과 용서를 지나간 이야기 하듯 합니다. 마치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는 듯한 모습으로... 마지막 회에서 오여사가 무혁의 누나와 함께 즐겁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이미 모든 것이 밝혀지고 오여사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될 지도 모르죠. 하지만, 입양아 윤의 심장에 자식의 심장이 박혀 있는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도 자연스럽게... 즐거울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드라마가 되어버립니다. 지금껏 말하고 있던 모성과 인간관은 어떻게 하죠? 그런 것이 모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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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극이 끝나면서 등장인물들의 관계는 더더욱 긴장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무혁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무엇이 해결된 것이죠? 이 드라마가 부조리극이라는 건가요?

어쨌든 시청자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무혁이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적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드라마 중반부터의 마니아층 생성과 열광... 아마도 그것은 무혁이 보여준 모습, 바로 현실의 나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자체가 현실과 비슷한 모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더욱 더 현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죠.) 사실 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도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보면서 생명과 안전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경제 전망 속에서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나 이미 실직한 후의 생계에 대한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이 사회 구조 내에서 발생하고 나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억울함들까지... 이런 것들만으로도 우리는 현재와 미래가 절망적이라고 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 절망을 차무혁에게서 보았습니다. 또 다른 나를 찾아낸 것이죠. 내가 이해되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게다가 이상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그 누구인가를 본 것입니다. 나와 같은 그리고 내가 되고자 하는 캐릭터...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모성애...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편안한 휴식처, 그곳을 바라는 것은 무혁이만의 바램은 아니겠죠. 게다가 그를 좋아하는 귀여운척하는 은채와 끝까지 어색하게 연기하는 민주까지...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 ‘세계_내_존재’로써, 그 속에서 나로써 마치 신과 같은 완벽함으로 살아가려는 ‘초인’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일 수도 있는, 어쩌면 그저 ‘실존’하고자 하는 존재인 나를 무혁이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아니면... 그냥 느낌가는 대로던가...

시청자들은 무엇에 열광했던 것일까요? 무혁의 ‘로망’적 삶 때문에? 아님 무혁과 은채의 사랑? 제가 ‘미사’를 보게 되었던 것은 위에 있는 포스터 때문이었습니다. 현란하면서도 강렬한 색상 그리고 선명한 이미지에 덧붙여진 하얀 캘리그래피가 주는 깔끔한 인상, 그들과 함께 골목에 앉아 오후의 나른한 활기, 상큼한 산들바람... 그런 느낌을 같이 즐기는 듯해서였습니다. 아마 시청자들도 자신에게 맞는 어떤 느낌 때문에 이 드라마를 접하고 더 잘 몰입했을 것 같네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야기 자체의 구성에서 보여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 하나하나, 즉 내가 몰입할 수 있는, 내가 동일시하고 대리만족할 수 있는 그 누구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회구성체로서의 나라는 존재보다 한 개인으로서 사회와 투쟁하는 나에 더욱 가까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이야기의 상황이 보여주는 이 사회의 구조와 그 속에 있는 인간들의 관계 보다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나의 감정을 이입할 수 있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나 장치들... 그 어떤 사건과 인물이 더욱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죠. 어쩌면 우리는 그런 인물을 만들어서라도 나의 감정을 만족시키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영웅본색’의 주윤발을 그 당시의 영웅으로 떠받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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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왜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런 것들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느끼려고 하는 것일까요? 제작자와 시청자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극의 개연성마저 무시하며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지도 모르죠.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옆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언제인지도 모르는 순간에 잃어버린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던, 나를 인정해주던_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되찾고 싶어서 해매야 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 우리는 냉철한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을 택한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열광적으로 감정을 분출할까요? 어쩌면 나르시즘에 빠져서,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게 보여진 현실에 대해 그저 있는 그대로 습관적으로 나의 감정이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타조와 오소리(였던가?)는 천적인데, 그 이유는 오소리가 타조의 알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라네요. 하지만 타조둥지에 오소리 인형을 놓고 타조새끼가 내는 ‘칩칩’거리는 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타조어미는 오소리 인형을 자기 새끼처럼 돌본다고 합니다. 인간이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들 중 많은 부분도 그런 본능적인 반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고 누군가는 그런 심리적 기재들을 조작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만의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 있을 때... 뜨거운 가슴에 나의 머리마저 뜨겁게 달구어지고, 혼미해지면 누군가는 나의 그런 감정을 어리숙하다고 비웃으며 나의 감정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겠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은 언제나 타인을 내 뜻에 맞게 움직이려 노력하는 존재니까요.

제작진이 보기에 시청자에게 필요한 것은 줄거리의 개연성이나 완성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의 감성을 자극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겠죠. 우리에게 ‘한’은 모르지만 시청자로서의 ‘감성’만은 정말 풍부하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모순된 구조를 만든 것은 어쩌면 그 이상의 무엇 때문일 수도 있겠죠. (계급간의 투쟁에 대한 백신의 투여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무런 개연성도 필요없이 그저 용서만을 해야 하는 무혁과, 약간 오버스럽긴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소년소녀가장도 도와주며 사는 착한 오여사... 오여사는 무혁이 남매를 볼 때마다 ‘내가 왜 이러니’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죠. 오여사는 무혁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것은 오여사의 잘못이 아니라 은채의 아버지나 윤의 비양심적 행동 때문입니다. 오여사는 아무것도 모르죠. 그렇다고 은채의 아버지나 윤이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단지 약간 이기적일 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죠. 모든 것은 그저 여러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지는 문제들일 뿐, 그런 모습 자체가 제대로 된 상황인지, 좋은지 나쁜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쨌든 당하는 무혁이 오여사를 용서하면 모든 것이 (은채도 자살해 버리니... 원한을 남긴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해피앤딩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면 충분하죠.
과연 그거면 충분한가요? 시청자들이 무혁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 현실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런 현실과 공감을 가지고 드라마는 자신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를 속삭입니다. 시청자들은 오여사와 무혁의 관계를 보면서, 무의식중에 이런 구조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현실, 이 사회와 나의 구조적 관계를 연상하며, 마치 무혁처럼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 사회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학습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반어법적으로 나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지도 모르고... (제작진의 의도보다는 시청자가 받아들이는 관점에 달린 문제이겠지만... 예전에 이현세님의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가 생각나네요. 거의 지금과 비슷한 결말을 맺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후자 쪽에 가까웠었죠.) 어쨌든 미디어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상황이겠죠. 웹에서라면 반론도 있고 실시간으로 이야기가 바뀌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기도 하겠지만, 방송은 그저 만들어져 보여질 뿐... 시청자는 제작진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든 것을 보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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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여진’ 드라마를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 시청자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내고 미디어를 단순한 바보상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보여졌다고 해서 시청자가 그것을 그저 바라본 것일까요? 시청자들은 미디어의 프로파간다를 접한다고 해서 컴퓨터의 입출력장치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죠. 미디어의 관점이나 주장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런 일방적인 메시지의 전달이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사회적 효과는 나타나겠죠. 그러나 모든 시청자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내지는 못합니다.) ‘미사’가 미디어의 어떤 역할에 충실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청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극의 구성이나 관점, 주장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사회비판적인 관점이든 수구적인 관점이든, 혹은 보수나 개혁이든지간에 미디어는 그 어느 관점에 서서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파 할 뿐이지만, 시청자는 자신에게 보여진 이야기들을 새롭게 나만의 이미지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뮬라시옹의 시작이죠.
시뮬라크르는 이미 장자의 호접몽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 인류가 사회를 구성하고 문명을 만들 때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다만 현대의 시뮬라시옹이 주목받게 된 것은 미디어나 웹 등의 등장으로 여태까지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에서, ‘눈에 보여지는 실체’(모니터나 브라운관의 평면 안에서만 보여지는 것이긴 하지만...)로 전환 되었다는 것이겠죠. 이전까지 정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던 소수의 주체들이 일방적으로 정보를 만들어 전달하고 어떤 사회적 현상을 이끌어 냈다면 현재는 미디어나 웹 등에 의해 모든 이들이 정보와 개념을 공유하면서 서로간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현상들을 만들고 다시 그 현상들에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정보를 구축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글쎄요... 보드리야르 옹이 말하듯이 시뮬라시옹이 미디어적인 허구성을 띠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청자의 무의식적인 동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생성이라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인 게 아닐지... 의도하는 그 어떤 주체가 있기야 하지만, 시청자의 개별성과 대중성은 2차대전 당시 영국공군이 사용한 알루미늄 채프처럼 모든 것을 난반사 시키며 흡수하고,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죠. 파시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대중은 그저 통제되는 무리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이미지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에 열광했던 것은 소지섭이 연기한 무혁이라는 캐릭터가 멋져 보여서 혹은, 은채를 연기한 임수정이 귀엽다거나 하는 점일 수도 있고, 그들에 대한 나의 동일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오여사나 기타 조연들의 연기와 그것을 패러디하는 개그맨이나 화백들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처럼 단순히 포스터의 이미지나 영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미사’의 대사들이 주는 공감이나 재미 때문일 수도 있겠죠. 현재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사의 감칠맛도 시청자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요소이니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드라마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든 시청자들은 극의 구성이나 여러 이미지들, 대사를 떠나 현실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자극과 정보를 찾을 뿐이라는 것이죠.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속의 순간순간들을 토막내어 나에게 맞게, 내가 원하는 이야기로 짜맞추기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데리다나 들뢰즈가 관심을 보였던 각 개인의 권리, 혹은 힘, 바로 그것의 실현인지도 모르죠.

드라마는 현실의 순간순간들을 뽑아 놓고 기다립니다. 알맞은 시나리오 혹은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짜 맞출 구성이 준비되면, 마치 사진처럼 찍혀져 보관되던 각자의 현실, 시청자들의 순간순간들은 편집기를 지나 영사기를 통해 드러나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그 안에서 드라마의 구성이 아닌 나만의 순간을 바라봅니다. ‘미사’라는 드라마는 이미 제작되기 전부터 시청자 각자의 바램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죠. 단지 그 모든 시각들을, 그 모든 시청자들의 순간들과 바램들을 묶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제시된 것뿐입니다. ‘미사’는 단지 시청자들에게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한 꿈을 각자에게 보여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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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진다’라는 것, 그것은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고 남이 내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디자인은 그 ‘보여지는’것을 어떻게 ‘보이게’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 ‘보여지는’ 것은 결코 ‘보이게’만들어진 그대로 ‘보여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미사’가 시나리오의 구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시청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다’라는 행동이 가지는 힘은 미디어나 이미지의 통제력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각 주체, 사람마다, 그들의 육체마다 인식하고 인지하게 되는 ‘보여진’것은 드라마가 의도하고,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모든 사람 모든 현실은 ‘보여짐’과 동시에 ‘본다’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어떤 일방적인 주장이 ‘보여지는’(주입되고 학습되는)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의 ‘본다’라는 행위 속에서, 우리가 흘러가는 모습이 ‘보여지는’(말 그대로 보여지는) 것일 뿐입니다.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고 있던 것일까요? 소비자 혹은 생산자, 모더니즘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은 그때그때마다 자신의 관점으로 대중의 꿈을 모아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디자인이 만들어 낸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생산자의 입장에서야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대로 디자인이 만들어지고 소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사’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지라도, 시청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제작자가 만들어 놓은 ‘미사’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에게 ‘보여진’ ‘미사’, 자신의 기억과 마음에 남겨진 ‘미사’입니다. 그렇기에 ‘보여지는’ 이미지들... 이미지들 마다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시청자가 보고자하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것은 이미 소비자가 ‘보여준’ 이미지들의 조합일 뿐인 것이죠.
‘보여진’것과 ‘본다’의 구성에 있어서 혼동은 요새 유행하는 한류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겨울연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저와 같은 한국인이 겨울연가에 열광해 관광까지 오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볼 때나, 인터넷을 통해 호남향우회가 쓰여진 드레스를 입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우리가 영화 ‘다이하드’나 ‘빅대디’ ‘볼링 포 컬럼바인’등을 보고 생각한 이미지들이 미국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미국인이 생각하는 미국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겠죠. 다만 그렇게 ‘보여진’것을 통해 자신을 ‘보게’되기는 하지만... ‘보여진’ 이미지는 그저 거짓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지 내포된 자신의 의지일 뿐 이미지의 진실은 아닙니다. 소비자는 ‘본다’는 행위 속에서 이미지에 자신만의 의지, 이미지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죠. 무엇이 진실일까요? ‘보여지기’위해 조합된 이미지 즉, 시청자들이 ‘보여준’ 이미지들 또한 이미지의 의지들일뿐 진실은 아닙니다. 과연 진실이 존재할까요? 우리는 언제나 ‘보여지는’ 존재이며, 동시에 ‘본다’는 행동을 하고 있는 주체들입니다. ‘보여지는’ 모습과 ‘본다’는 행위는 동시에 서로 맞물려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 흐름, 그것만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존’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서 ‘보여진’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 과거 속에 남겨집니다. ‘미사’의 신파적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변신해서 다가오고, 시청자는 그런 모습에 열광하지만 곧 잊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시청자에게 ‘미사’는 ‘보여진’것이고, 이젠 그 어디서나 ‘보이는’ 그저 그런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단지 우리의 기억이 남겨지고 쌓이면서 이미지를 벗어난, 스타트렉의 트렉커들 혹은 일본의 오타쿠에게 향유되는 문화처럼 그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향해 자신을 ‘보여주는’ 형식의 생명을 가질 수는 있겠죠. ‘미사’가 그 정도의 역량을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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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디자인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 사회에 속한 상태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자 하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의 꿈, 혹은 그 이상의 것... 디자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시각을 강요하지만, 그 시각은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는 문화를 포장하는 거짓의 이미지일 뿐이죠. 계몽적 관점에서 싸우는 보수나 진보의 관념싸움을 가볍게 비웃으며 소비자는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디자인 또한 그렇게 자신의 생명력 속에서 생성되고 명멸해 가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도 대중에게 제시되는 정보와 개념이 한정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지만...) 어쨌든 문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문화를 만들어가는 개개인의 자율성을 속박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지금보다 더 좋은 문화, 수입해야할 카피해야할 그 무엇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찾아다닌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내가 따라가야 할 그 무엇, 이미 소비되어진 이미 모두에게 ‘보이는’, 이미 모두에게 ‘보여진’ 흔적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보여진’ 것들 속에서도 디자인은 자신의 눈으로 이 사회를 ‘본다’는 행위를 멈추지 않습니다. 아마 그것이 디자인의 생명력일 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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