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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에 대하여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바라봅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할 것인지 생각하며 끊임없이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생각들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냅니다. 내 손에 딱 맞는 돌도끼를 만들기도 하고 저 하늘 너머에 우주정거장을 만들기도 합니다. 디자인이란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인간에 의해, 그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 집니다. 단순히 예쁘게 장식된 제품만이 아니라 그런 제품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행동까지도 아우르는 개념이 디자인인 겁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제품의 형태나 제품을 만드는 인간의 행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행동과 그 결과로서 만들어진 제품은 디자인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이런 저런 물건들을 만들어냅니다. 디자인을 만드는 행동이 디자인된 형태를 남겨놓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겨진 디자인의 형태는 다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되고, 인간은 새롭게 변한 이 세계를 또 다시 디자인합니다. 디자인은 인간의 행동이 디자인의 형태를 만들고 디자인의 형태가 다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 즉 행동과 형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그 자체이지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겁니다.
물론 이 현상의 주체는 그 무엇도 아닌 인간입니다. 인간 홀로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인간이 없으면 디자인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디자인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디자인을 만드는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홀로 지내기보다는 함께 모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모여 관계를 맺어가며 자신을 만들고 디자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는 좀 더 편리하게, 생산자는 좀 더 수익률이 높게, 그리고 디자이너는 좀 더 아름답게 디자인을 만들려고 하는 식입니다. 덕분에 인간은 디자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서로 얽히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하지만 완전하게는 반영되지 않는 디자인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디자인은 인간과 환경,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현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때문에 디자인의 주체는 인간일지라도 우리가 우리 맘대로 디자인을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만들지만 우리 맘대로 통제할 수는 없기에, 디자인은 우리의 삶을 위한 단순한 도구나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현상이 됩니다. 마치 신호등을 만든 것은 우리지만 우리가 신호등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것처럼, 디자인의 주체는 우리일지라도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존재와 그 형태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소유할 수 없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디자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존적 사건이거나 무한한 가능성과 생명력을 가진 인격적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자유롭게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만들어졌던 이메일로 스펨메일이 쏟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다지 꺼려지지도 않는 현상, 그러나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존재... 마치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있는 디자인 자체와 마주할 생각보다는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그 관계의 흔적, 디자인의 형태에만 얽매여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며 그 환경과 대화를 하기 보다는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디자인 이론과 형태만을 우리와 환경에 강요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디자인, 우리가 정답이라고 믿고 있는 디자인은 단지 디자인의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선택된 하나의 형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만이 진정한 디자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디자인인 겁니다. 진정한 디자인, 혹은 ‘굿 디자인’이란 없습니다. 결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디자인을 만드는 인간, 그 인간이 무엇인가를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푸른 하늘, 흰 구름 위로 주황색 비행기가 날아간다고 생각해 보죠. 상황은 단 하나입니다. 흰 구름 위로 주황색 비행기가 날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는 각자 자신이 바라본 서로 다른 이미지가 담겨집니다. 비행기 조종사의 눈에는 앞의 푸른 하늘이, 탑승객의 눈에는 옆의 구름바다가 그리고 관제사의 눈에는 저 하늘 위를 날아가는 주황색 비행기가 들어옵니다. 단 하나의 상황이 있을 뿐이지만 각자의 눈에는 단편적인 이미지,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는 듯한 불완전한 일부분만이 비춰집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눈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시각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겁니다. 물론 자신이 본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자신이 본 이미지를 기준으로 짐작하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지 틀린 믿음은 아니지만, 맞는 생각도 아닌 셈입니다. 자신이 본 이미지가 진실일지라도 자신의 진실 너머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으니까요.
카이사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보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밖에 보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는 있어도, 모든 걸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아무리 자유롭게 이것저것 바라보아도 자신이 바라본 거기까지, 자신의 눈에 들어온 거기까지가 자신이 볼 수 있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이미지의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는 그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을지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저 하늘 너머의 광대한 우주를 바라 볼 수는 있어도 정작 자신은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은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카이사르의 말처럼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 안에서 맴돌며 자신의 눈에 들어온 이미지만을 진실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을 진실로 여기며 그 진실을 바라보는 내가 있음을, 그런 내가 있기에 내가 눈을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이미지, 진실이 바뀔 수 있음은 간과해 버리곤 합니다.
눈의 한계, 자신의 불완전함을 모르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을 느끼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완전한 내가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디자인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분석하고 정의하여 그 사물을 자신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려는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고 만족하려는 인간의 마음, 혹은 그런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 사실에 안도감을 얻으려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현상인 겁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 자신이 디자인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보이는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자신의 눈으로 바라 볼 수 없는 현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정면으로 이겨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에 띠지 않는 그 어딘가에서 자신을 바라는 존재가 있다면 자신은 그의 도구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인지 우리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보려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단지 노력만 하는 게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바라볼수록 자신이 바라본 이미지만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만큼 또 다른 진실들을 거부해 버립니다. 아무리 남들보다 많이 볼 수 있어도 내가 볼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진실, 그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미지를 진실로 만들어 왔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가톨릭의 ‘천년왕국’,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맑스의 ‘노동해방’ 그리고 현대의 ‘소비자본’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자신이 바라본 이미지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자신만의 이미지,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가르고 자신의 이상에 벗어나는 이미지들을 악으로 치부하며 배척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의 현실,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하게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 극복해야 할 상황 혹은 시련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이상, 그런 기준이 될만한 이미지가 없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비행기처럼 비행기가 날아가는 상황은 실재해도, 우리는 단지 그 상황의 일부분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미지는 옛날 옛적 해적들이 찾아 헤매던 황금의 땅 엘도라도와 마찬가지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가 본적이 없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땅, 그래서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환상의 세계인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디자인은 그런 엘도라도의 환상을 재현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마치 4~50년대 미국의 유선형 디자인처럼 행복이 가득한 미래, 그러나 밀레니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런 유토피아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유토피아의 환상적인 이미지는 재현될 수 있지만, 환상 자체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본 이미지, 인간의 행복이라는 유토피아의 환상만이 보여 지는 현실... 그런 현실만이 전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본 이미지, 우리가 꿈꾸는 진실은 현실의 부조리를 감추기 위한 거짓에 불과합니다.
넓게 퍼져가는 도시와 점점 더 높아지는 빌딩들, 그 속의 수많은 장치와 도구들은 모두 자본과 효율을 추구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편리함이나 쾌적함, 아름다움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내세우며 디자인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많은 이념과 유행들 속에서도 디자인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디자인된 도시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행복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손에 잡히는 행복, 소유할 수 있는 행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마 ‘행복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디자인된 제품’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디자인의 형태가 아니라 디자인을 만들고 사용하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행복이란 일상 속에서 문득 행복한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느끼는 순간... 그렇게 스쳐가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디자인이 그 자체로 허무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유토피아의 환상만 보여주기에 결국 거짓에 불과한 디자인... 그런 디자인일지라도 그 거짓을 보여주는 디자인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진실이기도 합니다.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거짓이 될 수도 있기에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자신이 바라본 지점에서는 진실이기도 한 디자인, 전부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니기에 그럭저럭 순응할 수 있는 디자인...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디자인 속에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영화 메트릭스처럼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그 허구적인 세계가 우리의 모든 것, 현실이자 진실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디자인을 통해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각자의 조각을 퍼즐 맞추듯이 맞추려 해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자신만의 환상을 믿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환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환상을 믿어야 합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없다면 이 세계는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유토피아라는 거짓된 진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조차 또 다른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마치 호접몽처럼...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그 진실을 진실로 믿으려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을 뿐입니다. 무엇인가를 믿는 마음, 무엇을 믿는지가 문제이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유토피아가 거짓이어도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환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환상을 믿을 수밖에 없는 나, 그런 현실의 나를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해 내일 당장 일손을 놓는다면 그 다음 결과는 뻔 한 거죠. 유토피아가 없음을 안다고 해서 유토피아의 환상을 현실화시키려는 노력마저 포기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모습까지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 유토피아가 없다는 진실을 알면서도 유토피아를 찾아 해매야 하는 상황은 원본 없이 복제와 재복제만이 반복되는 상황, ‘시뮬라시옹’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는 거짓이 거짓을 만들어내며 진실처럼 행세하는 ‘시뮬라크르’를 근원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닌 환상만이 존재하는 현실, 거짓이 거짓을 만들어내는 현상 속에서 디자인이 만들어집니다.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주어진 현실을 바라보는 나, 나의 의지가 무엇이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대량생산이 시작되고 디자인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시작된 다툼, 무테지우스와 반 데 벨데의 반목에서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대립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문제는 아직도 끝이 날 줄 모릅니다. 우리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면서도 인간의 감수성과 문명의 합리성이 가지고 있는 차이, 즉 기계를 인간에 맞출 것인가, 인간을 기계에 맞출 것인가를 놓고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맞는지 틀린지를 가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마치 닭과 달걀의 우화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죠. 닭이 있었기에 달걀이 만들어진 것일까, 아님 달걀이 있었기에 닭이 태어났던 것일까? 그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한 문제이고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닭과 달걀의 시초를 보지 못한 현실에서, 우리는 단지 현재의 우리를 보며 그 당시를 상상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무엇이 먼저냐’라는 물음에 얽매여 물음 자체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제의 옳고 그름에만 매달려 온갖 상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제의 답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내가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결코 정답을 맞힐 수 없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실과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 해매는 우리가 있다는 사실, 닭과 달걀을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현재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벌써 반병이나 마셨고, 손님의 입장에서는 아직 반병이나 남았다”는 ‘시바스리갈’의 광고카피처럼 우리에겐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할 뿐, 주어진 현실의 뒤편에 숨어있는 진실이 무엇이냐는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유토피아의 환상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문제는 유토피아의 환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유토피아의 환상을 디자인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유토피아의 환상만이 존재할지라도 우리는 그 환상을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환상으로 디자인해 내면서 그 환상을 찾아가는 과정 그 순간들에 솔직해 지도록, 행복해 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디자인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나의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디자인은 인간과 환경, 인간과 인간이 맺어가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각자가 주체이지만 아무도 주체일 수 없는 모호한 관계,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현실 속에 디자인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디자인이 나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디자인 속에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딱 그 만큼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긴 해도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이 키운 능력만큼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디자인은 우리 모두가 만들어내지만 내가 없다면 나에게 디자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디자인, 우리의 디자인은 스스로 우리 자신만의 디자인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하는 건 우리 자신인데, 정작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를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남들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디자인을 뛰어넘을 것인가만 생각할 뿐, 아름다운 디자인이 왜 필요한지 무엇이 아름다움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대한민국을 디자인하면서도 정작 미국이나 일본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세계를 카피하며 미국적 혹은 일본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만의 디자인을 만들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아름다워 보이는 디자인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증명해 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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