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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의 패션세계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것 중의 하나가 바로 대중문화이며 복제 이미지가 대량 생산된 문화 상품들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똑같은 복제 이미지가 대량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은 1960년대 팝아트에서 비롯되었고 패션에 있어서도 60년대 팝 아트에 영향을 받아 헐리우드 스타들이나 스포츠 영웅들의 얼굴이 프린트된 T-셔츠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잡지와 텔레비젼과 같은 대중매체에 의한 예술의 보급에 시발점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앤디 워홀"이다.

그는 팝아트의 선두적 작가일 뿐만 아니라 화가, 사진작가, 저자, 철학자, 텔레비젼 프로듀서, 영화제작자, 사교계명사, 디스플레이어, 패션일러스트레이터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여 부를 누렸다.
그의 팝아트적인 작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패션계에 종사하여 많은 영향을 미친것에는 소홀이 다루어졌다. 여기서 다룰것은 여러 작품활동들 중 그가 현대 패션에 미친 영향과 그의 패션관을 알아보기로 하자.

워홀룩의 이미지 근원은 헐리우드이다.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요소(의상, 화장, 헤어스타일, 빛)들이 영화나 사진에 의해서 포착되었고 명성과 미를 얻고자 하였던 열망이 헐리우드 스타들 사진의 페티쉬적인 수집을 통해 나타난다.

워홀이 수집한 헐리우드 스타들의 스틸 사진을 그가 어떻게 해석하고자 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950년대에는 사진 그 자체로 발표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스타들의 사진에 이미지를 발췌하여 실크스크린 작품으로 제작하였는데, 주로 스타들의 시대의 매혹적인 미의 이상과 그 뒷면에 숨어있는 스타들의 개개인의 삶의 그늘을 표현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합성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웅장한 그림으로 나타내거나 패션디자이너들에 의해 의상으로 제작되어 모델 또는 헐리우드 스타들에게 입혀졌다.

<사진>
1. 1962년 25가지 컬러의 마를린 먼로
2. 지아니 베르사체의 마를린 드레스를 입은 나오미 킴벨
3. 비비안 탐의 마오 드레스와 국적불명의 캠프벨 수프 캔 드레스


패션에 있어서 워홀의 역할은 제작자가 아닌 관찰자 였다. 즉, 그의 패션 작품에 구어체의 견고한 은유를 사용하였으며 시각적 즐거움에 기초한 관찰력으로 패션의 특수성을 나타냈다. 물론 자신의 작품을 그대로 프린트한 소재로 의상을 제작하여 선보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제작자의 입장이 아닌 일회적인 것이었다.

McCall을 위한 디자인'Who's Who in Holiday Hat'에서 패션작품에 대한 그만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는 모자들은 각각 뚜렷한 개성과 형태를 갖고 있다. 과거의 추억과 현대적인 특성을 잘 혼합하고 있으며 기존의 스타일 이었던 권위와 보편성으로부터 새로운 머리스타일을 창조하였다. 캐주얼 하며 액세사리를 달지 않았던 단순한 스타일의 의복이 유행한 1958년경 패션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워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복제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갖고 있어 대중적인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
1. 워홀의 콜렉션인 넥타이 스커트를 붙힌 진 재킷
2. 워홀의 S & H 그린 스탬프 블라우스. S & H 우표를 모티브로 실크스트린한 작품


1950년대 가장 유명한 오뛰꾸뛰르 디자이너는 파리의 크리스찬 디오르와 발렌시아가 였다. 이 시기의 워홀 패션 취향은 평범하지 않은 것이 었으나 패션분야의 비전문가였기에 패션예술로 불려질 만큼 우수한 오뛰꾸뛰르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평범하지 않으나 대중적인 경향은 1950년대 미국의사회 분위기와도 일맥 상통한 것으로 워홀의 놀라운 패션재능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당시 영부인인 아이젠하워 부인의 비엘리트적인 의복취향을 통해서도 미국패션의 대중 취향적인 성향을 알 수 있다. 파리의 오뛰꾸뛰를 '파리에서 비롯된 원조(Paris Origial)'라 하는데 비해, 미국 출신 디자이너 스타일은 비 엘리트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미국적이면서도 워홀의 작품특성과 일치하는 대중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패션리더로서의 워홀 의복 스타일은 변화무쌍했으며 유행의 관례적인 정의에 순응하지 않았고, 유행의 선두그룹으로 알려진 예술가들과도 차별화 되었다. 즉, 자신의 의복 스타일 연출에 있어서 주체성을 변화시켜 카멜레온같이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시간과 장소를 인식하며 미묘한 개성을 추구하였다. 그만의 개성적인 의복스타일들은 그의동료들도 그와 함께 같은 이미지로 독특한 스타일을 형성하여 유행의 선두그룹이 되었다.

특히 1963년에서 1968년까지의 은빛공장(silver factory)시기 동안 워홀과 그의 동료들의 의복스타일 및 작품활동이 대중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들만의 독특한 매력은 반복해서 유행되었고, 오뛰꾸뛰르의 디자이너에 의해 참고되었으며, 고가품의 독특한 매력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에게 거리 패션(street fashion)으로 영향을 주었다






<사진>
*앤디워홀이 즐겨입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의상들. 워홀룩(WARHOL LOOK)이라고 불리던 이 차림들은 청바지에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정장풍의 쟈켓의 코디룩으로 당시 여피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 패션으로 인정받았다.*

1969년 그의 나이 42세에는 월간잡지 'interviw'를 창간하여 패션에 대한 관심과 가치관을 피력하였다. 워홀과 그의 동료들이 착용하였던 의복스타일의 이미지가 팝문화의 주된 흐름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것으로 나타났던 까닭에 패션 산업체 제조자들과 대중 소비자들은 이러한 룩을 통해 하위문화를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70년대에 등장하였던 펑크패션과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스트리트 스타일의 대중확산에 시발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아가 최근 해체주의 패션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된다.








워홀의 룩은 계속해서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인기있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패션으로 나타났으며, 최근의 잡지나 영화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1975년 그가 창조한 컵-업 드레스는 후에 레이카와쿠보나 마틴 마지에라의 비구성 드레스에 영향을 주었다. 즉 앤디워홀이 해체주의 패션의 전조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즉, 워홀은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계를 선도하였던 것처럼 그가 착용했던 의복을 포함한 패션스타일에서도 시대의 흐름을 앞서 패션리더로써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앤디워홀은 대중들의 기호를 선도하는 시대의 리더로서 그만이 표현할 수 있었던 룩과 이미지로 새로운 스타일을 형성하여 미술가의 미술활동을 포함한 일련의 활동이 패션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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