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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모델은 내가 될 수 없다.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눈에 띠는 광고포스터를 보게 될 때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면 예쁜 얼굴, 멋진 표정, 갖가지 몸짓들을 보여주며 ‘나를 따라 해봐요. 이렇게...’라고 이야기하는 모델들을 만나게 됩니다. 광고 속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화려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죠. 우아한 자태의 어머니는 유비쿼터스 가구가 놓인 넓은 아파트의 품격을 뽐내고, 인자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중년의 아버지는 중후한 멋이 돋보이는 고급 승용차를 운전합니다. 아들은 새로운 핸드폰을 선보이며 댄스 베틀을 벌이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딸은 도도하고 앙증맞게 쇼핑을 즐깁니다. 마치 한 가족 같은 이들의 행복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이상적인 삶과 행복은 갖가지 보험이 완벽하게 보장해 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련된 도시를 신비롭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저 환상적인 모델들과 반쯤 소파에 기댄 채 텔레비전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는 어느 백수의 현실 사이에는 너무도 깊고 거대한 절벽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밀린 카드 값을 막기에도 벅찬 일상을 생각하면 그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개그가 되어 버리니까요.

@ 광고 속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어느새 거실은 어둑어둑해지고 마치 애국가가 울려 퍼질 듯한 분위기가 되어도 내 눈은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 그리고 저 환상적인 광고 속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미소를 바라보며 그저 함께 따라 웃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광고 속 모델조차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내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내가 나를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제나 행복한 광고 속 모델을 ‘나’라고 느끼는 순간, 현실의 나는 광고 속에서 웃고 있는 또 다른 ‘내’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뒷면
이런 저런 제품들을 들고 나와, 자랑스럽게 ‘나는 나’라고 ‘나는 이런 저런 누구’라고 외치는 광고 모델들은 왠지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저 제품만 산다면 나도 저렇게 멋지게 변할 것만 같습니다. 나에겐 단지 눈앞에 보이는 그 집, 그 자동차, 그 보험이 아직 없을 뿐입니다. 삶에 찌든 나를 구원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광고 속 그 제품만 사면 그 모델의 이미지, 거울 속의 ‘나’는 진짜 내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내 손에 크레디트 카드가 쥐어져 있는 한 눈앞의 환상은 아주 손쉽게 가질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다.1)
하지만 아무리 광고 속 제품을 사도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구의 한 구석, 약 4천800만 정도가 모여 살아가는 대한민국에 어느 날 ‘행복한 나’를 선전하는 핸드폰 광고가 잘 되어 4천800만대의 똑같은 핸드폰이 팔렸다고 가정해 보죠. 모두 똑같은 하나의 ‘행복한 나’를 샀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내’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는 ‘행복한 나’라는 단 하나의 인격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왠지 그 핸드폰만 가지면 현실의 나도 광고 속에 보이는 ‘나’처럼 행복해 질 것 같지만 막상 그 핸드폰을 사서 손에 쥐어 본들 나는 여전히 나일뿐입니다.
광고 속 모델은 모델이고 나는 나입니다. 어차피 광고 속의 환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 신고 있는 신발, 매고 있는 가방은 어느 광고에선가 본 제품들인 것 같은데, 그 광고 속에서 보았던 멋진 분위기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하긴 광고 모델조차 일상생활에서 만나면 그다지 신비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조명과 카메라, 포토샾으로 만들어진 신데렐라는 조명이 꺼지고 나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뿐입니다.

그래도 광고는 신데렐라의 환상을 보여주고 광고를 바라보는 나는 신데렐라를 꿈꾸게 됩니다. 광고 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혼동해 버리고, 나의 꿈을 비춰주는 그 이미지들 속에서 어디에도 없는 ‘나’를 찾아 헤매야 합니다. 이미지의 환상에 사로잡히면 나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처럼 되어 버리는지도 모릅니다. 나르시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소년...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연못의 수면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그 허상을 잡으려 허우적대다 결국 연못 속에 빠져버린 그 소년처럼 우리는 광고 속의 매혹적인 ‘나’를 바라보다 현실의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 일상을 유혹하는 광고의 환상
광고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고는 사람들의 소비력을 배양한다. 보다 좋은 집, 보다 좋은 옷, 자기와 가족을 위해서 보다 좋은 식품을 얻으려는 욕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개인의 노력을 자극하여 보다 큰 생산을 촉구하는 것이다” 광고가 사람들의 욕망과 관계되어 있음을, 욕망을 자극하고 그 욕망을 토대로 원활한 소비를 가능케 하는 것임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한 말은 없겠죠.
그러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그다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무조건 유행을 따르라고 강요하다고 해서 유행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가치 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 욕망이 없이는 유행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성공한 광고인 중 한명이었던 데이비드 오길비는 ‘어느 광고인의 고백’에서 성실과 정직, 품위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광고를 하라고 조언합니다. 그가 “소비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당신의 아내입니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만큼 소비자가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라는 의미에서였습니다.
물론 요즘은 전통적 가치라는 답답함을 벗어나 ‘재미있지? 멋지지? 이 제품만 사면 그렇게 즐겁고 행복해 질 거야!’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재미와 멋을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소비자가 그만큼 재미와 멋을 즐길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재미있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상대방을 존중하는 만큼 자신도 가치 있고 존중받을 만한 존재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광고 자체를 따진다면 광고는 지금처럼 비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그러니 그만큼 가꾸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비자로서는 오히려 아름다운 광고, 우리의 가치를 알려주는 광고가 고맙기까지 합니다. 모두가 자신이 소중한 존재이길 바라지만, 모두가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음에 좌절해야 하는 현실에서 광고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광고는 오아시스가 아닌 신기루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광고는 일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나의 욕망이 만들어낸 나의 허상일 뿐입니다. 광고가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의 나는 그다지 관련이 없습니다. 광고의 환상은 결코 현실의 일상과 똑같아질 수 없습니다. 광고에서 미니를 보고, 미니가 보여주는 온갖 매력과 환상에 빠져 미니를 샀다고 치죠. 이제 난 주위사람들에게 은근히 미니를 자랑할 수 있는 몇 달이라는 시간과, 몇 년 안지나 여기저기 고장이 날 자동차 그리고 그렇게 고물자동차가 될 때까지 함께할 추억을 산 셈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미니의 환상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만날 시간, 애인과 사랑을 속삭일 시간에 월차와 년차를 반납하고 야근을 한 후 피곤에 절은 몸으로 퇴근해 쓰러져 자야 합니다. 광고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나의 이미지를 가지기 위해서는 현실의 나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미니에 올라타는 순간, 그 작고 앙증맞은 형태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가려 버립니다. 미니를 운전하는 나의 모습은 주위사람들에게 나의 미적 감각과 취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보여주지만 나의 인격, 평소 생각이나 습관 등은 보여 줄 수가 없습니다. 미니를 통해 나를 표현할 수는 있어도 미니가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내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왠지 주객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나’조차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나’는 광고가 보여주는 환상뿐입니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이 우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이고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나이지만 결국은 광고가 보여주는 얼마 안 되는 제품들을 구매하는 것 외에는 나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제품의 이미지 뒤로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울지도 모르지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 이미지에 나의 모습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아침 출근 길 세련된 나만의 미니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자신이 운전하는 것과 똑같은 미니를 발견한다면 그 때의 기분은 어떨까요? 미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니에서 내려 북적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그저 나와 똑같은 옷에 똑같은 가방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환경의 사무실에서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나의 일상입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이렇게 숨쉬는 내가 있는데... 나는 없습니다.
광고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광고 속에서 보여 지는 환상은 그저 예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렇게 스쳐가는 이야기들 중에서 평소 자신이 꿈꾸던 환상을 발견하게 되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릴 뿐입니다. 평소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난 나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미니를 보고 미니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리는 순간, 나에게는 오직 광고 속에서 보았던 그 미니만이 나의 자동차, 나의 기준, 내 삶의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든지 간에 내가 미니를 살 수 있느냐 없느냐,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이제까지의 내 삶이 평가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지만 나의 기준은 미니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페라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소나타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광고에 홀린 나에겐 오직 그 제품만이 나의 절대적 기준이 되지만 사실 모든 제품은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한 거죠. 그러나 그 상대성은 상대성으로 그냥 남겨지지 않습니다. ‘이게 너야’를 외치는 미니의 광고가 내 삶의 기준이 되듯이, 각자의 기준도 다시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가치와 서열로 정리 되어버립니다. 웬일인지 친구들끼리라도 만나면 각자의 기준은 보다 좋은, 보다 멋진, 보다 새로운 이라는 기준, 즉 유행에 따라 서열이 만들어집니다. 아무리 내 맘에 딱 맞는 핸드폰이라도 구입한지 일년 넘게 사용했다면 이 녀석은 친구들 앞에 있을 때는 배터리가 꺼진 채 조용히 주머니 속에 숨어 DMB폰으로 변신하는 꿈만 꾸어야 합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잘나고 못난 것이 가려져 버립니다. 그리고 왠지 유행을 따라야 할 것 같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2)

@ 환상속의 그대를 만들어내는 디자인
광고가 소비자의 가치를 알리고 유행을 만든다면, 디자인은 제품의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광고가 이 제품이 사용할 만하다고, 당신은 이정도 품격은 가져야 한다고 속삭인다면 디자인은 그 제품의 품격과 가치, 남들과 구별되는 차이를 직접 만들어 냅니다. 광고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역할이라면 디자인은 그 욕망의 원동력, 현대가 필요로 하는 ‘보다 좋은’이라는 가치, 그 환상을 직접 만들어내는 겁니다.

증기기관차처럼 제품의 기능이 겉모습에 그대로 드러나던 시대는 이미 옛날 옛적의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사람 팔뚝만한 무전기를 만들던 시대가 구석기 시대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조그만 네모박스 안에 모든 부속품을 집어넣거나 반대로 아주 간단한 기능도 갖가지 요란한 형상으로 꾸밀 수 있는 현재 디자인은 자유롭습니다. 미키마우스 모양을 한 시계나 권총 모양을 한 가스라이터처럼 디자인은 이제 자신의 본래 기능을 떠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 재치와 유머 혹은 위엄을 만들어낼 수 있고 또 실재로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전보다 더 자유롭게 디자인 할 수 있는 현재, 제품의 기능을 숨기거나 설명해 주는 건 오직 디자인에 달려 있습니다. 디자인만이 그 제품의 성격과 가치를 드러내 줍니다. 이젠 제품의 기능과 품질도 디자인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디자인이 없다면, 디자인이 그 제품의 가치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제품의 품질이나 광고는 하나마나입니다. 때문에 디자인은 더욱 세련되고 더 멋진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디자이너는 그 제품의 성능을 넘어서는 품격을 만들어내야 하죠. 다른 제품과 비슷한 수준의 성능이라면 더 멋진 디자인을 찾고, 아무리 좋은 성능의 제품이라도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으면 살 생각을 안 하는 게 소비자니까요.
사실 제품의 성능은 사용하기 전까지 알 수도 없고, 사용한다 해도 내겐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얼마나 좋은 건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에 비해 디자인은 생긴 모습 그대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힙니다. 성능은 잘 몰라도 보는 즉시, 만지는 즉시 제품의 질과 감이 느껴집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처럼, 디자인이 멋지면 멋질수록 그 제품의 성능은 더욱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멋에 대한 뚜렷한 기준은 없어도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멋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디자인이 멋지면 멋질수록 제품은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이 현실 속에서는 디자인의 가치가 올라가면 갈수록 그 제품의 가격도 올라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디자인이 좋으면 좋을수록 보통 사람들은 그저 구경만 하며 속을 태워야 합니다. 반대로 아무나 함부로 살 수 없는 디자인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남보다 뛰어난 사람, 우월한 사람, 존중받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까지도 사게 됩니다. 그 기분을 사는 건 너무도 쉽습니다. 단지 돈만 있다면 가능하니까요. 그래서 보통은 돈으로 온 세상을 사버리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텅 빈 지갑을 바라보며 한숨만 쉴 수밖에 없습니다.
광고가 보여주는 제품을 가질 수만 있다면 나는 광고 속 ‘나’처럼 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폭스바겐이나 미니는 고사하고, 조그마한 초콜릿 폰조차 없습니다. 그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행복하지만 현실속의 나는 이 자본주의 사회를 따라가지 않는 한, 내가 될 수조차 없죠.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생산 혹은 소비의 문화 속에서 나는 언제나 무슨 이유인지 모를 허전함과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발전의 속도를 가속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피곤을 느끼고 따라가는 데 지쳐갑니다. 언제나 보다 나은 아름다움을 제시하고 강요하는 디자인, 그건 누군가의 ‘자극’일 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 結
인간은 그다지 어리석지 않아서 안 되는 것에만 매달려 살지는 않습니다. 멋진 브랜드, 멋진 디자인의 자동차나 핸드폰에 기죽기는 해도 돈이 안 되면 다른 것으로라도 각자 나만의 장점을 찾으면서 내 삶의 목적, 나의 가치, 내가 존중받을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려고 아등바등 노력합니다. 광고가 아무리 단 하나의 ‘나’를 외치고 그 제품을 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나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져도 나는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광고가 나의 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나야’를 외치며 나를 따라하라고 속삭이는 광고를 보다보면 역설적으로 그 광고를 바라보는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고의 허상을 바라보는 나, 그 어디에도 없는 나의 모습을 찾아 헤매는 내가 있음을, 그것이 나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사실 광고 속에 비치는 이미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모습입니다. 광고는 단순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습, 우리의 꿈을 살펴 우리가 보고 싶어 하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광고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이미지입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나의 허상...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는 가지고 싶은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나의 모습입니다. 그 제품만 사면 얻게 될 행복 그러나 아무리 사고 또 사도 얻어지지 않는 행복을 보여주긴 하지만, 어쨌든 너무도 달콤한 나의 꿈입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광고의 홍수 속에서 광고를 보고 제품을 사용하는 동안 소비자는 점차 시장의 현실을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광고의 허구적인 모습에 비판적이지만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광고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우고 그럭저럭 받아들입니다.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광고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나름대로 광고를 알아가는 겁니다. 경험이 쌓여가고 나를 알게 될 수록, ‘저 제품을 사면 뭔가 좋아질 거야’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저 정도면 내가 쓸만하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제품이 보여주는 내가 되려하기 보다, 나를 만들어 낼만한 제품을 능동적으로 구매하는 내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나를 유혹하는 광고와 그런 광고들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을 고르는 소비자... 광고는 허상뿐일지라도 그 광고의 허상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엮어 줍니다. 각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광고를 만들고 이용하며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어내려 노력하는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만약 광고가 사라진다면 서로 속고 속이고 이용하려는 그 모든 관계마저 함께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럭저럭 견딜만한 현실마저 없어지는 겁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외치는 광고는 편안한 실내 환경과 화려한 옷들을 보여주며 소비를 부추기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나로서는 그 미래를 위해서 수많은 광고 속 지름신들의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세상이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에 나는 나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난 소중하니까요.’
디자이너는 결코 현실로 다가오지 못할 우리의 그 꿈을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미지의 환상 뒤에는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 디자이너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현실화시키고 있습니다. 환상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그것은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만들지만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환상... 그런데도 디자이너는 종종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만든 제품과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버리곤 합니다. 왜? 누군가는 그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고, 거짓이라고 비난해도 디자이너는 자신의 손으로 이 세계의 꿈과 미래를 만들어내는 자신만의 순간, 그 순간의 진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온갖 반응 속에서 혹은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는 냉대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갈 디자인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디자인은 디자인에 대한 디자인의 순수한 열정, 우리에 대한 우리의 희망 그 자체로 우리와 마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1) 나는 나입니다. 나의 실체는 하나입니다. 데까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 봐도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의심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라는 존재, 인간의 이성은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1900년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에서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인간은 모호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가 수많은 임상 치료를 통해 인간에게는 자기 스스로 생각 할 수 있는 의식의 영역과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하게 되는 무의식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이전까지 자명하고 확고한 것으로 생각되던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겁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의 의식 이외에 자신의 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숨겨진 의식,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할지 자기 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마저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요.
이 후 약 10년이 지나기 전에, 소쉬르라는 기호학자는 제네바 대학의 강의에서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어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표란 ‘사과’라는 글자 또는 그 소리를 의미하고 기의란 ‘사과’가 의미하는 실재의 사과를 뜻하는데, 언어는 이 두 요소의 자의적인 조합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니지만 당시까지는 언어에 근원이 있어서 이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언어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시대였기에, 언어가 기표와 기의의 조합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되자 언어도 더 이상 근원도 알 수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프로이드가 인간의 이성을 분열시켰다면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를 분열시켜 버린 겁니다. 결국 나의 존재도 나의 것이 아니었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도 더 이상 근원이 있는 실체, 확고한 진실이 아니게 된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분석학자였던 라깡은 1930년대에 ‘거울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내가 나일 수 없는 이유, 내가 ‘내’가 아닌 나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겁니다. 라깡에 따르면 아이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상상계란 촉각과 시각의 감각에 의존해 자신과 어머니를 하나로 인식하는 착각과 오인의 단계이고 상징계란 언어적 상징(언어, 문화, 제도적 현실)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구성하는 단계이며 실재계란 상징계로 들어서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상징계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단계, 상징의 한계를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거울단계란 상상계를 말하는데, 이 단계에 속한 아이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상상계의 어린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느낌대로 울거나 웃을 뿐이지만 모유를 먹을 때 만져지는 어머니의 가슴이나 눈에 들어오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조금씩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지, 그런 모습을 보고 느끼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 합니다. 결국 어린 아이는 어떤 감각을 느끼지만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린시절의 나는 나이기는 한데 현실의 내가 아닌 허상의 ‘나’, 무언가 부족한 ‘나’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 이상적인 ‘나’로 착각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경험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합니다. 때문에 상상계의 자아는 진정한 내가 아닌 셈입니다. 오인과 착각, 기만과 가상의 주관적인 세계인 상상계에 머무르는 한 자아는 결코 자신의 본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요.

라깡이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따라하면서 만들어진 ‘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는 마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처럼 언어의 체계에 속한 나와 언어의 체계에 속하지 않은 본질적인 나로 분리되어 공존하게 됩니다. 나에겐 언어의 체계를 배워 그 체계를 통해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는 이성과 언어의 체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만의 수많은 감정을 느끼는 본능이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일상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은 언어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사실 나의 감정은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 때 언어의 체계 속에서 겪은 경험들은 나의 본능적인 영역, 무의식 속에 쌓이고 그 남겨진 경험들은 서서히 나를 변화시킵니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체계지만, 인간과 만나면서 의식의 영역에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각인시키고, 무의식의 영역에는 그 각인의 경험을 남겨놓습니다. 인간의 본능이라는 관점에서는 언어도 인간을 억압하는 기재인 셈입니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죠. 나라는 존재는 언어의 체계를 통해 만들어지고 나의 무의식도 좋든 싫든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언어의 체계는 언어의 체계일 뿐 나의 진정한 모습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존재자’로서 언제나 ‘분열된 주체’로 존재한다고는 해도 그 주체에게 언어의 체계만을 강요하면 나는 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때문에 라깡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며 거울단계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체계의 자아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식적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존재하기도 하는 나, 본능적인 나를 이상적인 자아라는 언어체계의 질서로 얽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어쩌면 광고는 언어체계의 질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현대인의 이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자아를 그 이상에 얽어매는 거울로 작동하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이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찾아간다면 현대인은 광고를 보면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광고를 보면서 생활 속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하기에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그런 정보들이 마냥 좋게만 여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환상적인 모습,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상적인 이미지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 하니까요. 그래서 두 눈 꼭 감고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하고 싶지만 광고는 내가 모르고 있던 나의 부족한 모습을 들춰내며 계속해서 그런 부족한 부분을 이런 제품, 저런 제품으로 채워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어쩌면 광고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2) 그랜트 맥크레켄은 ‘문화와 소비’에서 17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귀족들의 모습을 예로 유행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루이14세처럼 영국의 유행도 통치수단의 하나로 생겨났다고 본 겁니다.
당시 왕의 권력은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왕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귀족들이었지만, 각자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에서는 자신들이 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힘의 차이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몇몇 귀족들이 연합해 왕을 공격하면 왕은 도망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짐이 곧 프랑스다”라고 오만하게 외쳤던 루이14세도 어린시절에는 반란군에게 잡혀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지내야 했을 정도였죠. 왕들은 자신의 힘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도 태양왕처럼 우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귀족들을 왕궁으로 불러 모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각지에 흩어져 왕 몰래 힘을 키울지 모르는 귀족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 직접 감시하려 한 겁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귀족들을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대한 무도회를 열어 귀족들을 초청하고 그들 앞에서 자신의 화려한 모습, 사치스런 드레스를 과시합니다. 귀족들은 자신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왕의 그 화려한 모습을 보자 너도 나도 다투어 왕의 모습을 따라 하게 됩니다. 왕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귀족들 앞에 나타나고, 귀족들은 그 모습을 따라하거나 능가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허영과 사치처럼 보이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또 다른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겁니다. 왕은 자신의 드레스만 새롭게 만들면 되지만 귀족들은 각자가 새로 드레스를 장만해야 했기에 전체적인 규모로는 귀족들의 지출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그만큼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어 갔습니다. 부수적으로는 그 사치의 경쟁에서 탈락한 경제력 약한 귀족들이 다른 귀족이나 왕에게 빌붙게 되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과 귀족들의 서열도 정리되었습니다. 결국 왕을 정점으로 서열이 만들어지면서 왕의 권력은 보다 강화됩니다. 경쟁이 유행을 낳고, 유행이 사회적 질서와 계층을 만들어 낸 거죠.
지멜의 ‘트리클 다운’은 이런 유행의 순환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왕과 귀족 같은 상위계급이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만들면 하위계급은 그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그 스타일을 따라하고 그걸 본 상위계급은 다시 하위계급과 차이를 두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행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단순히 차이를 두려는 상위계급과 비슷해지려는 하위계급의 쫓고 쫓기는 관계만 설정되어 있어서 현대사회의 유행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맥크레켄은 이를 다시 수정하죠. 상위계급과 하위계급 사이에 중간계급이 있어서 상위계급의 모습은 따라하려 하고 하위계급과는 차이를 두려 한다는 겁니다. 또한 유행의 원인도 단순히 계급간의 차이를 두려는 성향 때문이 아니라 상징적 가치에 대한 모방, 즉 사회 내에서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는 노력에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상위계급의 가치만이 모방의 대상이 되었기에 유행도 단순하게 쫓고 쫓기는 형태로 순환했다면 현대에는 자신들만의 동기와 목적을 가진 여러 집단들 간에 모방과 차이화가 반복되면서 수많은 형태의 유행이 복합적으로 만들어 지고 있다는 거죠.
맥크레켄은 옷을 가지고 유행을 설명했지만, 옷에만 유행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간에 유행을 따라 만들어집니다. 디자인된 모든 제품들이 유행을 탄다는 것은 결국 현대의 디자인도 근대 유럽의 옷처럼 사회의 계층과 서열을 만드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왕과 귀족 같은 눈에 보이는 어떤 집단이 유행을 만들어냈다면, 요즘은 자본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죠. 왕과 귀족 같이 쉽게 눈에 띄고 따라하고 싶은 계급은 없어졌지만 대신 광고가 무엇을 따라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어야 가치 있게 사는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광고를 보며 이것저것 살 수 있는 돈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유행을 맘껏 즐기며 상위계층, 즉 행복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참 좋은 시대입니다. 자기 능력만 있으면 자기가 누리고 싶은 만큼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자신이 속할 수 있는 계층이 결정된다는 점에서는 예전과 별 차이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계급이 싫어서, 계급 때문에 못살겠다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지만 결국 돈을 기준으로 다시 계층이 나누어졌고, 디자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지 간에 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속한 계층,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능력을 눈에 보이게끔 해 주고 있죠. 디자인의 윤리에 대해서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가치관들을 떠나 디자인이 현대 사회의 중심에서 이 사회의 가치를 확인시키고 서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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