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이 가장 많이 본 디자인 뉴스
국내 리포트
페이스북 아이콘 트위터 아이콘 카카오 아이콘 인쇄 아이콘

친절한 금자씨의 불친절

복수란 무엇일까요? 어떤 면에서 복수는 매우 수동적인 단어입니다. 복수 이전에 그 복수의 원인이 존재하고, 그 원인이 고의적인 것이든 우발적인 것이든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떠올리게 되는 단어니까요. 하지만 피해자는 선택을 통해 그 피해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도 있고, 단순히 분노를 삭이거나... 복수를 할 수도 있겠죠. 복수란 결국 한 인간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한 자신의 의지이고 행동입니다. 그것은 잃어버림에 대한 절규이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순간, 깨져버리기 전의 온전했던 순간에 대한 염원이기도 합니다. 피해를 당하기 전의 온전했던 순간으로 돌이킬 수 없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 복수인 것이죠.
이해하고 용서하거나 합의를 본다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회적 관계에 기초 하는 것과 다르게, 복수는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잃어버린 순간에 집착하기에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피해를 납득시키고 보상받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은 억울한 피해자이기에 자신은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고 증명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선택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자신은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라고 여기며 행동하더라도 그 모든 행동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것이죠. 복수는 바로 그 자신이니까요. 어쨌든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기에, 복수를 해야 할 대상으로서, 아니면 자신이 보상을 받아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해 줄 대상으로서의 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은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지기에 스스로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납득할 수가 없으니까요. 결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집착, 잃어버림을 인정할 수 없기에 그 잃어버린 순간의 기억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그는 이미 지나간 순간에 집착하기에, 아무것도 원래대로 온전했던 순간을 결코 얻지 못하는 현실, 그 허무 속에서 해매이게 됩니다.
지독히 허무한 현실, 집착은 또 다른 사랑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복수는 그 내면에 있어서 용서와 똑같이 온전함,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이 있기를 원하기에 나타나는 행동이니까요. 단지 그 사랑을 과거에 묶어 놓는가, 아니면 현재, 미래의 순간에 존재하도록 노력하는가의 차이가 복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겠죠. 결국 복수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지만... 자기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
그리고 그것은 그 복수를 바라보는 제3자,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영화관에 앉아 있는 관객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현상은 하나이지만, 그 현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그 현상은 무수한 의미를 지닌, 각자의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수를 보려는 자와 보여주려는 자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상황들을 받아들이죠.
.

복수...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에게 어떤 복수를 원했던 것일까요? 복수의 어떤 면에 주목하고 보여주려던 것일까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주었던 복수의 현실? 아니면 ‘올드보이’에서 보여주었던 복수의 내면적 구조? 복수 3부작의 완결편이라는 ‘친절한 금자씨’를 본 것은, 전편부터 이어져온 복수에 대한 감독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레임으로 지켜 본 금자씨는 무언가 2% 부족함을 안겨주었죠. 백선생에 대한 부모들의 복수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코미디 같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바로 그 2%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 사실 모든 것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감독도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죠. 다만, 가장 중요한 복수의 과정에서 보여진 영상은 그 모든 것들을 완성시키고, 이미지로서 형상화하는데 버거워 보이더군요. 영상이라는 매체로서 보여지는 이미지가 함축하게 될, 어쩌면 함축했어야 할 정보를 표현하고, 설득력있게 전달하는데 실패한 것이라고 본다고 하면 좀... 거만하게 보이려나... 아무튼 모든 주장과 정의가 그렇듯이, 복수라는 단어도 단순히 복수라는 사전적 정의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특히 영상과 같은 매체에서는 감독의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만으로 이미지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감독은 복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었던 걸까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에서 복수 자체는 결론이 아닙니다. 복수는 그저 ‘현상’이었고, 그 복수라는 ‘현상’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이 감독의 주된 관심사였죠.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주는 것은,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의 끊임없이 물고 물리는 복수입니다. 누나를 위해 신장을 팔다 사기를 당한 류, 류에게 ‘착한 유괴’를 제의하는 여자친구 영미, 류는 영미와 함께 동진의 딸 유선을 납치하지만, 류의 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자살을 합니다. 유선도 사고로 죽고, 그렇게 허무하게...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 기억들은 되돌려지지 않기에 복수는 시작되고, 그렇게 물고물리는 복수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죠. 류는 사건의 발단이 된 사기단에 복수하고, 동진이 류와 영미에게 복수하면, 영미와 친한 운동권 친구들이 동진에게 복수하고... 감독은 그 무한 반복되는 증오와 복수라는 현실, ‘현상’을 만들어내는 인간들 간의 ‘감정’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가감 없이 그저 보여주는 현실... 복수는 어쩌면 인간 자체였죠. 그 끊임없고 단순한 과정을 통해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 복수의 허무함은, 마치 현실에 대한 페러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반면에, ‘올드보이’는 복수의 원인을 찾는 과정 속에서 복수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유도 모른 체 15년간 감금된 대수가 복수를 다짐하며 찾아낸 현실은, 그것이 우진이 준비한 자신에 대한 복수였다는 사실이죠. 게다가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의 딸입니다. 마치 우진과 우진누나의 ‘부적절한’관계처럼... 복수의 상황은 또다시 재현되지만 복수는 단지 복수가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진의 복수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복수의 현상, 그 뒤편에 숨겨진 내면을 보여주고 있죠. 복수는 되찾을 수 없는 순간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전제로 합니다. 복수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자존의 한 형태이기도 한 것이죠. 하지만, ‘올드보이’는 자존의 실현보다 동일시를 통한 이해에 주목합니다. 물론 그 방법이 상당히 강압적이긴 해도... 하긴 그래서 복수인 것이지만, 복수도 자존의 한 형태일 뿐이기에, 자존이 충족될 수 있는 조건, 즉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복수의 무한반복은 멈추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복수’라는 것은 복수를 위해 나선 대수가 결국 우진의 복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주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식으로 서로 주고받는 복수나, 자업자득식의 사회정의를 뛰어넘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대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죠.
.

그렇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이 복수의 끝을 어떤 방법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걸까?
‘친절한 금자씨’가 보여주는 폐교에서의 복수장면은 친절하게도 복수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죠. 금자씨가 유괴당한 부모들에게 백 선생이 유괴아들을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면서 복수의 원인이 설명됩니다. 부모들은 실신하면서도 자신들의 그 피해를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지 서로 생각하고, 그렇게 부모들이 토론을 통해 복수를 선택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복수에 내재된 폭력성을 은근히 설명하죠. 이제 백 선생은 복수의 대상이 되고, 부모들은 살해당한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복수를 합니다. 복수란 결국 보상받지 못한 피해, 그 현실에 대한 피해자의 도전입니다. 물론 결코 승리할 수 없는 도전이긴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도전인 것이죠. 그렇게 모든 것은 간간히 나오는 나레이션처럼, 친절하게 복수의 과정을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하지만, 복수가 끝나면서 영화는 이전의 영화와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금자와 유괴아의 부모들이 백선생에게 복수를 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백선생에 대한 응징과 백선생에게 지불했던 돈을 되찾은 것 뿐, 아이들은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응징을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실현한 자신들의 의지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커리에서 금자가 자신의 케잌을 나눠주는 그때, 그들의 그 조촐한 파티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죽은 아이들과 대치되는 천사의 존재는 그들의 복수가 성공했음을, 그 복수가 정당했음을 넌지시 내비칩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자신에게 당당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천사에게 자신들의 행동을 인정받고, 승인 받아야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들이 승인 받으려 한 대상은 천사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입니다. 지금까지의 복수시리즈와는 달리, 인간의 실존 자체에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존재, 가치에 그 해결 가능성을 맡겨버린 것이죠. 아무리 그 비현실적인 환상 뒤에 아이들의 몸값으로 지불했던 돈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계좌번호를 적어주는 현실이 있어도, 그들의 복수는 현실성을 잃어버립니다. 게다가 현실에 도전하고 승리한 금자씨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끝나버린 복수, 하지만 금자는 순백의 캐잌에 얼굴을 파묻음으로써 복수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그녀는 승자이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 복수는 나쁜 것일까? 그리고 복수를 다 끝낸 금자씨를 보며 복수는 용서를 구해야 할, 그러나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나레이션을 들어야 합니다. 감독의 복수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이야기, 상식적으로 생각나는 복수의 결말이 준비되어 있었네요. 하긴 종종 거대한 담론이나, 이상은 현실 그 자체, 평범함 속에 있긴 하지만, 왠지 헐리우드의 권선징악적인 이야기 구조가 떠오르는 건 왜인지...
.

금자씨가 13년간 준비한 복수가 보여준 것은 무엇일까요? 복수란... 운명에 도전하고... 승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나쁜 그 무엇이었던 것일까? 복수라는 현상, 현실을 그런 선악의 이분법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가능하기는 합니다.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관점, 혹은 이 사회의 타부를 벗어나 내면의 실체를 바라보려 한다면? 바르트의 ‘신화’가 생각나는 건 우연일까? 하긴, 금자씨의 분간 안되는 선악의 내면연기처럼, 감독은 그런 것을 의도하지는 않았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극의 구조자체는 탄탄한 편이죠. 단지 감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호감이 가지 않을 뿐, 괜찮은 영화입니다. 그 안에서 보여지는 이미지가 감독이 말하는 복수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약한 점이 아쉬울 뿐이죠.

영화의 클라이멕스... 하지만, 저와 함께 했던 관객들은 대부분 영화에 몰입되지도 않았고, 어떤 이들은 백선생이 복수를 당하는 부분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기도 하더군요.
만약, 백 선생이 복수의 과정에서 팔 다리가 잘려지고, 온 교실 안이 피범벅에 살점들이 난무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리얼하고 자극적인 모습이 보여져도 관객들은 웃으면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자극의 강도에 따라서 부모들의 그런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이 한 인간이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현실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텐데... 복수의 과정에 대한 어정쩡한 묘사조차도 모두 용서받지 않았을까?

영상의 힘은 어디에서 얻어지는 걸까요? ‘보여진다’라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가 ‘보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보았다’는 것은 ‘보여지는’ 이미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으로써 ‘보여진다’란 이미지에 담긴 정보가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상의 힘이란 그 ‘보여진다’는 과정에서 의도된 정보들이 강렬한 자극으로 관객에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표현한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면에서, 아마도 친절한 금자씨는 그 자신이 복수의 클라이맥스에서 한 발 물러선 것처럼, 그 복수의 순간을 보여주기를 망설였던 것 같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이미지가 너무 하드코어적이어서 머뭇거린 걸까? 피를 뒤집어쓰고 기진맥진한 체 교실 문을 나서는 부모들과 대비를 이루며, 칼로 난자를 당하고, 도끼로 찍히면서도, 마지막 할머니가 들어갔다 나올 때 까지도 똑같은 모습으로 거의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백선생의 모습, 양복도 처음과 비슷하게 더 이상 찢어지지도 않고, 피범벅이 되지도 않고... 그렇게 너무도 멀쩡하게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는 없겠죠. 그렇게 멀쩡하게 힘찬 고함과 비명을 지르는 백선생에 비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가련한 부모님들...(비옷에 피범벅을 하고 나와 떨고있는 부모님들의 이미지는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생각되어 잔뜩 기대하며 다음 장면을 기다렸건만... 너무도 멀쩡한 백선생이라니... 그가 점점 피범벅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더라면, 그 가련한 부모님들의 겉모습과 대비되는 잔혹함으로 더욱 더 극명하게 인간의 존재를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긴 금자씨가 자신의 아이와 대화를 하기위해 백선생을 통역으로 쓸 때, 백선생의 그 소름끼치는 카리스마를 생각한다면, 금자씨나 부모님들이 왜소해 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려나... 아무튼 영화 속의 그 수많은 애피소드에도 불구하고 그 애피소드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주고, 힘을 만들어야 할 순간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불일치는 이 영화의 힘을 반감시켜 버린 것 같아 아쉽네요. 현실의 자질구레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모습들의 리얼함에 비해 너무도 리얼하지 못했던 복수의 이미지들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친절할 금자씨’는 영화 내내 친절하게 이야기구조를 통해 복수를 설명해주었지만, 이미지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

얼마 전, 한동안 회자되던 페덱스 광고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어떤 표현방법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죠. 아무런 카피도 필요없이 단지 페덱스 소포상자에 디에이치엘 소포상자를 집어넣음으로써 모든 것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내재된 모든 이야기들을 소화할 수 있는 이미지는 어쩌면 솔직하게 자신이 원하는 현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죠. 내재된 이야기, 기호로서의 기표와 기의는 단지 하나의 관점이고 방법론일 뿐입니다. 이미지는 분석되고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상에 대한 포착으로서의 이미지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네요.

"친절한 금자씨의 불친절"의 경우,
공공누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 이미지, 일러스트, 동영상 등의 일부 자료는
발행기관이 저작권 전부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있으므로, 자유롭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목록 버튼 이전 버튼 다음 버튼
최초 3개의 게시물은 임시로 내용 조회가 가능하며, 이후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 임시조회 게시글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