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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1916~1988)

최정호는 활자에서 사진식자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한글 원도 설계와 연구에 몰두한 1세대 글꼴 디자이너이자 연구가이다. 최정호와 같은 원도 설계자가 등장하기 이전의 ‘손조각 활자’는 실제 크기의 씨글자를 활자조각가가 도장을 파듯 새겨서 만드는 방식이었다. 반면 ‘원도 활자’는 자, 컴퍼스, 가는 붓, 잉크 등과 같은 레터링 도구를 이용해 한 글자씩 설계한 원도를 바탕으로, ‘자모 조각기(matrix cutting machine)’가 활자를 깎아 주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바늘을 탑재한 자모 조각기는 활자의 크기를 자유롭게 확대 축소할 수 있었고, 작은 크기의 활자도 정밀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원도를 설계할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활자를 만들어 내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활자의 완성도는 활자를 조각하는 사람이 아닌 원도 설계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졌으므로 그들을 바로 글꼴 디자이너 1세대라고 부를 수 있다.

 

최정호는 오늘날 많이 쓰이는 본문용 디지털 글꼴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특히 명조체와 고딕체는 그의 땀과 노력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컴퓨터 화면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굴림체도 그의 작업이다. 한글로 글을 읽고 쓰는 대부분의 사람은 책을 읽을 때, 컴퓨터를 할 때, 길거리를 걸으며 수많은 간판을 볼 때마다 최정호가 남긴 유산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큰 공로에 비해 그의 삶과 작업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원도 설계 중인 최정호

(출처 : <마당>, 1981년 10월호)

 

원도 설계 중인 최정호

(출처 : <한국인>, 1986년 10월호)

 

어린 시절과 일본 수학기 

 

최정호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글씨 쓰기에 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은행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일곱 개의 글자를 써서 건네주고는 퇴근 후 검사를 했다. 어린 최정호는 처음에는 마지못해 붓을 들었지만, 어느 날부터 재미가 붙어 스스로 더 많은 숙제를 청하게 되었다. 교동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 학교에 간 날, 글씨 쓰기 숙제를 검사하던 담임선생이 다짜고짜 최정호의 따귀를 때렸다. 숙제를 부모가 대신 써 주었으리라 착각한 것이다. 결국, 최정호는 담임선생과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글씨를 써 보여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최정호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진학했다. 뛰어난 글씨 쓰기와 그림 그리기 실력을 눈여겨본 미술 선생의 권유로, 그는 졸업 후 인쇄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낮에는 인쇄소에서 석판 인쇄, 오프셋 인쇄, 그라비아 인쇄 등 다양한 기술을 배웠고 저녁에는 요도바시 미술학원에서 부족한 공부를 채웠으며, 재일교포를 위한 영화 자막을 쓰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완성도 높은 활자를 보며 인쇄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글자 형태 그 자체가 아름다워야 좋은 인쇄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는 청년 최정호에게 완성도 높고 아름다운 한글 활자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최정호 활자 서체 연구소(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민간 최초의 원도 활자, 동아출판사체 

 

최정호의 한글 원도는 ‘동아출판사체’로부터 시작한다. 1955년 동아출판사 창립주 김상문 사장이 민간 최초로 ‘벤톤 자모 조각기’를 도입하면서 최정호를 찾아왔다. 당시 최정호는 귀국 후 서울에서 운영하던 인쇄소를 6·25 전쟁으로 모두 잃고, 대구로 내려와 작은 문자 도안 사무실을 하고 있었다. 책 제호를 쓰거나 대학 교재, 입학 시험지 만드는 작업을 주로 해왔기에, 몇천 자나 되는 활자 원도를 설계하자는 말에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찾아와 설득하는 김상문의 열의에 힘입어 함께 서울로 향했다. 활자 원도 제작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이렇다 할 스승도 없고 참고할만한 책도 없었다. 꼬박 1년 동안 동아출판사 숙직실에 기거하며 2,000자를 그렸지만, 실제 활자로 만들어 인쇄해보니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후 여러 번의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다가 1957년 마침내 활자 한 벌을 완성했다. 김상문은 최정호가 설계한 원도 활자로 <새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등을 출간했고, 이 책들은 뛰어난 완성도와 높은 가독성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최정호는 그 후로도 꾸준히 동아출판사 활자 개발에 힘을 쏟았고, 삼화인쇄, 보진재, 금성출판사 등 다수의 출판사에서 원도 주문이 잇따랐다.

 

당시의 상황을 <대한출판문화협회 30년사(1977)>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동아출판사의 활자 개량은 인쇄 기술 면에 큰 혁신을 가져왔고, 또 활판 인쇄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이로써 인쇄업계는 새로운 진통기가 시작됐다. 활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시설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동아출판사의 독점물인 듯했던 활자 개량 사업은 순식간에 민중서관, 대한교과서, 삼화, 광명, 평화당 등 여러 업체로 퍼져, 60년대 초의 왕성한 전집물 제작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최정호 동아출판사체로 인쇄된 지면

(출처: <세계문학전집> 중 <펠릭스 크룰의 고백>, 동아출판사, 1959)

 

가로쓰기 균형의 사진식자용 한글 원도 

 

원도 활자 시대가 열린 후 인쇄 업계에 또 한 번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은 일본에서 도입된 사진식자기였다. 사진식자는 사진기와 타자기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네거티브 필름 및 유리 글자판을 만든 다음 렌즈를 이용해 글자 크기를 확대 축소해서 인화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장체, 평체, 사체 등으로 변형하는 것이 자유로워 활판 인쇄보다 능률적이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하지만 사진식자기 도입 초기에는 한글 글자판이 없고 한자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지 못했다. 1960 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의 사진식자 회사 모리사와는 사진식자 전용 한글 원도를 최정호에게 의뢰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 업계의 경쟁사였던 샤켄 또한 최정호에게 원도 제작을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두 회사 모두가 최정호를 찾아온 것만으로도 당시 한글 원도 설계자로서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활판용 원도 제작에 익숙했던 최정호는 사진식자용 원도 제작 방법을 다시 익혀야 했다. 이전과 비교하면 잉크의 번짐이 적기 때문에 글자 줄기를 조금 더 두껍게 그리는 등, 새로운 환경을 고려한 원도 설계가 필요했다. 1971 년 그는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에 있던 모리사와에 가서 사진식자 관련 기술을 배우고 한글 원도를 그렸다. 1972 년부터 모리사와 명조체와 고딕체를 세, 중, 태, 견출, 각각 네 가지 굵기로 설계했다. 샤켄 역시 최정호를 통해 샤켄 명조체, 고딕체를 비롯해 굴림체와 그래픽체, 공작체 등 수십 종의 글꼴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품질이 우수하고 다양한 표정의 최정호 원도를 탑재한 사진식자기가 국내에 널리 보급되어 활판 인쇄를 대체하게 된다.

 

샤켄 사진식자기용 한글 유리 글자판

 

최정호의 사진식자용 원도는 가로쓰기를 중심으로 한 균형을 완성했다는 면에서 동아출판사체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래 그림을 살펴보면 동아출판사체는 받침의 맺음이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세로쓰기 균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샤켄 중명조와 모리사와 중명조에서는  받침의 중심이 이전보다 가운데를 향해 이동한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는 가로쓰기 균형에 적합하도록 고심한 흔적 중 하나이다. 또한, 모리사와, 샤켄의 원도는 같은 명조체이지만 서로 다른 구조로 설계되었다. 샤켄 중명조는 비교적 속공간이 좁고 글자 줄기가 두꺼우며 붓의 부드러움이 돋보인다. 반면 모리사와 중명조는 속공간이 더 크고 글자 줄기는 가늘고 예리하며 붓의 흔적을 잘 다듬어 정제된 느낌이 든다.

 

최정호 부리 계열 비교(위에서부터 동아출판사체, 샤켄 중명조체, 모리사와 중명조체)

 

초특태고딕체 그리고 마지막 원도 최정호체 

 

최정호는 말년에 새로운 형태의 글꼴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중 하나인 ‘초특태고딕체’는 견출고딕보다 한 단계 더 굵은 민부리 계열(sans serif ) 글꼴로, 네모틀 안에서 최대한 획을 두껍게 그려야 했기 때문에 ‘ㅃ’ 등과 같이 줄기 수가 많은 경우 굵기를 가늘게 조절하여 속공간을 적절히 안배하고 지면의 농도를 맞추었다.

 

초특태고딕 (1985), (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 소장

 

‘최정호체’는 1978년부터 잡지 <꾸밈>의 ‘최정호 한글 조형 원리’ 연재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디자이너 안상수의 의뢰로 개발되었으며 최정호가 타계하기 직전인 1988년 완성되었다. 안상수는 최정호가 만든 수많은 글꼴에 한 번도 그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의 마지막 원도를 최정호체라 지었다고 한다. 두꺼운 원도 용지에 연필로 글자의 외곽선을 그리고 잉크로 속을 채운 후 부족한 부분은 흰색 잉크로 덧그려서 마무리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별도의 종이에 그려서 오려 붙이는 등 시행착오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약 1,300자 남짓으로 국내에 남아 있는 그의 원도 중 가장 많은 글자 수이다. 기존의 명조체와 비교했을 때 최정호체는 글자의 가로 너비가 좁고 첫 닿자의 크기가 크며 글자 줄기는 조금 두껍게 설계되었다.

 

최정호체 (1988),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 안상수 소장

 

최정호의 원도와 오늘날 디지털 글꼴 

 

최정호는 원도활자시대에 활판 인쇄용 원도를 설계해 세로쓰기 글꼴의 완성도를 높였고, 사진식자판 원도를 그려 가로쓰기 글꼴의 균형을 제시했으며, 명조체, 고딕체와 같은 본문 글꼴에서부터 굴림체, 환고딕체, 공작체, 그래픽체, 궁서체 등의 목적과 용도에 따른 다양한 글꼴을 개발했다. 말년에는 글꼴 조형 원리와 구조 분석을 통해 한글 글꼴 디자인의 기초 개념을 정리했다. 이렇듯 한글 글꼴 디자인은 최정호가 다져놓은 바탕 위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해 왔다.

 

오늘날 출판 업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sm 글꼴을 만들어낸 당시 신명시스템즈 사장 김민수는 품질 높은 디지털 글꼴을 만들기 위해 최정호의 원도가 탑재된 사진식자기에서 글자를 인쇄해 그것을 똑같이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실제 최정호의 샤켄 중명조는 sm 중명조로 모리사와 중명조는 sm 신명조와 sm 신신명조로 재탄생하여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최정호 원도 제작 도구

 

‘본문용 활자는 공기이고 물이며 쌀이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곧 우리 생활 속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쉽게 그 가치를 느끼기 어려운 존재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책을 읽을 때마다 명조체를 설계한 최정호의 노고를 생각하자고 말한다면 지나친 이야기일까. 그 답은 오늘날의 명조체와 똑 닮은 최정호의 원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최정호의 원도를 바라보며 100년의 풍파에도 변하지 않은 글꼴을 만들어낸 그의 재능과 노력에 후배로서 한없이 숙연해진다. 이제는 그가 다져놓은 바탕을 넘어 조금 더 넓은 곳에서 꽃을 피워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최정호 원도 모음 포스터(타이포잔치 2011)

 

*자료출처 : (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 /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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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은유 

글꼴 디자이너이자 연구자이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최정호 한글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활자공간을 거쳐 현재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현재 안상수와 함께 최정호에 대한 책을 쓰며 최정호체 개발을 진행 중이다.

Tag
#디자이너 열전 #최정호 #노은유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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