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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올드보이 II

영화 ‘올드보이’ -오대수의 잃어버린 ‘자아’
겉모습만 보자면 영화도 원작과 비슷한 캐릭터와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5년 동안 만두만 먹던 남자가 풀려나 자신이 감금당했던 이유를 알아내고 복수를 하려 합니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니 자신이 감금당했던 이유는 학생시절 자신 때문에 상처를 입은 범인이 자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원작과 영화 모두 복수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겁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복수가 진행되는 이유는 원작과 상당히 다릅니다. 고등학생이던 오대수는 어느 날 학교에서 남매의 금지된 사랑을 엿보게 되고, 서울로 이사 가던 날 친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몰래 지나가듯 한 이야기였지만 그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지고 남매의 누나는 동생 앞에서 자살을 하게 되죠. 카케누마의 쪼잔한 자아 찾기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눈앞에서 누나를 잃어버린 이우진의 처절한 복수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겁니다.
물론 영화의 주인공은 이우진이 아닙니다. ‘자아란 무엇인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원작의 주인공을 카케누마라고 할 수는 있지만 영화에서는 보이는 그대로 오대수가 주인공입니다. 만화의 경우 비록 실패하긴 해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카케누마의 노력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인공인 고토는 이런 저런 노력을 다하지만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 외에는(자아에 있어서는 그게 가장 중요하지만) 그다지 주인공답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는 카케누마가 만든 게임의 게임 말처럼 움직이며 끝까지 카케누마가 만들어 놓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견디기만 할 뿐입니다. 반면 영화의 이우진은 카케누마와 같은 전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오직 복수에만 집착하는 이우진은 어떤 면에서는 복수의 대상인 오대수에게 얽매여 있는 캐릭터 입니다. 복수만을 생각하기에 막상 복수가 끝나면 삶의 의미마저 사라지고 마는 캐릭터인 겁니다. 그런 면에서 오대수는 고토와 마찬가지로 이우진에게 휘둘리긴 하지만 끝까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로서 살아남습니다. 물론 마지막에 가서는 이우진의 복수에 자신의 자아, 자신의 기억마저 잃어버리긴 해도 그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우진과 맞서는 캐릭터인 겁니다.
원작과 영화는 모두 자신의 자아를 잃고 방황해야 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원작의 카케누마는 자신이 만들어낸 고토의 환상을 바라보다 자신의 자아를 찾아 헤매게 되고, 영화의 오대수는 자신의 확고한 자아를 믿고 있다가 끝내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자아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보다는 단지 ‘찾아야 할 자아나 확고한 자아, 당연한 자아란 없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진행시킬 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그 자아를 대하는 태도, 자아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생각과 확고한 자아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의 차이는 원작과 영화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차이가 원작과 영화의 차이 일본과 한국의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자아에 대한 생각은 자아를 대하는 태도와 행동마저 결정합니다. 원작의 경우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원래의 자아가 없기에 자신의 자아를 찾아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영화와 같이 확고한 자아를 믿는다는 것은 자아란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아를 찾는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내가 찾는 자아가 맞는지 틀린지를 고민하고 의심해 봐야 하지만, 확고한 자신의 자아를 믿는 입장에서는 자신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당연할 뿐,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편에서는 자기 자신마저 의심할 수밖에 없기에 모든 것을 재어보고 따져가며 행동하게 되지만, 한편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이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것이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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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삼강오륜은 그런 확고함, 당연함 중의 하나입니다. 삼강오륜은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늘의 도리,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규칙인 겁니다. 때문에 삼강오륜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며 정죄하게 됩니다. 삼강오륜이라는 당연한 윤리, 하늘이 내린 윤리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행동이 옳은지 틀린지 따지게 되는 겁니다. 때문에 확고한 자아를 가진 캐릭터, 자신에 당당한 캐릭터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늘이 내린 도리, 당연한 윤리를 받아들이고 지키는 캐릭터로서는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치관만이 선입니다. 그래서 다른 가치관과 만나면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건 오직 다른 가치관이 악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연극인형 같은 원작의 캐릭터들에 비해 훨씬 사람 냄새가 나는 캐릭터, 원작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연출합니다. 이미 자신이 하늘의 대리인이기에 무엇을 하든 자유롭습니다. 그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맘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겁니다. 자신이 배운 대로 자기 자신에게 당당하기만 하면 부끄러울 게 없는데 이야기에 얽매여 고민하고 망설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수많은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캐릭터... 식자들에겐 일견 멋지게 보이겠지만 갈등의 이유를 배울 수 있는 사람, 방황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다지 이해하기 쉬운 캐릭터가 아닙니다.
영화의 캐릭터들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즉흥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정체성, 하늘이 내린 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내 기준으로 선과 악, 친구냐 적이냐를 판단하고 대응하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보면 왠지 편안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이유도 없고 모호한 분위기에 이상한 느낌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캐릭터들은 주인공들이 질병으로 사망하거나 기억상실증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결말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고 친근한 캐릭터들입니다.
확실하고 변함없는 캐릭터들, 그래서 더욱 자유로운 그들... 물론 대수도 고토 못지않게 자신을 감금했던 우진에게 휘둘리며 우진의 계획대로 움직여야하지만, 대수는 고토처럼 얌전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성격자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없게 만듭니다. 미도와 억지로 키스를 하려들거나 수치심에 도망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런 아이(?) 같은 모습에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본성이 느껴집니다. 비록 덤덤하게 일상의 일들처럼 묘사되었지만, 조폭들과의 격투신이나, 실장의 이빨을 뽑아버리는 장면도 그 안에 숨겨진 인간냄새가 있기에 보다 희극적으로 보여 집니다. 우리에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캐릭터 보다는 사람냄새 나게 좌충우돌하며 ‘여기 내가 있소’라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주인공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겁니다.
우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카케누마처럼 어둡고 치밀한 성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조폭들과 싸운 대수를 은근슬쩍 도와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우진의 행동은 그를 치기어린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보이게 할 정도입니다. 우진이 pc방에서 대수의 친구를 죽이는 장면이나, 대수와 싸우던 경호실장을 죽이는 장면도 상당히 즉흥적이고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지만, 그의 인간성과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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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영화는 원작처럼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보다는 할까말까를 고민하다 기분에 따라 터트려버리는 인간들의 우발적인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갑니다. 우발적 혹은 감정적인 상황과 캐릭터들... 사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 또한 대수가 서울로 떠나가며 할까 말까 머뭇거리다 내뱉은 말 한 마디였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그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듯 친구에게 속삭인 비밀. 그리고 그가 모르는 사이에 생긴 자살, 여기서 생겨난 증오를 그대로 복수로 옮기는 감정 등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서로를 밀어 넣고 상처받으면서 울고 웃기를 반복합니다. 같은 복수라도 원작처럼 차분하고 치밀하게 사람의 피를 말리는 듯한 복수보다는 둑이 터지듯 격정적인 감정이 터져 나오는 복수인 겁니다. 한민족의 선조를 고조선 신화의 웅녀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 그러니까 곰을 숭배하던 부족이 아니라 호랑이를 섬기던 부족이라고 본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에게조차 복종하지 못해서 뛰쳐나가는 이 성질머리는 어쩌면 정말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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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의 복수는 그렇게 당연함에 기댄 복수, 즉흥적인 감정이 묻어나는 복수입니다. 복수만 하면 되지, 복수 이후를 생각하는 복수가 아닌 겁니다. 그의 복수는 카케누마의 복수처럼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한 게임이 아닙니다. 우진의 복수는 대수의 우발적인 말 한마디에 죽어버린 누나, 자신이 사랑하는 누나를 잃었다는 부당함에 대한 당연한 대응일 뿐입니다. 대수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수가 우진에게 자신의 비밀을 전해 듣고, 자신의 당연함(근친상간을 범해서는 안 된다)이 무너졌을 때, 그는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 상황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의 혀마저 자릅니다.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며 개처럼... 정말 개 같은 수모를 참아가며 자신이 생각하던 당연함을 지키려 합니다. 미도가 받아야 할 충격을 없애기 위해 아주 구차하게 우진에게 구걸하는 건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당연함을 지키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대수가 우진에게 매달리는 장면은 마치 우진이 대수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는 누구야?’
‘오대수’
‘뭐하고 있어?’
‘한번만 봐줘.’
‘왜, 그러는데?’
‘난 미도의 아버지다’
‘미도의 아버지, 그럼 너의 실수로 죽은 누나는 뭘까?’
‘제발...’

우진은 일부러 대수에게 리모콘을 떨어뜨립니다. 리모콘을 누르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유혹하죠. 대수는 우진의 마지막 유언을 듣기 위해 리모콘의 스위치를 눌러야 합니다.

‘난 뭐지?’
‘내가 죽이고 싶은 놈’
‘왜 죽여야 해?’
‘날 이런 상황에 몰아넣었으니까.’
‘그럼 왜 그렇게 나에게 구걸했어?’
‘아버지니까’
‘아버지, 오대수? 그럼 미도와 너의 관계는?’
‘죽일 놈’
‘너도 똑같아! 이제 알겠어?’

대수는 리모콘을 누르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수와 미도의 거친 숨소리는 우진의 승리를 경축하는 팡빠레처럼 그 삭막한 공간에 울려 퍼지죠. 당연함의 아이러니(irony)... 결국 우진이 복수하려던 것은 대수가 아니라 자신의 누나에게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이 사회의 관념 자체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사회의 관념 자체를 적으로 돌릴 수 없기에 대신 대수를 선택했던 겁니다. 대수는 우진의 아이러니를 세상에 알리는 메신져였던 셈입니다.
감독은 오대수가 처한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만의 당연함, 그 당연함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거면 충분해?’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첫 번째 당연함은 친족에 대한 복수입니다. 우진은 죽은 누나를 위한 복수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친족을 잃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원초적인 계율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이라는 당연함이 없다면 그의 복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진의 당연함은 대수가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당연함입니다. 복수는 복수할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에 대한 복수에 머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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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첫 번째 당연함 전에 존재하는 당연함이 있습니다. 근친상간을 죄로 규정하는 영 번째 당연함이 그것입니다. 영 번째 당연함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 인류 전체의 당연함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한 가장 원초적인 질서인 겁니다. 영 번째 당연함을 생각하면 우진에게 첫 번째 당연함의 대상은 대수가 아니라 이 사회 전체입니다. 누나가 자살한 건 근친상간을 죄로 규정한 사회적 당연함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우진은 단지 자신의 행복을 깨뜨려버린 대수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합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 사회의 통념보다는 구체적인 대상, 손에 잡히는 실제적 원인제공자를 지목한 겁니다. 우진은 자신의 첫 번째 당연함을 지지해 주는 영 번째 당연함에 대항할 수가 없으니까요.
영 번째 당연함은 단지 근친상간은 죄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누나의 복수라는 우진의 개인적 명분, 첫 번째 당연함조차 사회적 공인이라는 힘을 가진 영 번째 당연함이 개인간의 복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 합니다. 첫 번째 당연함을 의지해 복수를 하고 싶은 우진으로서는 영 번째 당연함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겁니다. 때문에 자신의 딜레마(dilemma)를 대수에게 떠넘깁니다. 문제의 발단이었던 대수에게 매듭을 지으라는 거죠.
대수로서는 복장이 터집니다. 우진이 첫 번째 당연함(누나의 복수)을 근거로 떠넘긴 영 번째 당연함(근친상간의 죄)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느닷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겁니다. 우진과 만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당연하고도 당연한 금기였는데, 이미 금기고 뭐고 다 없어져 버린 후였던 겁니다. 어린 시절 영 번째 당연함에 대한 호기심이 모든 걸 바꾸어 버린 것이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제 대수는 자신을 사랑해 주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미도와 나의 딸 미도 사이에서 ‘이 당연함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우진의 물음에 답해야만 합니다.
대수는 결국 당연함 자체를 벗어 던집니다. 미도의 아버지, 미도를 사랑하는 현재의 나마저 버립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택마저 그리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기에 자조 섞인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죠.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외치며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인식의 근원으로 나를 선택 했다는데, 자신은 그런 당연함의 근원인 나, 나의 기억마저 버려야 합니다. 기억을 지우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으니까요.
기억이란 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의 모든 것입니다. 베르그송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제의 나와 한 달 전의 나, 일 년 전의 나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면 난 내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기억이 없다면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없죠. 그런데 대수는 그 기억을 날려버립니다. 나를 부정해 버립니다. 결국 대수는 지금까지의 당연함 조차 파괴해 버리고 나라는 몸뚱어리, 산산조각난 자신의 기억과 같은 상황들만 남겨 놓은 채 미도에게 기댑니다. 대수는 자신을 버리고 대신 미도의 기억에 의지해 다시 시작하려는 겁니다. 자신은 잃어버려도 그들의 관계는 지속될 테니까요.
기억의 지움, 당연함의 거부는 감독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주문인지도 모릅니다. 당연함에 기대어 살아오던 우리에게 말하는 거죠 ‘그게 정말 당연한걸까?’ IMF 이후의 우리를 보면서, 지금까지 믿어왔던 그 모든 당연함들에 대한 당혹감과 상실감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를 잊어버리라고 하는 거죠. 지금까지 내가 믿고 있던 나의 당연함을 벗어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게, 그런 모습이 우리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거죠.

상대성의 절대화 vs 절대성의 상대화
원작의 세계는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고토나 카케누마 중에서 누가 옳고 그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카케누마나 고토 모두 각자 나름대로 납득해 줄 만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케누마는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고토와 게임을 해야 하고, 고토는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카케누마와 게임을 해야 합니다. 고토는 정말 불쌍하지만, 특별히 카케누마가 나쁘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모두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절박한 사연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만화나 소설, 드라마 등을 보면 그들에게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공통점을 찾게 됩니다.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리는 구도는 ‘울트라맨’ 같은 아동용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에 갈등 구조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에 권선징악의 결말을 맺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갈등은 서로의 생각과 행동방식에 차이가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캐릭터가 나름의 생각을 일관성 있게 주장하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여집니다. 납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기에 그들의 관계 속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드레곤 볼’ 시리즈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힘이 있는 자, 승리하는 자가 주인공이고 힘이 없는 자, 패배자가 악당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서로 치열하게 싸우지만 주인공은 악당(?)이 굴복하면 그들을 자신의 친구 혹은 수하로써 받아들입니다. ‘북두신권’처럼 어느 한편이 꼭 죽어나가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단지 조연들만이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죠.
꼭 치고받고 싸우는 이야기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아톰’에서 ‘에반게리온’까지, ‘짱구는 못말려에서’부터 ‘몬스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와 장르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본만화의 특징이 바로 상대성입니다. 그런 성격은 "THE FIVE STAR STORY"나 ‘침묵의 함대’같이 제국주의 우경화를 지지하는 만화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크리스트교처럼 자신들이 ‘선’이기에 이 세상의 기준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단지 자신들이 남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기준, 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그들의 신화처럼 그들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 보편적인 도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만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강한 자가 되려 하지 어떤 근본적인 도덕이나 신에 대한 믿음 같은 절대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2)뒷면

아마 그들의 문화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경험들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사무라이 문화라지만 졌다고 할복만 하다가는 모두가 죽어버리고... 평화로운 세상이 펼쳐졌을 텐데... 그들도 어떻게든 서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방식을 찾아낸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도나 불교처럼, 혹은 다이묘들의 관계처럼 상대방을 인정하고 관계를 조절할 수밖에 없는 힘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랬기에 근대화라는 제국주의의 기로에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지사들이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신들의 왕을 황제를 넘어서 신으로까지 승격시켰던 겁니다. 자신들의 믿음이나 사상의 빈약함을 잘 아는 그들에게는 그 빈약함을 매워 줄 존재, 제국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 도그마(dogma)를 만들어낼 상징적 존재가 필요했으니까요. 3)뒷면

그런 상대성의 문화 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인지가 아니라 누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가 됩니다. 절대적인 기준, 정의나 도덕이 없기에 오직 힘이 있는 자가 기준이 되어 게임과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내고 참가자는 오직 수동적으로 게임에 참여할 의무만이 주어집니다. 때문에 원작에서도 중요한 것은 게임이 제시되었다는 것과 그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상대적인 가치관, 상대적인 존재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오직 힘을 지닌 자, 카케누마의 생각과 행동만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주인공은 고토지만, 힘이 없는 고토는 게임 속의 말에 불과할 뿐, 게임을 만들고 진행하는 자는 카케누마니까요.

그래서인지 그 누구도 카케누마에게 윤리적인 분노를 느끼거나 도덕적 훈계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화에서는 절대적이고 당연한 그 어떤 것을 믿기보다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윤리라는 당연한 가치가 없는 그들로서는 카케누마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따지려 들기보다, 패배자로서 그저 카네누마의 힘에 두려워할 뿐입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묻기 보다는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만을 생각하면서 오직 살기 위해 발버둥만치는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카케누마가 만들어 놓은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카케누마가 만들어 놓은 게임 속으로 끌려들어가 카케누마가 의도한 대로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는 그들은 카케누마를 평가할 자격조차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4)뒷면

그렇게 원작은 인간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본 다는 느낌보다는 미리 짜 놓은 프로그램에 각 캐릭터를 배치해 놓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까를 시뮬레이션하는 듯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엔 답답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마치 잘 짜여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 마치 작가의 세계관으로 세트된 무대 안에서 단지 카케누마로 대표되는 신경증에 걸린 이성, 자본의 힘에 대항하는 무력한 주인공들을 보며 현대사회에서 인간과 자본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이 일본만화의 매력일지도 모르지만,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는 각 캐릭터들의 관계가 원작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원작의 줄거리를 가지고 만든 영화라도 한국인만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 묻어나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우진도 카케누마처럼 자살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원작과 전혀 다릅니다. 그는 이미 이야기의 전반부에서부터 자신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게임이 끝나면 난 이제 뭘 하지?” 우진은 카케누마처럼 자신의 자아를 찾다 실패해서 자살하는 게 아닙니다. 우진에게는 이미 마지막 결말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복수를 마무리하면 자신이 가야 할 곳, 사랑하는 누나가 있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권선징악에는 언제나 선과 악, 목적과 결말이 뚜렷합니다. 잘한 일은 보답을 받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순리대로 사는 자는 복을 받고,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자는 하늘이 스스로 벌을 내리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우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닥친 누나의 죽음이라는 부당함, 하늘이라도 대신 나서서 바로잡아 줄 이 억울함, 잃어버린 자신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입니다. 원작에서처럼 강자의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누가 강한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정당한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진의 자살은 그리움입니다. 복수를 마치면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이 세상을 떠나 누나가 기다리는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살아남은 대수도 대수대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처절하게 선택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당연함의 혼란 속에서 비록 자신을 잃을 지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생각되던 자신의 삶, 아버지와 딸의 관계마저 무너져 버렸지만 그 속에서도 어떻게는 살아남으려 노력합니다. 우진이 남겨준 딜레마 덕분에 기억은 잃을지라도 그와 미도는 그렇게라도 함께 버텨나갑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자기 삶의 목적을 부여잡고 그 삶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비록 감정적이고 즉흥적이긴 해도 서로의 당연함을 껴안고 부대끼며 살아가죠. 원작에서 보이는 무력감, 그 무력감을 만들어내는 상황의 설정 자체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과 대수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상황들 속에서 악착같이 버티고 서서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그 현실을 이겨내려 합니다. 상대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당연함을 지키려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나만을 주장하는 꽉 막힌 당연함은 아닙니다. 마치 ‘왕의 남자’에서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라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생과 공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고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나를 이해해 달라는, 나의 당연함을 인정해 달라는 외침입니다. 영화에서는 만화의 고토처럼 주어진 상황을 묵묵히 견디는 캐릭터는 없습니다. 남들에게 상처받고 쓰러지고 자신의 의지가 꺾기기도 하지만 나로서 내 의지를 지켜나가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칩니다.
영화는 그다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으로 등장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진과 오대수는 서로 뒤엉켜 아웅다웅 다투지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누군가의 위에 서서 군림하며 그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이해받기 위해서, 서로 이해해 달라고 때를 쓰고 있는 겁니다. 대수의 주변을 맴도는 우진이나 우진에게 매달리며 사정하는 대수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너’는 나를 위한 도구이기 이전에 나와 관계를 맺으며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친구’니까요.
고토와 카케누마, 오대수와 이우진은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작에서 고토는 주연이지만 수동적인 조연으로, 카케누마는 조연이어도 능동적인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반면, 리메이크작의 오대수와 이우진은 각각 주연과 조연으로 나오지만 모두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갈등을 일으킵니다. 또한 원작에서는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이 카케누마라는 단 한명의 절대자에게 억눌려 있다면 리메이크작에서는 각자의 당연함을 주장하는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정당함 혹은 절대성을 주장하며 상대적인 관계를 엮어냅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으로 상징되는 본능과 이성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지도 모릅니다. 둘 다 음악에는 일가견이 있는 신들이지만, 흥청망청 놀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는 풍요의 신 디오니소스와 미래를 보고 예언을 하기 위해 음악의 신비함을 사용하는 이지적인 아폴론의 모습은 정반대에 위치합니다. 누가 더 낫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재를 즐기는 디오니소스에게는 미래가 없고, 미래를 예언하는 아폴론에게는 현재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카케누마와 고토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성공한 사업가인 카케누마는 순간순간에 충실한 고토의 모습을 부러워하다 결국 스스로 자멸해 버리고 반면 순간순간에 대충 충실했던 대수는 자신이 퍼트린 소문이 몰고 올 결과, 미래를 생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상대성을 인정하며 절대화할 것인가, 절대성을 강요하며 상대화할 것인가의 문제는 무엇을 우선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한 결코 답을 낼 수 없습니다. 주역의 계사전에 나오는 “태극이 무극이다”는 말처럼 태극과 무극은 매한가지 입니다. 무엇이 먼저인가 보다는, 태극이 무극이 되고, 무극이 태극이 되는 무한순환의 그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한지도 모릅니다. 중용이란 그 현상을 대상화시킨 개념일 뿐이죠. 물론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양쪽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면 좋겠지만 현실은 카오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카오스적인 현실 속에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5)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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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과 달리 우린 서로가 서로를 나누고 공감하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얼굴한번 맞대지 않고서도 서로에게 정이 가는 것은 어쩌면 드넓은 만주벌판을 함께 말달리며 휴식을 취하고 한 솥 밥을 나눠먹던 고구려 병사들의 끈끈한 동지애 같은 것이 우리에게 원형으로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디자인 할 때 마다 느껴지는 공허함... 외국의 디자인을 참고하며, 어떻게든 클라이언트의 클래임을 줄여보려고 노력할 때마다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우리들 끼리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드는 것에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너무 성급한 생각이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찾지 못하는 것은 너무 정형화된 디자인을 강요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남으려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오대수에게 고토가 되어야 한다고 꼬드기는 겁니다. 산업의 역군으로써 생산을 위한 문화, 어디선가 성공한 형식들을 정답으로 받아들이고 따라하라고 강요합니다. 그 속에서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 혹은 선임의 감각에 따라 자신의 생각보다는 일단 완성되고 검증된 디자인을 카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맞는 방식이 아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어떤 감각, ‘이건 아냐’라고 외치는 나의 느낌을 모른 체 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은 그다지 편치 않습니다.
물론 한국적인 디자인의 성격을 단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력... 끈질김이라기보다는 이리저리 부딪치고 깨져도 ‘나는 나야.’라고 외치며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꼬장꼬장함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적인 디자인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덧글

2) 일본의 신화 속에는 강력하고 절대적인 신보다 자유분방한 여러 신들의 모습을 보입니다. 일본의 신들은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단지 이 세상의 기원이 되어주는 인간 아닌 인간처럼 행동하죠. 일본의 창조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만 해도 오누이지만 부부로 살며 성에 대한 자유분방함 혹은 노골적인 묘사 속에서 이 세상과 신들을 낳습니다. 이자나미는 자신의 자식이자 불의 신인 히노가쿠츠치를 낳다가 불에 타 죽어버리기도 하고, 이자나기는 화가 나서 결국 자신의 검으로 아내를 죽게 한 자신의 자식을 베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신들은 그냥 그렇게 아무런 도덕적인 가치관 없이 인간의 칠정, ‘희노애락애오욕’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아가죠.
조금 덧붙이자면 남편 이자나기는 그렇게 죽어버린 아내 이자나미를 만나기 위해,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처럼 지하의 저승세계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을 보지 말라는 일종의 금기를 제시합니다. 물론 남편은 그 금기를 어기고 아내를 훔쳐봅니다. 그런데 아내의 몸에서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고 남편은 너무 놀라 소리를 내다 들키고 맙니다. 수치심을 느낀 아내는 분노에 차 남편을 쫓고 결국 남편은 이 세상으로 도망쳐 나오게 됩니다. 그 후 이자나기는 지하세계의 부정함을 씻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강으로 가서 몸을 씻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신들이 탄생합니다. 일본 황실의 직계 조상쯤 되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도 이때 이자나기의 눈에서 태어나죠. 아내의 금기를 깨고 도망 나온 남편의 눈에서 일본 최고의 신이 탄생한 겁니다.
그렇다고 일본의 신들이 그리스의 신들처럼 생존을 위해 부자간의 처절한 투쟁을 벌일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습니다. 근친상간은 종종 있지만, 오이디푸스 신화와 비슷한 부친살해는 없습니다. 우라노스를 죽인 크로노스나 크로노스를 죽인 제우스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나 누이동생과 결혼하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는 겁니다. 일본의 신은 딜레마에 빠져 심오한 철학을 펼치거나 기독교의 신처럼 자신만의 유일한 진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마치 인간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덕분에 신화의 마지막으로 내려갈수록 신은 인간과 뒤섞이고 신과 인간의 피를 반반씩 섞인 자손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신성은 점차 사라지고 인간이 신과 비슷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결국 그 신들의 계보를 쫓아 내려오다 보면 최초의 일본 천황인 진무천황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겁니다. 일본 황실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보니 도덕이나 윤리보다는 황실의 권위가 더 중요했겠죠.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신도’라는 전통 종교의 영향인지모르겠지만 고대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사람들을 신으로 떠받들어 왔습니다. 오죽하면 옛날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그들의 신도에서 신으로 모셔지고 있을까요? 일본 승려 엔닌이 자신을 무사히 조국으로 데려다 준 장보고를 서해의 해신으로 묘사했듯이, 일본인은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자신이 알 수는 없어도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롭고 두려운 힘을 보면 그 힘을 받들어 모시며 숭배하는 거죠.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그 무엇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기에 언제든지 나보다 힘세고 더 나은 존재가 나타나면 신으로 받들 준비가 되어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신과 인간의 경계가 상당히 모호했던 거고 그만큼 신의 위엄과 힘도 절대적이지 못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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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상당한 도움을 줍니다. ‘침묵’은 17세기의 일본을 무대로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천주교를 전파하다 막부의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와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포르투칼에서 파견된 로돌리코 신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서구문명을 대표하는 페레이라 신부와 로돌리코 신부가 일본에 와서 겪는 일들을 통해 다른 문명과 차이를 보이는 그들만의 정신세계가 드러나죠. 특히 로돌리코 신부가 마침내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일본의 정신세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페레이라 신부는 로돌리코 신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 민족은 인간과 아주 동떨어진 신을 생각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 민족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중략) 이 민족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장시킨 어떤 것을 신이라 부르죠. 다시 말해서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 부르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원시신앙 정도의 수준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종교 관념이지만, 그만큼 현실 지향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신마저 초월해 버리는 그들의 상대적인 세계관이 참 나이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생각들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도 힘만 있다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의 내면에는 자신에게 힘만 있다면 자신이 이 세상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절대적인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의 뜻을 기준으로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절대적인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과 악의 기준,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한 예가 될 겁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절대로 용납 못할 범죄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게는 문제조차 되지 않습니다. 일본이 한국보다 강하므로 일본은 한국의 기준이 될 수 있고, 그렇다면 자신들의 기준으로는 정상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우리에게 힘이 없는 이상 우리는 그들의 망언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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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특성을 은혜와 의리에서 찾습니다. 은혜를 입으면 입은 만큼 은혜를 갚는 것이 의리이고 일본인은 이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의리는 종종 ‘주’라고 불리는 주군에 대한 의무와 충돌하기도 하기에 메이지유신을 이후로 의리보다는 의무를 강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면에서는 일본의 문화를 일본 황실의 자애로움을 표현한 국화(평화)와 무사도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칼(전쟁)로 대비해 설명합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국화와 칼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일본을 이끌어 간다고 본 거죠. 또한 서양의 기독교는 신을 기준으로 신에게 반역한 인간의 ‘죄’를 문제 삼지만, 일본은 인간이 느끼게 되는 수치심의 ‘치’를 기준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자신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신에게 죄를 범했기에 신의 자비를 구해야 하는 서양에 비해 일본인의 ‘치’는 사람들이 모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충의’를 존중하는 우리와 별 차이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과 우리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광규 님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생득지위’와 ‘성취지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무조건 장자에게 상속하는 우리의 문화와 달리 일본은 장자가 아니더라도 상속권을 가질 수 있기에 일상생활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경쟁과 성취를 배우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은 절대적인 가치보다 상대적인 현실을 더 중요시 합니다. 상대적인 현실을 중시하다보니 현실에서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를 따지고, 그 힘에 굴복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거죠.
결국 원작에서 카케누마의 횡포에 아무도 맞서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바탕에는 자신보다 강한 힘에 대한 복종의 자세가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으면 지배하고 힘이 없으면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배여 겁니다. 물론 자신의 힘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 세상의 기준이 될 수 있으니 절대적인 가치관보다는 유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얻는 위치가 무한한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남보다 우월해도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 이 사회의 체계를 그대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누구나 힘만 있다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지만 그 자리는 신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과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인 겁니다. 일본의 세계관이 상당히 자유롭게 보여도, 속으로는 무척 보수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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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상환 님은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에서 자신의 ‘계사존재론’을 가지고 근대와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재해석합니다. 그들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초끈이론’의 끈에 빗대어 ‘존재’를 끈의 수축과 이완이 교차되는 현상으로, 즉 태극(질서의 체계와 순환, 아폴론적)과 무극(무질서의 혼돈과 가능성, 디오니소스적)의 변환과정으로 본 겁니다.
데카르트의 주체와 주체 이전, 프로이트의 타나토스와 에로스 등은 그러한 예들 중의 일부입니다. 라깡을 살펴보죠. 아이는 거울단계를 거치며 한 사람의 정상인, 즉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정상적인 주체’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대타자’의 욕망을 통해 만들어진 나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지켜야 할 규범들을 배우면서 먹고 싶은 마음, 울고 싶은 감정을 참아내고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일에 익숙해지는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를 사회적 체계의 나 또는 ‘언어적인 끈’이라고 생각해 보죠.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나, 먹고 싶을 때 먹고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하는 감각과 감정으로 뭉쳐진 내가 있습니다. 나를 ‘소외’시키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나, ‘본질적인 끈’이 있는 겁니다.
라깡의 ‘분리’란 대타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정상적인 주체’에서 대타자의 결여(소외된 나)를 발견하고 그 소외된 끈에서 진정한 나의 끈을 풀어내는 작업, 자신의 실존을 찾으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끈을 분리해 버리기만 해서는 언어적인 끈과 본질적인 끈의 분열, 자아의 분열만 발생할 뿐입니다. 때문에 분리된 끈은 다시 묶여져야 합니다. 물론 이전처럼 언어적인 끈에 본질적인 끈이 묶여질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인 존재는 언어적인 체계에 의해 자신이 만들어진 현실, 자신의 ‘소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요. 때문에 자아는 이 현실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소외를 감추게 됩니다. 언어적 체계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소외시키는 겁니다. 자신의 소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소외에 대한 태도를 선택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자신임을, 자신이 소외된 현실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상황임을 선언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소외된 자신을 소외되지 않았다고 믿으며 그 어디에도 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셈이기에,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환상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끈은 단순히 소외된 끈이 아니라 자아가 스스로 엮어낸 끈입니다. 수동적으로 소외된 나, 거울 이미지에 현혹된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의 환상을 만들어낸 능동적인 모습입니다. 소외된 주체이지만 본능적인 주체이기도 한 제3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 나는 계속해서 나의 끈을 묶고 다시 풀어내면서 나의 모습을 항상 새롭게 만들어갑니다. 마치 대상체와 해석체가 지시대상을 두고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기호를 만들어내는 퍼스의 ‘무한 순환하는 기호작용’처럼 현실과 나는 내가 아닌 나로서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모습이 인간의 고유한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본질적인 나에서 대타자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나, 언어라는 구조에 편입된 나로 이동하며 단순히 발전하는 게 아니라 이 두 가지 모습이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만들어내는 모습이 나라는 겁니다. 김상환 님은 이것이 바로 태극이 무극이고 무극이 태극이 되는 음과 양의 순환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와 타자가 순환하는 과정 속에서 묶고 풀기를 반복하며 항상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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