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의 눈으로 다시 고지서를 바라보기 위해 기존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분석은 물론, 에너지와 관련해 스마트 그리드나 에코 마일리지 같은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다양한 관련 프로그램도 조사를 실시했고, 친환경 미래 주택을 표방한 건설회사가 시행 중인 에너지 절감 전략에 관한 정보도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리고 한국전력공사의 전기요금 고지서, 서울시가 발행하는 각종 세금 고지서,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이 도입되어 호평 받았던 KTF나 KT, 현대카드가 만든 고지서 등도 조사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사례들도 수집·분석되었다.
영국의 런던일렉트릭시티 에너지 카드. 영국의 일부 공동주택에서는 에너지 사용자가 필요한 만큼의 전기에 해당하는 비용을 에너지 카드에 미리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불 측정기 제도를 운영한다. 미터 판독기도 필요 없고 별도의 청구서도 없으며, 내가 얼마만큼의 전기를 사용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연구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만난 사람들도 아파트 주민과 경비, 환경미화원, 관리소장 같은 아파트 관련 직원들은 물론이고, 한국전력공사, 에너지관리공단 같은 정부 기관의 종사자, 미술가, 인류학자, 행동심리학자, 광고회사 디자이너, 통신사 마케팅 담당자, 카드회사 디자인팀 직원, 방송사 그래픽디자이너 등 정말 다양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며 일일이 의견을 들었다. 실제로 사용자들의 전기 사용 행동 패턴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일도 수행되었다. 4인/3인/1인 가족 구성원별로 전력기기를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면서 사용자 FGI(focus group interview)를 통해 고지서를 받는 순간부터 폐기하는 순간까지 자세히 기록하는 고객 여정 맵도 작성했다.
1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의 가장 큰 특징은 이해관계 당사자는 물론이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참여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나간다는 것이다.
2 실제로 4인 가족이 각각 7일간 다양한 전력기기를 사용한 빈도수를 조사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각화한 그래픽 자료. 필요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시각화시키는 작업은 서비스디자인 영역에서도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사용자로부터 ‘빅 아이디어’를 도출해내다
이렇게 연구자들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서비스디자인 방법을 동원해 수집된 자료들은 최종 분석 과정을 통해 다음과 같이 12가지 아이디어로 정리되었다.
1. 레드/그린/옐로 컬러를 이용한 경고
2. 정보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에너지 사용량 시각화
3. 에너지 관련 비용이 세금(전기세)이 아닌 내가 사용한 것에 대한 비용임을 명확히 하는 용어 사용(전기 에너지 사용료)
4. 동일 평수의 이웃집과 사용료 비교
5. 동일 평수 이웃집과의 비교 등수 표기
6. 누진세에 관한 정보 제공
7. 전년도 동월 사용량 비교
8. 구체적인 에너지 절약 실천방안 시각화
9. 3번 이상 평균 에너지 사용량을 초과한 경우 에너지절약 실천 가이드북 제공
10. 에너지를 절약한 사람에게 인센티브 제공
11. 불필요한 정보, 중복된 내용 삭제 등 새로운 정보 재배치
12. 고지서를 감성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캐릭터 사용
이렇게 구체화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전문가 집단들이 좀 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실제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연구자들은 고지서 디자인 콘셉트를 ‘반갑고 기다려지는, 궁금하고 보고 싶은 고지서’로 잡고 구체적인 고지서 디자인 개발을 시작했다.
한정된 지면 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들만 골라 최대한 알기 쉽게 시각화해서 집어넣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5개의 디자인 시안을 만들었고, 사업 적용 시범 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서 최종 결과물을 도출해냈다.
다양한 사용자 중심 서비스디자인 방법을 적용해 얻은 아이디어를 적용해 탄생한 새로운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 디자인 최종안(전면, 뒷면).
디자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움직이게 하다
실제로 디자인이 바뀐 고지서가 에너지 절약을 위한 행동으로 연결되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2011년 1~3월까지 방배 아트힐 588세대를 대상으로 시범 사업이 시행되었다. 과연 고지서 디자인을 바꾼 것만으로도 실제로 전기를 덜 쓰게 될까,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시범단지의 에너지 사용률이 전국 평균 대비 7.2~12.2%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재디자인한 고지서의 효과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던 곳은 고지서가 꽂힌 각 세대 우편함 앞에서였다.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 세대(레드), 보통 수준으로 사용한 세대(옐로), 절약한 세대(그린)가 어떤 세대인지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의 컬러로 명확하게 한눈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컬러가 주는 정보가 주민들로 하여금 나도 모르게 경쟁심리를 느끼게 한 것이다.
디자인을 바꾼 고지서는 멀리서 컬러만 봐도, 우리 집의 전기 사용량이 평균보다 많은지 적은지, 다른 집과 비교했을 때 어떤 수준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은근히 경쟁심리를 유발하는 이 전략은 실제 에너지 사용 절감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지서 내에도 비슷한 평수의 이웃집과 전력사용량 수치가 비교가 되고, 우리 집이 작년 동월 대비 더 많이 썼는지 적게 썼는지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지서를 통해 정보를 인식하고, 전기를 좀 더 아껴 써야겠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새롭게 바뀐 고지서 디자인은 에너지관리공단 주관으로 아파트 절약형 고지서 사업을 통해 계속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2013년 8월 현재 전국 약 100만 세대가 개선된 고지서를 받았다. 현재도 이 고지서는 계속 보급되고 있으며, 2017년 목표는 500만 호라고 한다.
실천적 에너지 절감사업으로 실제 적용되고 있는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와 개선된 공동주택 통계 웹 개인화 페이지 디자인.
사업에 참여한 최미경 교수와 김장수 책임연구원 모두 “아이디어나 문서상의 그래픽디자인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속에서 적용되어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유발시켰다”라는 점을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의의로 꼽는다.
‘디자인’이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용자의 시각으로 문제를 다시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이 이 사업의 또 하나의 큰 의미일 것이다. 앞으로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이 적용될 미지의 영역이 어디가 될지 사뭇 기대가 되고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