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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로서, 혹은 실존의 디자인

현대의 시작과 함께 디자인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오면서 수많은 유행과 주장들을 가져오고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사상이나 유행의 흐름들에 이름이 붙으면서 디자인의 역사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죠.
하지만 아직도 디자인이 탄생하던 시기, 반 데 벨데와 무테지우스의 반목처럼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한 편에서는 UD(Universal Design)를 주장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디자인이 가진 가능성을 추구하죠. 더 이상 서로 반목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지만, 그저 자신들의 관점만을 이야기할 뿐이죠.
유비쿼터스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유비쿼터스는 대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환경적 문제일 뿐이죠. 현재 한국에서 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니까요. 이미 경험했듯이 아무리 포토샾과 쿽을 깔아도 프로그램이 디자이너와 같은 퀄리티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현상은 우리 자신이면서도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느끼는... 자신의 심층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에 대한 증명이 너무도 막연하기 때문이겠죠. 그 무엇도 알 수 없고 결정할 수 없는, 마치 신학과 같이... 이성과 감성이라는 케케묵은 사고 속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내려가도 찾을 수 없는... 헤겔이 추구한 역설적 변증법의 종합과 같은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하긴 그건 정치를 위한 학술의 프로파간다였으니까... 결국 인간은 그저 인간이면서도 인간이기 위해서는 지독히 정치적이어야만 합니다. 삶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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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는 여러 가지 마우스들이 존재하고, 단순히 재미를 위해 고추마우스를 선택해서 사용한다고 해도, 그 선택을 통해 이미 자신은 ‘나는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이다’라는 것을 선언하게 됩니다. 단순한 즐거움? 그러나 즐거움이라는 자신의 취향을 선택함으로써 이미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의 결정은 자신만의 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죠. 자신의 선택 속에서도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자신이 사용하는 마우스를 보고, ‘한 물 간 유행이네?’라고 말 해 버리면 새로운 마우스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하죠. 유행을 따를 것인가? 아님 그냥 사용하다가 유행도 따라가지 못하는 아저씨가 될 것인가? ‘유행 따위가 다 뭐야?’라고 당당하게 외쳐도 주변 사람들의 호응이 없다면, 꽉 막힌 혹은 궁색한 변명이 됩니다. 만약 유행이라는 바람을 타게만 된다면, 고추나 비너스의 토르소 그리고 스크림 마우스처럼 보기에도 사용하기 불편한 마우스도 소장품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고 날개달린 듯 판매 되겠죠.이렇게 재미를 추구하다보면, 오히려 UD는 철없는 꼬마나 할머니를 연상하게 되어 기피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UD가 생각하는 고객들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기에 UD제품을 구입하면 자신이 소외 대상이 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니까요.
인간은 그렇게 선택이라는 행동을 통해 ‘나는 이런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나의 취향과 계급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합니다. ‘정치적’이란 그렇게 선택의 다양함이라는 이름 속에 숨어 나타나죠.
그리고 디자인의 의미는 그 수많은 다름의 모호함 속으로 스며들어가죠. 나는 항상 마우스와 같은 무엇인가를 고르지만, 정말 나에게 마우스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사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타부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선택이라는 행동은 절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이 세상의 게임이 돌아가니까요.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우스를 사는 사람의 순수한 결정이어야 하고, 그래서 더 값진 선택이어야 하죠. 물론 누구나 수긍하지만, 누구도 믿지 않는... 한때 시뮬라시옹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모호함, 이념이 아니어도 가질 수밖에 없는 개체의 정치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체와 주체의 관계를 표현할 이렇다할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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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은 다름을 전제로 실존하는 ‘나’입니다.
그리고 그 다름의 ‘나’를 바라보는 방식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디자인은 ‘나’에 대한 각각의 다름 속에서 나타납니다. 똘레랑스... 하지만 현실은 동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민주주의의 껍질을 벗은 자본주의 속에서 다름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 까요? 그렇기에 모두가 다름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정당성만을 이야기 합니다. 포스트 모던은 단순한 자포자기의 나르시즘일까? 순수하지 못했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러나, 이상이 아닌 힘에 대한 추구, 그 현상 자체는... 현실이었죠. 뭐가 뭔지 모르겠는 현실... 그 현상 속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각자의 이야기들 속으로 빠져들수록 전시회장에 진열된 작품을 보듯이, 백화점에 가기 위해 화장을 하듯이 서서히 자기암시에 빠져 각자의 세계관 속으로 함몰 되어 버리죠.
디자인은 단지 그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여 주는’ 매체로 작용하지만, 그럼으로써 자신의 매체적 특성에 숨은 의미가 그 자체로 ‘보여 지게’ 됩니다. 디자인의 이미지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다만 각자의 다름 속에서 디자인의 ‘보여 주기’위한 이미지는 그저 ‘보여 지게’되고. 디자인의 이미지를 매개로 그렇게 서로의 모습은 중첩되어 갑니다.
그렇기에 디자인은 희망일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아주 느리지만... 이노센트에 찬조출연(?)한 ‘소위’처럼 모든 시스템에 스며들어간 그럼에도 어디에도 실체가 없는 ‘나’의 존재... 어쨌든 존재라는 것 자체는 남았네요. 마치 고대의 아톰과 같은 모습으로... 미래의 현실은 이제 신화를 벗어나 스스로가 신이 된 듯이 거들먹거리지만, 현재는 아직도 가능성으로 주위를 맴돕니다. 그리고 디자인은 그 가능성으로서 마치 ‘소위’의 잔재처럼 우리 주위를 맴돕니다.
해결된 것은? 디자인은 무엇일까?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마와 루이스처럼 극단을 치닫지 않는 한, 모든 것은 지속됩니다. 삶이 끝날 때까지 손끝의 촉각만이 남더라도, 우리는 ‘보여 주고’ 그럼으로써 ‘보여 지는’ 디자인을 ‘바라 보며’ 살아가죠. 그리고 그 지속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발견합니다.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회귀의 알고리즘만이 지속적으로 바뀌어가겠죠.

시계가 돌아가는 한 계속 뜀박질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시계남자처럼 그렇게 뛰어다녀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계와 인간의 형상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뒤샹 이후로 거의 한 세기 동안 교육받은 현재, 어떤 이야기나 개연성이 없어도 그저 보고 즐기고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은 그렇게 ‘보여 지고’ ‘보여 주게’되는 현실의 시간 그 흐름 속에 모든 것들을 담아놓고 계속해서 물어보겠죠.
“넌 무얼 보려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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