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억의 흔적을 기호와 도식으로 풀어낸 안민정 작가의 작업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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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정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감정과 기억, 관계의 흔적을 기호와 도식을 사용한 회로도나 설계도처럼 풀어내는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이다. 몸, 기억, 감정, 가족을 주요 주제로 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층위를 구조적 이미지와 도면적 구성, 디지털적 언어로 시각화한다. 사소한 과거의 순간과 개인적 기억을 작가만의 객관적 표현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개인에게 유의미한 ‘작은 일들’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녀의 작업은 감정과 추억을 시각화한 회로도이자 해부학적 지도처럼 보이며, 기계적 질서와 아날로그적 온기가 공존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특히 두 아이의 엄마로서 경험한 여성성과 가족의 서사는 사랑, 희생, 치유의 함을 탐구하는 중요한 축을 이룬다. 1981년 생으로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안민정 작가는 보이지 않는 정서와 시간의 흔적을 시각화하는데 집중해 왔다. 개인의 고유한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과 생각을 과학, 수학적 증명에 가까운 객관적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소중한 순간들을 관객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좌 : 자화상 (2007) / 우 : 자화상-라하프(2024)
이미지 출처 : https://www.myartda.com/
얼마 전, 작품 ‘자화상-라하프(Self-Portrait-Rachaph, 2024)’는 국제적으로 주목 받으며,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영구 소장되었다. 2007년에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신체를 해부도처럼 해석한 작품 이후, 2024년에는 아이 둘을 출산한 후 몸의 변화와 출산, 가족, 모성, 관계 기억 등 삶의 경험을 반영한 작품을 제작했다. Rachaph는 히브리어로 ‘보호하다, 알을 품다’라는 의미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보호하는 마음을 예술로 표현했다. 작가의 몸은 가족의 지도가 되어, 모성애를 전자 회로도와 융합해 자신만의 초상화를 그렸다. 모유 수유, 거꾸로 누워있는 배 속 아이의 모습, 출산 후 오른팔이 된 남편, 왼팔에는 항상 엄마 곁에 있는 첫째 딸을, 배 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둘째 딸을 표현했다. 엄마가 된 후 변화한 머리카락과 백신 주사로 인한 불안감을 표현하거나, 한글 발음을 그대로 영어로 표기하여 남편과의 대화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myartda.com/
‘자화상-라하프(Self-Portrait-Rachaph, 2024)’는 2024년 갤러리 P1에서 열린 그룹전 “Exoskeleton”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후 모마 컬렉션의 상설 전시 ‘Body Constructs’에 초청되어 작품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았으며 영구 소장이 결정되었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 4층 417호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The David Geffen Galleries)에서 전시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뽀뽀의 힘(The Power of a Kiss, 2008)’은 작가의 작업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자, 작가가 특히 애정을 갖는 작품이다. 작가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 혼자 학교에 가는 길이 두려웠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학교에 잘 다녀오라며 볼에 뽀뽀해 주어야 용기를 얻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러한 뽀뽀의 힘을 ‘뉴턴의 운동 제2법칙 F(힘)=ma(질량 x 가속도)’에 대입해서 표현했다. 물리학적 공식이라는 객관적 언어를 빌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단순한 열량이나 물리적 에너지에만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엄마의 뽀뽀처럼 보이지 않는 감성과 애정 역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작품은 개인적 기억을 과학적 구조로 전환함으로써, 감정의 힘으로 보편적 언어로 확장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나의 마지막 고무줄놀이(The Last Elastic Cord Games That I Played, 2012)’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다. 이 장면은 마지막으로 고무줄놀이를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이 날, 가장 난이도가 높은 부분에서 넘어지며 앞니가 부러졌고, 그 사건 이후 다시는 고무줄놀이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글 발음을 영어로 그대로 옮긴 노래 ‘전우야 잘 자라’의 가사는 이러한 기억에 정서적 울림을 더하며, 사적인 추억을 보편적인 감정으로 확장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은 작품 ‘메뉴얼1_나의 피아노를 사용하는 방법(Manual No.1 How to Play the Piano, 2012)’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고로 구매해 20년 동안 사용해 온 골동품 같은 피아노는 작가의 시간과 추억이 담겨 있다. 피아노의 흰 건반 중 레, 미, 솔이 소리가 나지 않아, 해당 건반을 피해 자연스럽게 연주하기 위한 작가만의 노하우가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위에 올려진 물건들을 먼저 치워야 하고, 피아노 의자를 놓을 공간이 없어 소파의 팔걸이에 앉아 연주하는 모습까지 담아냈다.
‘우리 집 세부도(Detailed Map of My House, 2015)’에는 작가가 35년 동안 한 다가구주택에서 이사를 거듭해 온 가족의 역사를 담은 작품이다. 작품 속 A-1부터 A-4까지의 표기는 1981년 작가의 출생 이후 거주 공간의 변화를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A-1은 부모님과 네 자매, 친할머니까지 일곱 명이 살던 작은 단칸방이며, A-2는 형편이 조금 나아져 옆의 조금 더 넓은 방으로 옮긴 때를 나타낸다. A-3은 3층에 새로 지은 집으로,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게 된 큰 언니를 제외한 다섯 식구가 함께 살던 공간이다. A-4는 자녀들이 모두 독립한 뒤 부모님 두 분만 넓은 2층 집에 거주하는 현재의 모습을 그렸다. 식물을 키우고, 비어 있는 거실과 방에는 겨울 김장을 위한 붉은 고추가 바닥을 채우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안민정 작가가 이러한 표현 방식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잡지에서 접한 건축 도면에서 시작되었다. 건축 도면 속 선과 기호 하나하나가 모두 정보를 담고 있으며, 복잡하면서도 아름답고, 질서 있는 구조로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작가는 자신의 얼굴과 신체를 자로 재어 도면처럼 옮겨 보기도 하면서, 정확한 길이와 치수 등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를 반영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러한 방식은 개인의 기억과 감정을 구조적으로 기록하고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관객이 각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의 가치를 함께 떠올리도록 이끈다. 안민정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시각적 결과물을 넘어, 감정과 기억을 매개로 한 디자인적 사고를 보여준다. 단순히 메시지 전달에만 머무르지 않고, 보는 이의 감정에 천천히 다가가 공감과 사유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사람의 경험과 감정을 중심에 둔 현대 디자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자료
안민정 작가 사이트 : https://www.myartda.com/
안민정 작가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minjeongart
-성신여자대학교 통계학과 학사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의류환경학과 석사 졸업
-트렌드 분석 및 컨설팅 회사 인터패션플래닝, 트렌드 분석 연구원 및 컨설턴트
(현) 시선인터내셔널 미샤 정보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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