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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와 현대인의 현실 그리고 디자인

미스트는 평온하던 시골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안개와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밀려들어와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줄거리의 영화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28일 후’나 ‘인베이젼’과 같은 요즘 유행하는 공포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등장인물들의 갈등 관계에 초점을 맞춘 심리극이자,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의 태도에 빗대어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놓은 지형도이기도 합니다. 괴물과 싸우거나 도망 다니는 모습 보다는 괴물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태도와 갈등에 주목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지를 탐구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고하는 듯한 태풍이 몰려와 주인공의 집과 그 주변을 초토화 시켜버리면서 시작됩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주인공은 옆집 변호사와 함께 망가진 집을 수리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고 거기서 밀려들어오는 안개를 만나게 됩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밀려드는 안개 그리고 그 속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주인공을 비롯한 외지사람들과 마을주민들은 근처의 슈퍼마켓으로 도망치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도망쳤는지조차 모릅니다. 단지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가리는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위험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슈퍼마켓에 잠시 몸을 피한 것뿐입니다. 어떤 존재감이 느껴지지만 그 무엇도 보이지 않기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안개... 이러한 상황은 어쩌면 현대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리기에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보고 전자현미경으로 나노의 세계를 보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해 그 무엇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자신의 도구로 만들어 통제하려는 인간에게 이 세계는 결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현실, 자신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한 그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의 눈에 지워진 한계, 이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없다는 현실은 인간에게 부여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분석하고 통제하기 위해 과학과 이성을 사용하지만, 결국은 다시 마을을 덮친 안개와 같은 현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나중에 밝혀지지만 마을을 덮친 안개는 미군소속 과학자들이 다른 차원과 이어지는 통로를 뚫자 거기로부터 이 세계로 밀려들어온 것이었죠.)
영화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네 가지로 형태로 분류해 보여줍니다. 물론 현대의 사상은 크게 보자면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겠지만, 이성적인 모습도 이념과 현실이라는 관점의 차이가 있고, 비이성적인 모습도 주체와 객체라는 위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기에 네 가지로 구분해 놓은 것 같네요. 먼저 주인공 옆집에 사는 변호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직 이성과 증거만을 중요시하는 딱딱한(?) 이성을 대표합니다. 다음으로 주인공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을 우선시함으로써 고대 로마인과 같은 이상적적인 인간상을 대표합니다. 그 다음으로 현실을 자기식대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광신적인 여성과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이성적인 선택을 통해 슈퍼마켓에 비유되는 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에 떨게 만드는 폭력적인 부류로 비춰집니다. 마지막으로 하급노동자와 그와 같은 대중은 만용을 부리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광신적 분위기에 휩싸여 사람을 죽음에 내몰기도 하는 등 슈퍼마켓의 불안을 가중시키기는 부류로 그려집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 첫 번째 딱딱한 이성의 부류는 주인공이 괴물의 존재를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증거부족을 이유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가 괴물에게 모두 당해버리는 딱한(?) 모습을 보여주고 맙니다. 증거를 중시하지만, 현실은 눈에 보이는 증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증거라는 과학적 결과를 통해 전지전능한 신이 되려 하지만, 한계를 가진 인간의 눈으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정의하고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그런 현실을 부정하는 이성의 말로를 보여주죠.
두 번째 이상적 이성의 부류는 관찰하고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괴물을 막기 위해 바리게이트도 쌓고 기름에 적신 대걸레 등의 무기를 준비해 두기도 합니다. 항상 상대방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죠. 하지만 모든 것이 보이지 않고 불확실한 현실, 안개에 덮인 현실 속에서 그들의 노력은 그다지 큰 성과가 없습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대안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슈퍼마켓을 혼란스럽게 하는 변호사나 광신도를 보며 그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나서서 상황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하는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자니 자신의 자유가 억압되고, 상대방의 자유를 억압하자니 자유를 존중하는 자신의 신념을 부정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는 이들의 행동에 많은 제약을 가하게 됩니다. 자발적인 참여를 중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올바른 것임을 증명할 때에만 사람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물에 대항할 마땅한 무기가 없는 슈퍼마켓이라는 상황에서 리볼버 한 자루에 의지한 그들은 괴물에게 당한 부상자들을 위해 약품을 찾으러 나갔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동지를 잃어버리는 실패를 통해 슈퍼마켓이라는 세계에서 소외되고 맙니다. 현실적이지만 현실 너머를 생각하지 않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최선(슈퍼마켓을 나와 차에서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안개를 벗어나기-결국 실패)을 다한 후에는 자살을 택하고 맙니다.
세 번째 광신도 부류는 안개라는 현실의 두려움을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으로 이겨내려 합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도 대처하기 힘든 일을 비이성적인 신앙에 기대어 신의 심판을 이야기 하는 그녀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신앙이 자신만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증거 되고 하나 둘 사람들을 모으게 되면서 슈퍼마켓의 사람들은 점점 더 그녀를 따르게 됩니다. 어차피 이성적인 대안이 없으니 비이성적인 모습으로나마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을 제시하는 그녀에게 희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광신적인 그녀로서도 자신의 광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증거를 보여줄 필요가 생깁니다. 결국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현실적 대안이 없는 그녀로서는 신의 사자로 믿어지는 괴물에게 제물을 바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의 심판을 믿는 자에게 신의 심판에서 벗어날 길은 신에게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제물을 바치는 것뿐이니까요. 사실 그들에게 닥친 현실이 신의 심판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기에 그 이유를 신의 심판이라고 이야기해도 부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 없기에 믿음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단지 무엇을 믿을 것인지가 문제가 될 뿐이죠. 여기에 이성적 사고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자신의 신념과 희생만 있으면 충분하기에 한 번 믿음이 생긴 사람은 끝까지 이를 고수하고 대를 이어가게 됩니다. 광신도였던 부인이 죽자 그녀를 대신해 또 다른 부인이 주인공 일행에게 저주를 퍼붓듯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지고 이어지게 되죠.(혹시나 오해가 생길 것 같아 밝힙니다. 저는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종교인에 가깝지만 어쨌든 기독교인으로서 성삼위일체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를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광신을 이끌어내는 부류에 대해서 혐오할 뿐입니다.)

네 번째 대중의 부류는 그저 맘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가련한 양과 같은 무리들이지만... 그 힘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들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슈퍼마켓이라는 세상의 분위기와 모습이 달라져 버리고 마니까요. 그들은 아무것도 못 하지만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개인으로서는 괴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만, 함께 모이면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자신만을 생각할 뿐, 집단으로서 행동하거나 사고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대중은 자신들을 이끌어 줄 그 누군가를 요구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들의 지도자는 어떻게든 그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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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현실, 그리고 과학과 이성의 한계... 때문에 사람들은 ‘신비’에 몰두하는 지도 모릅니다. 외계인이나 고대의 비밀과 같은 오컬트occult에 집착하는 건 그만큼 현실과 현실의 대안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무엇을 하든 우리는 영화 속 안개와 같은 이 ‘안개’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다만 포기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삶, 이 세상에 내던져진 자신의 존재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만이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영화 초반, 슈퍼마켓으로 도망친 후 자신의 두 아이를 위해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던 여인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 그리고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이 세계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기름이 떨어진 차 안에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아들과 일행에게 방아쇠를 당겼던 주인공처럼... 홀로 살아남아 자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안개를 해치고 나타난 군대를 보며 오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초반에 자신의 두 아이를 위해 용감히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여인이 자신의 두 아이와 함께 구출된 모습을 보며 형용못할 괴로움에 고함을 지르며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물론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만들어낸 탱크와 군인들을 필요로 했다는 점은 이 영화의 매력을 조금 반감시키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이성의 신앙이 아닌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그렇기에 디자인도 희망일 수 있는지 모릅니다. 과학과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군대에 의지해 이계의 생물들을 극복하는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과학과 이성에 의지해 디자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만드는 디자인이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잊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독단 속에서 목숨을 잃은 변호사와 광신도가 되지 않는 것, 자신이 아는 최선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해 좌절하고 생을 포기하는 주인공처럼 되지 않는 것, 두 아이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디자인에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요?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그 이루어질 수 없음(타인을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없음)에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이 아닌 실천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며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만들려 하는 것이 우리의 디자인에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삶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디자인을 만들며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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