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Mark Bradford)의 개인전 Keep Walking이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브래드포드는 사회적 메시지를 대형 추상 회화로 표현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전단지, 포스터, 신문지 등 일상적인 재료를 겹겹이 쌓고, 찢고, 긁어내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사호의 취약한 부분과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이번 전시는 마크 브래드포드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회화, 영상, 설치 작품은 물론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에 맞춰 새롭게 제작된 신작까지 포함해 약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미지 출처 : 서민정
마크 브래드포드는 196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 지역에서 태어나서, 현재까지 그곳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의 이야기를 접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예술 세계의 근간이 되었다. 31세에 본격적으로 예술 공부를 시작한 그는 현재 세계적인 추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흑인이자 동성애자, 도시 하층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종, 계층, 젠더 등 사회적 이슈를 추상회화로 표현한다. 그는 광고지, 포스터, 상업용 인쇄물, 낡은 종이 등을 수집해 여러 겹으로 붙이고, 긁어내며 다시 덧붙이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도시의 현실과 역사를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브래드포드는 회화의 재료와 질감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구현하는 ‘사회적 추상화(social abstraction)’의 영역을 개척하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 제목이나 삽입된 문구들은 실제 인물, 영화, 문학작품 등에서 인용된 경우가 많아, 그 출처와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 또한 작품 감상의 흥미로운 요소가 된다.
전시는 바닥을 가득 채운 대형 설치 작품 ‘떠오르다(Float, 2019)’로 시작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종이들을 겹겹이 쌓고 끈으로 연결해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은 대규모 설치물이다. 약 600㎡ 규모의 작품으로, 작가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 다채로운 색상의 종이를 길게 재단한 뒤 노끈으로 이어 붙여 완성했다. 2015년에 선보였던 천장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형태의 작품 ‘폭포(Waterfall)’에서 발전된 형태로, 관람객이 직접 작품 위를 걸으며 그 질감을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종이들은 미세하게 닳고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작품은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고 완성된다.
떠오르다(Float, 2019), 이미지 출처 : 서민정
떠오르다(Float, 2019),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엔드페이퍼(파마 용지, end papers)’ 연작은 마크 브래드포드의 첫 번째 작업이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보았던 파마용 종이(end paper)를 태우고 붙여 작품을 만들었다. 반투명한 종이의 가장자리를 토치로 그을려 검은 테두리를 만든 뒤, 이를 캔버스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하고, 그 위에 다시 페인팅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회화와 콜라주를 결합했다. 이 연작은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한 환경과 노동, 흑인 커뮤니티 공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엔드페이퍼 연작,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엔드페이퍼 연작,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엔드 페이퍼와 신문지를 이용한 작품 ‘파랑(Blue, 2005)’은 겹겹이 쌓은 엔드페이퍼 위에 파란색 스텐실로 지도의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신문지를 덧붙여 항공사진을 연상케 하는 도시의 블록을 재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개인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엔드페이퍼와 공공의 기록을 의미하는 신문지를 결합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아름다움과 폭력이라는 이중적인 세계를 중첩하여 표현했다. 또한 파란색을 사용하여 흑인 커뮤니티가 겪어온 슬픔과 상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다양한 재료와 기법이 레이어링을 통해 사회적 기억과 개인적 서사가 교차하는 복합적인 미학을 구현하였다.
파랑(Blue, 200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파랑(Blue, 200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전시장 바닥에 누워있는 조각 작품은 작가의 신체를 본떠 32% 확대 제작한 조형물이다. 이 작품은 1990년대 뉴욕 볼룸 문화(Ballroom Culture)의 상징적인 동작과, 작가가 12세 때 촬영한 동명의 영상을 참조해 만들어졌다. 볼룸 문화에서 ’데스드롭(Death Drop)’은 극적으로 드러내는 강렬하고 표현적인 퍼포먼스 동작을 의미한다. 한편, 작가의 어린 시절 영상은 총격을 당한 듯 뒤로 넘어지는 장면을 재현하며, 사회적 폭력과 취약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삶에서 가장 연약했던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다’라는 회복과 강인함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데스 드롭 (Death Drop, 2023),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작품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2023)’은 미국의 역사와 도시의 변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다룬 작품이다. ‘Manifest Destiny’는 1800년대 미국에서 자주 사용되던 용어로, ‘미국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신이 내린 운명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는 이 표현을 작품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운명’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폭력, 인종차별, 도시 개발로 인한 희생과 배제의 역사를 드러내고자 했다. 3개의 캔버스에 적힌 ‘Jonny buys house(조니가 집을 삽니다)’라는 문구의 Jonny는 백인 중산층, 부유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이 낡은 지역에 들어와 집을 사고 개발을 시작하면 원래 그곳에 살던 흑인, 라틴계 저소득층 주민들이 밀려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2023), 이미지 출처 : 서민정
검정색 시트지 같은 재료로 벽면을 완전히 뒤덮은 공간은 작품 ‘타오르는 피노키오(Pinocchio Is On Fire, 2010)’다. 19세기 고전 소설인 ‘피노키오의 모험’과 미국 R&B 가수 팬더그래스(Pendergrass, 1950 – 2010)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다. 피노키오가 상징하는 거짓말과 진실의 이중성, 그리고 강인한 흑인 남성성을 대표했던 팬더그래스가 1982년 교통사고 당시, 트랜스젠더 성노동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촉발된 사회적 논란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해 전실, 정체성, 사회적 시선의 불안정함을 탐구하며, 공적 이미지와 개인의 실체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고자 했다.
타오르는 피노키오(Pinocchio Is On Fire, 2010), 이미지 출처 : 서민정
넓은 전시장 중앙에 서로 다른 크기의 지구본 7개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표면이 검게 그을리거나 불에 탄 듯한 질감을 지닌 이 지구본들은 불타버린 대륙과 바다, 즉 파괴된 세계의 모습을 상징한다. 각기 다른 질감과 크기가 서로 다른 행성들은 불균형과 고립, 그리고 심화되는 생태 위기 속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지구의 현실을 반영하며, “우리는 같은 행성에 살고 있지만,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 제목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He Would See This Country Burn if He Could be King of the Ashes, 2019)’에서 알 수 있듯이, 극단적인 권력욕이 정치적 몰락과 파괴를 가져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He Would See This Country Burn if He Could be King of the Ashes, 2019),
이미지 출처 : 서민정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 (He Would See This Country Burn if He Could be King of the Ashes, 2019),
이미지 출처 : 서민정
‘기차 시간표’ 시리즈는 인종 차별을 피해 약 600만 명의 흑인들이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했던 대이주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작가는 실제 기차 시간표의 형식을 차용하여,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작품은 차별과 억압, 갈등이 심할수록 사회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빠르게 소진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겹겹이 쌓이고 벗겨진 표면은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역사적 풍경을 드러내며, 이주 과정에서 겪은 상실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전시장에는 작품과 함께 1901년 당시 실제 기차 시간표 이미지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The Air Was Worn Out, 202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공기가 다 닳아 있었다(The Air Was Worn Out, 202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핑크 레이디(Pink Lady, 202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이미지 출처 : 서민정
검은 벽지와 종이 표면을 산화시켜 만들어낸 금빛 무늬로 전시장 전체를 뒤덮고, 그 안에 7점의 대형 회화 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2025)’이다. 작가는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다가 처벌받은 인물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드래그 퀸(Queen of Drag)으로 알려진 윌리엄 도어시 스완(William Dorsey Swann, 1858–1925)의 삶을 병치시켰다. 작품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 재해와 사회적 편견이 만들어낸 인간의 고통을 동시에 드러낸다. 어두운 색조와 거칠게 산화된 표면은 폭풍이 몰려오는 듯한 긴장감과 묵직한 에너지로 공간을 압도한다.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폭풍이 몰려온다(Here Comes the Hurricane, 2025), 이미지 출처 : 서민정
장 소 :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100)
기 간 : 2025년 8월 1일 - 2026년 1월 25일
시 간 : 오전 10시 - 오후 6시 (월요일 휴관)
가 격 : 성인 16,000원 / 대학생, 청소년 : 13,000원 / 국가유공자, 장애인, 3-6세 : 8,000원
예 약 : https://apma.amorepacific.com/index.do
참고 자료
아모레퍼시픽 뮤지엄 : https://apma.amorepacific.com/
Hauserwirth : https://www.hauserwirth.com/
-성신여자대학교 통계학과 학사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의류환경학과 석사 졸업
-트렌드 분석 및 컨설팅 회사 인터패션플래닝, 트렌드 분석 연구원 및 컨설턴트
(현) 시선인터내셔널 미샤 정보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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