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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화 (1942 ~ )

1990년 정시화 교수 연구실. 애플 LC-Ⅱ를 사용하던 시기였다.

 

1987년 수업시간에 만난 교수 정시화의 이미지는 내쇼널 지오그래피의 포토그래퍼를 떠올릴 법한 차림새였다. 정장을 입은 풍채 좋은 교수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무엇 하나 호락호락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실기실이 아닌 강의실에서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과목이었다는 점만으로도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 이후에도 잡지와 책에서 그의 글을 자주 접했다. 이미지가 가득한 디자인 출판물 가운데 그나마 글을 쓰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디자인평론가 정시화’라고 불리곤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디자인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디자인평론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다. 디자이너에게 걸맞은 타이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분야에서 사용하는 잣대를 그대로 디자인이라는 수식어만 붙여서 사용하는 것, 그런 상투적인 활용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디자인 본색’. 이것은 디자이너도, 디자인평론가도 아닌 정시화의 활동을 설명할만한 표현이다.

 

걸출한 디자인 결과물을 내놓지도 않은 그를 ‘디자이너 열전’에 소개하는 이유는 ‘디자이너는 작업으로 말한다’는 논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말하는 디자이너’라고 하면 억지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가르치는 디자이너’로서 정시화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디자인론을 가르치던 초기의 필사본 교재 원본 

 

미간행된 디자인론 교재 원본

 

국내 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론이라는 과목이 생긴 것은 1968년 서라벌 예대(중앙대 미대의 전신)였다. 백태원 교수가 과목을 개설하고 강사를 찾던 중에, 서울대 유근준 교수의 소개로 자신이 처음 디자인론을 강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사로서 먼저 한 일은 스미스코로나 타자기를 구입한 것이다. 타자기로 직접 해외의 디자인 이론서들을 집약한 교재를 만들어 첫 디자인론 수업을 시작했고, 1973년에 서울대에 개설된 디자인론 수업까지 교재 만들기를 이어갔다. 이 교재의 내용은 보완을 거듭해서 1980년에 <현대디자인연구>로 출간되었다.

 

 

(좌) 정시화, <현대디자인연구-현대디자인의 이론적 배경>(미진사, 1980) 표지

(우) 정시화, <한국의 현대디자인>(열화당, 1977) 표지

 

이미 그 이전에 정시화는 허버트 리드의 <아트 앤드 인더스트리(Art and Industry)>를 번역하고 <한국의 현대디자인>을 썼다. 안식년에 런던에 머물면서 디자인박물관과 도서관을 매일 드나들면서 완성한 <산업디자인 150년>이 1991년에 출간되었으니 그를 저술가라 부를 법하다. 디자인 서적이 가물에 콩 나듯 나오던 시절이었던 터라, 디자인 저술가로서 그의 독주가 20년간 이어졌다.

 

정시화, <산업디자인 150년>(미진사, 1991) 표지 (디자인: 정시화)

 

그렇지만 그가 집필한 책들은 모두 교재였다. 디자인을 비즈니스로 바라 보았고 디자인의 가치를 국부론에서 찾는 시각을 지니기는 했지만, 특정한 이론을 주장하거나 에세이를 담은 책은 없었다. 글쓰기도 교육자의 입장에 맞추고 있었으니 ‘교수는 처음부터 교수’여야 한다는 정시화의 표현에 맞는 태도다.

 

교육에 대한 애착은 그의 대학시절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61년에 큰 기대를 안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 디자인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그 당시가 아직 디자인 교육 체계가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고 그만큼 학생으로서 갈증이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기’에 치중한 교육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친다는 것은 전수, 전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시화는 유명 디자이너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여전히 의문을 갖고 있다. 대학의 교육은 창작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전문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면 그 경험을 이론화해서 말로 가르쳐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즉, 교육에 대한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교육자로서 뜻을 품은 정시화는 실천의 첫 발걸음으로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72년에 대학 교수가 된 뒤, 정시화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사양하고 디자인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국민대학교가 BK21 사업을 수행하면서 테크노디자인대학원을 설립한 뒤에도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기업에서 디자인 프로젝트를 가져와 수업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산학협력 프로젝트에 관심이 집중된 오늘의 대학 정서와는 사뭇 다른 태도이기에 오해를 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정시화의 입장은 대학이 디자인컨설턴트와 경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사회에서 디자인전문회사를 세우고 디자인 컨설팅을 하는데 교수가 그들의 일을 빼앗아 오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색채디자인 교재 ‘60색상 색채시계’ (디자인: 정시화, 1999)

 

포스터 ‘한국 전통색채 상징 체계도’ (디자인: 정시화, 2003)

 

정시화는 서울대 응용미술과 시절부터 미술을 응용한다는 개념, 미술의 아류로서 디자인을 언급하는 것에 반발감을 갖고 있었다. 디자인의 자율성, 독자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인 텍스트가 있어야 했다. 60년대에도 디자인 정보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보에 접근할 문제 의식과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디자인 영역의 지적 아이덴티티, 창조적 아이덴티티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전문가가 갖는 마땅한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예컨대, 그린디자인을 이해하려면 생태환경에 대한 과목이 디자인 전공 수업에 포함되어야 마땅하고 색채를 알려면 색채디자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색채학’이라는 이름으로 색채 이론이나 색채 연구방법을 디자인 전공 학부생들에게 설명하는 것 보다는 색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적용 능력을 갖도록 스튜디오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정시화는 몇 가지 새로운 도전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샘의 서울디자인박물관 설립에 관여한 것이다. 그는 92년부터 박물관의 설립을 돕고 관장직까지 맡았다. 박물관 등록 요건에 맞게 컬렉션을 갖추는 데에도 힘을 썼고 디자인 전문 저널과 국내외 전문도서로 자료실도 갖추었다. 개인적으로는 큐레이터를 꿈꾸게 된 소중한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95년 그는 관장직을 사임했고. 당시에 신규 사업을 추진하던 한샘은 더 이상 박물관을 유지하지 못했다.

 

서울디자인박물관장을 역임한 1994년에 데사우 바우하우스 방문

 

또한, 그는 계원조형대학의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예술, 디자인교육을 위한 모델을 찾고자 했던 그로서는 큰 의미를 갖고 참여한 일이었다. 학생 개인별 공간을 제공하고 미래지향적인 전공 구성으로 판을 짰으며, 새로운 분야를 공부한 젊은 교수들을 임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방향을 설정했다. 학생이 대학에 들어와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자신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그는 복도에서 광고물을 배제하고 복도가 수업에서 진행되는 내용들을 마음껏 공유할 수 있는 보드가 되도록 했다. 또한, 디자인 교육에서 학문의 즐거움 또는 판타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동료 교수들과 ‘조형전’을 추진했다. 국민대가 입시 실기에서 구성 시험을 과감히 폐지한 것도 이런 변화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였다. 

 

1983년 더블린에서 열린 세계그래픽디자인협의회(ICOGRADA) 정기총회 모습. 가운데에 정시화(당시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그 왼쪽에 양승춘(당시 서울대 산업미술과 교수)

 

한편으로, 정시화의 입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는 모더니스트로서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여전히 경제성을 강조한다. 디자인의 재료와 프로세스도 경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윤호섭 교수와 함께 그린디자인 전공을 오랫동안 맡아왔다. 디자인에 관한 입장이 확고하다 보니 다양한 창작과 풍부한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디자이너에게 또 다른 결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오늘날 디자이너들이 연구자, 기획자, 작가로서 활동하는 판을 만들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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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상규

김상규는 (주)퍼시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껏 의자를 디자인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동안 ‘Droog Design’, ‘한국의 디자인’, ‘Laszlo Moholy-Nagy’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어바웃 디자인>, <의자의 재발견>, <착한디자인>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사회를 위한 디자인> 등이 있다.

Tag
#디자인 칼럼 #정시화 #김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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