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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찬 (1929 ~ )

일러스트레이터 홍성찬은 오늘날 어린이 그림책 작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까지도 <토끼의 재판>(글/그림, 2012, 보림), <아빠는 어디에?>(글/그림, 2009, 재미마주), <할아버지의 시계>(그림, 2010, 느림보), <여우난골족>(그림. 2007, 창비) 등 1~2년에 한 권씩 그림책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어린이 그림책 분야에서 쉽게 접하게 된 것은 90년대 후반에 일어난 그림책 발간 붐과 함께였다. 그가 9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그린 그림책 <단군신화>, <땅 속 나라 도둑괴물>, <집짓기>(이상 보림)와 <재미네골>(재미마주) 등은 우리만의 정서를 가진 그림책에 목마른 독자에게 단비와 같은 작품들이었다.

 

1975년 문우사가 펴낸 <소년소녀 세계위인전기전집> 중 '율곡' 편

 

하지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어린이 책 분야에서 홍성찬의 이름은 70년대 중반부터 어린이 위인전과 같은 전집류에서 간간이 발견될 뿐이다. 전쟁 후부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그는 지난 80년대까지 주로 신문과 잡지의 성인물 삽화가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 무렵의 활동에 관해서는 <디자인 DB>와의 인터뷰를 참조할 만하다.)

 

일찍이 '삽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출판계의 수많은 굴곡과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해온 홍성찬만의 그림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일러스트레이터 홍성찬과 한국의 초창기 일러스트레이션 상황

 

해방과 함께 붐을 이룬 어린이 잡지 창간으로 우리만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멋진 인쇄물을 만들어보고자 열망한 출판 기획자와 문인, 화가들은 새로운 창작 마당을 얻었다. 새롭게 복간된 <어린이>는 물론 <진달래>, <아동구락부>, <어린이나라>와 같은 월간지와 윤석중 등이 기획한 그림책 무크 <그림동산> 등이 마치 일제 치하의 억압 속에서는 보여줄 형편이 되지 못했던 어린이를 위한 화려한 인쇄물을 이제는 한번 제대로 보여주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 멋지게 세상에 등장했다. 김용환, 김의환, 김태형, 임동은, 정현웅, 백영수, 박종하 등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만화가, 화가, 삽화가의 이름들이 대거로 등장하던 시절이다. 전쟁과 함께 일장춘몽처럼 사라진 '비주얼'한 이들 잡지의 전통을 그나마 이어나간 것은 <소년세계>, <학생계>, <새소년> 등과 같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종합 교양 월간지였다.

 

한편 이 무렵에 나온 성인잡지 <희망>, <야담>, <아리랑> 등은 지난 80년대 초까지 이어오는 우리 나름의 잡지문화의 원형과도 같았다. 홍성찬, 이승만, 이순재, 전성보 등의 이름은 바로 이런 성인용 문학잡지에서 자주 발견된다. 앞서 소개한 어린이 교양지와 70년대 붐을 이룬 어린이 전집류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김태형이나 김영주, 송영방, 김광배, 이우경 등의 이름이 친숙했는데, 이들 모두 70년대부터 인기몰이를 한 신문의 다양한 연재소설 삽화가로서 다시 한 번 독특하고 수준 높은 그림 마당을 펼쳐 보인다. 이처럼 어린이 책 분야만 보더라도 우리에겐 정말 많은 훌륭한 어린이 책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보니 유독 홍성찬만이 그림책의 시대에 살아남은 셈이 되었다.

 

잡지의 시대, 신문 삽화의 시대를 뛰어넘는 홍성찬만의 역사 그리기

 

‘홍성찬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민속ㆍ풍물화 기행’ 시리즈

 

필자가 지난 2003년부터 기획을 시작해서 2006년 5권으로 완간한 ‘홍성찬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민속ㆍ풍물화 기행’은 그만의 독보적인 지식과 기술을 집대성한 기획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필자와 작가는 출판사 공간을 나누어 쓰며 함께 책을 준비하였다. 작가 홍성찬은 언제고 한번 이렇게 우리나라의 독특한 풍물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고증'에의 관심을 집중해서 풍속도로 그려보고 싶어 했고, 필자도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시작할 수 있었던 일이다.

 

출판 분야만 보더라도 많은 기록과 기억, 또 역사물들이 있을 터인데 유독 홍성찬만이 생산해낼 수 있는 '이미지'가 있었다. 과연 어떤 것일까? 그의 그림은 '찾아서 연구하고', '떠올려 보고', '타당하게 상상해낸' 것들이다. 그만의 성실함과 본질에 다가가는 진실함 그리고 우리만의 정서에서 떠올려 볼 수 있는 유머와 융통성이 집결된 이미지라는 뜻이다. 그는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서 수많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책 <국학도감>(1968년 일지사)이나 일본 여행에서 구한 비슷한 장르의 도감들을 들추어보거나, 직접 도서관과 성균관에 찾아가 이것저것 살펴보는 일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차분하게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방식이라 하겠다.

 

<괴나리봇짐 지고 세상구경 떠나 보세> 중 얼음 채취 장면 묘사

 

자료를 '찾아서 연구하고' 기억을 '떠올려 보는' 과정이야 이해가 어렵지 않겠지만, '타당하게 상상해낸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가령 앞서 말한 '민속ㆍ풍물화 기행' 중 4권 <괴나리봇짐 지고 세상구경 떠나 보세>를 보면, 옛 선인들이 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한강에서 채취하는 장면이 있다. 홍성찬은 아주 어렸을 때 한강에서 겨울이면 사람들이 얼음 뜨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전체 분위기는 기억이 나지만 당시 무슨 도구로 어떻게 얼음을 잘라서 들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그 장면 하나를 못 그리고 자료만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그는 가만히 자신이 그 시절 대장간에서 보았던 여러 도구들을 떠올리며, 그 당시 느낌으로 도구를 디자인해보기로 하였다. 실제 석빙고에 보관할 얼음을 한강에서 떠내는 이미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한 상상으로 없었던 이미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옛이야기를 그리다 보면 이런 일이 수도 없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그는 먼저 고증을 거치고 그래도 해답이 없으면 그 시대로 돌아가 스스로와 논리 싸움하듯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를 자연스레 옛날로 인도하는 이미지 하나를 완성해 내는 것이다.

 

삽화가에서 그림책 작가로, 그만의 성품과 유머를 그리다

 

많은 사람들이 홍성찬을 꼼꼼한 표현의 '사실주의자', 발로 뛰는 '고증주의자'와 같은 수식어로 표현하지만, 그를 유머러스한 감각의 소유자라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홍성찬이 자신만의 구수한 유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처럼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기량과 지혜 그리고 생명력은 그만의 유머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필자의 부친과 같은 연배의 어른을 함부로 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필자는 그로부터 '평화와 신뢰'의 성품을 느껴왔다. 홍성찬은 너그러운 만큼 꼼꼼한 성품을 지녔으며, 엄격한 만큼 유머러스한 성격을 지녔다. 그의 이런 성품을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재미네골>과 <아빠는 어디에?>이다.

 

<재미네골> 중 용궁 샘물을 마시는 용왕 신하

 

원래 중국 길림성의 조선족 설화에서 따온 '재미네골' 이야기는 이 책보다는 더 단순한 구조였다. 책에서는 등장하는 인물의 직업을 다양하게 각색하였고, 여기에 용왕과 용궁 신하들의 모습이 홍성찬만의 방식으로 재미있게 더해졌다. 가령 그는 물속에 사는 물고기 형상의 신하가 뭍에 나와 나다니면 숨쉬기가 불편할 것 같아 고민하다가, 용궁 샘물이란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뭍에 나와서도 숨 쉬게 하는 이 용궁 샘물은 이야기에 그저 양념만 더해준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정말 흥미로운 그림책이 되게 해준 발명이었다. 그만의 꼼꼼한 생각과 유머가 더해진 대표적인 예인 셈이다. 한편 <아빠는 어디에?>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노새가 자기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던 당나귀 아저씨의 얼굴을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 속에서 발견하는 그림이 있다. 그 뒤편으로 노새의 아빠인 당나귀와 주인 할아버지가 넌지시 노새를 바라본다. 이런 섬세한 유머와 애정이 홍성찬의 세계에 깃든 백미로서의 정서라 하겠다.

 

<아빠는 어디에?>의 마지막 장면.

 

화려한 그림책 시대에도 살아 있는 '논픽션' 정신

 

홍성찬의 '논픽션' 정신은 지금 우리 시대에 매우 독보적이다. 매년 독창적인 그림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논픽션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를 살펴보면 자연 생태를 도감 식으로 그리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전문화가 되어 있지 않다. 가령 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기계공학의 테크니컬 일러스트레이션 등 전문 영역 분야의 일러스트레이터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와 과거라는 이름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홍성찬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있기에 이 분야는 아직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젠가 ‘나는 항상 옛날만 그리니, 요즘 일러스트레이터처럼 어떤 이야기에 요즘의 아이들과 동물이 나오는 새로운 그림에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옛날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듯한 그림이야말로 그가 아니면 아무도 그려줄 사람이 없기에, 이제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 잡지와 신문의 흑백 삽화의 시대를 넘어 호화 그림책의 시대에도 살아남아 자신만의 이미지를 지켜온 홍성찬의 가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홍성찬의 주요 작품과 수상내역

<정배와 아가> 1991 - 제1회 어린이문화대상 미술부문

<단군신화> 1995 - 제 16회 한국어린이도서상 특별상

<집짓기> 1997 제 17회 한국어린이도서상 일러스트레이션 부문

<난중일기> 1996

<땅속 나라 도둑 괴물> 1996

<허준과 동의보감> 1998

<재미네골> 1999

<돌다리> 2000

<선비 한생의 용궁답사기> 2004

<홍성찬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는 민속.풍물화 기행_전 5권> 2006

<여우난골족> 2007

<아빠는 어디에> 2009

<할아버지의 시계> 2010

<토끼의 재판> 2012

<지팡이 하나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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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백

그림책 작가, 기획자. <쥐돌이는 화가>,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토끼탈출>, <민화그림책 시리즈>, <재미마주 어린이미술관> 등 다수의 그림책을 쓰거나 그렸으며, 기획했다. 작가로 또 출판기획자로 뉴욕타임스 베스트 일러스트레이션(2003), 볼로냐 그래픽상(2006), 스웨덴 피터팬 상(2012) 등 수상. 현재 도서출판 재미마주 대표.

Tag
#디자이너 열전 #홍성찬 #이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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