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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매체-도상의 ''바라보기''와 ''바라보아짐'', -이승연 사건을 보며...

얼마 전 “종군 위안부라는 의미 있는 주제를 갖고 ‘여인’의 장중한 삶의 표현을 통해 한.일 관계의 역사적인 재조명의 의미를 지니는 서사적 작품” 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당연히 네티즌들의 분노와 언론과 통신업체의 차가운 냉대로 이미 물의를 일으켰던 기획자와 모델도 삭발과 사죄를 하고 사진도 불태움으로써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고요.
하지만 누구도 그러한 계획이 왜 “종군위안부라는 의미 있는 주제”를 담은 시각적 매체라고 주장되어지는 것이 ‘매국적’인 것인지, “역사적인 재조명의 의미”가 ‘현실의 헤게모니를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냥 넘어 가더군요. 그 당연함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할 것들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랬기에, 이렇게 안이한 기획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일 수도 있겠죠.
특히 이번 사건은 사진이라는 시각매체가 가지는 상징과 기호에 대해 즉, 도상의 성격을 띈 시각매체가 가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미에 대해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을 하게 만듭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는 지식들을 아무렇게나 자기 멋대로 이야기만 하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버젓이 판을 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우리의 모습때문일런지도 모르죠. 그래서 어설프게나마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이에 두고, 그 의미와 그 의미를 본다는 행위를 ‘바라보기’와 ‘바라보아짐’이라는 두 개의 시점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합니다.

시각적인 모든 것들은 ‘보는 사람’-관객의 눈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이 ‘읽혀짐’은 정적으로 ‘포착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2차원으로 구성되어진 관념의 기호는 그 자체로 3차원적인 사물로써 표현되며, 이는 다시 시간의 차원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고 볼 때, 이 과정에서 관객은 매 순간마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읽혀‘지는 것들이 정지되어 있다 할지라도)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는’것은 ‘바라보게’되는 모든 것들을 뜻하지는 않겠지요. 순간마다 지나치는 모든 것들을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의미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여하니까요. 그리고 그 의미라는 것이 가지는 속성은,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가 질문하고 설명하는 모든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삼단논법 뿐 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문형 속에 이미 질문과 답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면- 어쩌면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라보게’되는 것들을 정의하거나 혹은 정의된 것들을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바라보아’야 하는 것들을 주어진 상황 하에서 해석하고 확인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것은 ‘바라보아’짐을 당하는 시각물의 시각적인 장치를 해석하는 것이며, (해석이란 주어진 상황을 주어진 정보에 따라 정의내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라보아’짐을 당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가 원하는 ‘바라보아짐’의 시각과 같은 관점에 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시각물이 ‘바라보는’ 관객으로서 시각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시각매체든 관객이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관점만이 의미를 지니고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종군 위안부라는 의미 있는 주제를 갖고 ‘여인’의 장중한 삶의 표현”했다고 주장된 도상적시각물-사진을 단순한 상업적 누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결과로서 그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요. 왜? 우리의 몰상식 함 때문에? 혹은 몰지각 함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간의 존재입니다. 도상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시간성-이야기’, 즉 ‘바라보아’짐을 당하기 위해 관객을 ‘바라보는’도상(관객이 도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도상이 원하는 관객의 위치에 관객이 서야 한다는 것이며, 도상은 이를 위해 관객에게 관람의 위치를 지시하고 그러한 자리에 선 관객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겠지요.)과 ‘바라보는’관객사이의 시간, 다시 ‘바라보아’진 관객이 ‘바라보게’되는 도상과의 시간, 그리고 그 두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 매체인 도상 속의 시간이 서로 연계되어 일어나는 시니피에의 변증법, 혹은 차연의 문제라고 해도 되겠지요.
이러한 문제를 던지는 화두, 도상은 자체에 내재된 이야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을 포착하여 화면에 투사되어진 것으로, 관객의 ‘바라보아’짐에 의해 도상에 내재된 질서, 혹은 무대의 시간성이 가지는 의미가 해석 되어지는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결국 관객에게 ‘바라보기’의 순서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이 모든 과정은 결국 ‘현재’라는 시간(도상이 ‘바라보아’지는 시간으로서의 현재)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도상과 관객 사이의 현상-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바라보기’는 결국 ‘과거를 재현’하는 과정(과거부터 축적되어진 기호에 대한 정의)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도상을 ‘바라보는’ 행위란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관념의 기호들을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겠죠.(아무것이나 다 ‘해체’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이때 ‘바라보아’지는 대상으로서의 도상 (혹은 재현 속에 내재된 시니피에)은 실체로서의 사물이 아닌 실체에 대한 관념이며, 관념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사물들 그 자체라고 한다면, (여기서 관념은 기호와 연결되며, 기호는 사물과 연결되고, 기호의 원 대상과 기호화된 대상에 대한 개념을 연계한다고 볼 때) 도상의 기호는 사물 또는 기호화된 대상의 개념이 표출되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바라보고’자 하는 그 어떤 것이겠죠.
그렇다면, 사진-도상 속에서 종군위안부라는 기호는 실제의 종군위안부와 종군위안부라는 개념을 같이 연계하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자 하는, 아니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기표로서(단순히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의 의미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현실에서 종군위안부는 이 사회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권에 대한 피해자로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한, ‘수취인불명’의 시대에 수취인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으로서의 드러냄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종군위안부라는 개념은 인권이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비인도적이며 모욕적인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을 뜻하며, 이에 따라 종군위안부는 보호되어야 할 대상으로 정의됩니다. 여기서 이 둘을 연계하고 있는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되는 도상에서의 종군위안부라는 기호가, 기호의 실재나 개념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껏 공개된 사진만을 가지고 본다면 사진의 노출 수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누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바라보아’짐의 의미는 누드 이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개된 몇몇 사진의 구성을 보면 단순히 ‘대동아전쟁’당시의 ‘과거의 재현’이라는 무대장치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단지 이것이 ‘있었다’라는 객관적 현상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도상의 속성은 ‘바라보아’지는 것이고, 그것을 유도하며 관객이 ‘바라보아’야 할 위치를 ‘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바라보아’지게 되는 것은 특정 모델이 아닌 기호로서의 종군위안부라는 개념이며, 실재로서의 종군위안부입니다. 보호되어야할 대상,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분들이지요.
그리고 이 드러냄은 자신의 치부자체가 아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게 하고 인권을 능멸 당해야 했던 그 순간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진-도상 속에서의 모델, 도상이 ‘바라보아’짐을 당하고자 하는 위치는 종군위안부라는 피해자가 당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재현이며,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모습 자체를 ‘바라보기’입니다. 일견으로는 “종군 위안부라는 의미 있는 주제를 갖고 ‘여인’의 장중한 삶의 표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종군위안부라는 여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었고 우리는 종군위안부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 ‘바라보기’의 자리가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종군위안부라는 기호가 가지는 부정적 의미 때문입니다. 실재의 종군위안부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수치를 느끼는 위치에 있기도 하려니와, 도상에서 표현된 무대안의 종군위안부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웠던 바로 그 당시 상황의 치부를 보여주어야 하는 자리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강자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이 벗겨지는 약자의 위치입니다. 자신의 인권마저도 벗겨지는 위치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도상 안과 밖의 시선, 기표에 대한 기호와 실재의 상호연계성-즉, 도상의 ‘바라보기’와 ‘바라보아’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번 누드사진-도상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바라보기’의 자리가 단순한 ‘한 관음성향의 남성’으로서의 위치가 아닌 가해자로서 그것도 식민지 시절의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당시의 우리나라 여성을 착취의 대상, 약자의 위치로 놓고 ‘바라보는’ 위치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제공된 ‘바라보기’가 거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강자의 위치에 우리가 서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단지 돈을 내면 되니까요. 그 누구라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겠죠.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역사적인 재조명”의 2편은 게이샤가 주제로 잡혀 있었고, 일본에서의 판매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 되지 못했다면, 당시의 위치에서 강자로서 군림하던 일본군대와 약자로서의 종군위안부는 “역사적인 재조명”을 받아 ‘종군위안부’는 ‘게이샤’가 되어 일본 남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강자의 영광을 제공할 뻔 했더군요. 만일 계획되로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향수가 돈의 힘으로 다시 한번 영광을 발하고, 그 당시의 영광을 위한 일본인들의 아비튀스는 아드레날린을 분출했었겠죠.

(위와 같은 입장에서 자료사진은 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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