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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제 (1935 ~ )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 전시회 모습. 맨 우측의 인물이 조영제이다.
*출처: 조영제 개인 소장 사진자료

 

초창기 한국 디자인 비즈니스 및 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던 교수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디자인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산업적 수요에 앞서 대학 교육이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업 아이덴티티(Corporate Identity, CI) 디자인 전문회사인 CDR의 탄생과 디자이너 조영제의 활동은 이러한 초창기 한국디자인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CDR은 197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교수인 조영제의 개인 연구실로 출발, '조영제 디자인연구소'의 영문인 'Cho Design & Research'의 약칭으로 통용되다가 1988년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Coordinating Dreams and Reality", 즉 ‘이상과 현실의 조화’라는 의미를 담게 되었다. 지금은 김성천 대표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1976년 3월에 신세계미술관에서 열린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는 디자인 전문회사로서의 CDR의 변모와 성장을 견인하면서 국내 기업계에 CI 붐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영제는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CI 개념을 국내 기업인과 일반인에게 이해하기 쉽게 알리고 그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이 전시회를 기획했다. 조영제가 기업과 정식 CI 개발 계약서를 작성하고 아트디렉터로서 디자인팀을 구성하여 기본 시스템만이 아니라 응용 항목까지 개발하여 마무리한 첫 프로젝트는 제일제당이다. 하지만 그가 CI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OB맥주 레이블 리뉴얼 작업부터다. 동양맥주에 자문을 하던 민철홍은 1972년에 동양맥주로부터 레이블 디자인 의뢰를 받고 동료 교수인 조영제, 양승춘과 함께 작업하였고 조영제의 아이디어가 최종 채택되었다. 동양맥주는 이 레이블 디자인을 회사 심볼마크로 확대 적용했는데 이 작업을 조영제가 맡았다.

 

OB맥주 심볼마크(1974) 

 

제일제당과 동양맥주의 CI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조영제는 이듬해인 1975년에 제일모직과 신세계백화점의 CI도 개발했다. 제일제당 CI에는 부수언, 양승춘, 이재철, 허영석 등이 참여했고, 제일모직 CI에는 양승춘, 김현, 구동조, 황부용 등이 함께했으며, 신세계백화점 CI에는 양승춘, 정시화, 최동신 등이 참여했다.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는 동양맥주, 제일모직, 신세계백화점의 CI 개발 사례를 정리하여 보여준 전시회였다.

 

좌: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 도록 표지 / *출처: 조영제 개인 소장 사진자료
우: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 전시장 모습 / *출처: 조영제 개인 소장 사진자료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 도록에 실린 OB맥주 CI
*출처: 조영제 개인 소장 사진자료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 도록에 실린 신세계백화점 CI
*출처: 조영제 개인 소장 사진자료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1976) 도록에 실린 제일모직 CI
*출처: 조영제 개인 소장 사진자료

 

최초의 민간 상업은행이었던 한성은행(1897)의 휘장이나 진로소주(1924)의 상표, 유한양행(1926)의 광고 사례에서처럼 일제강점기 기업들도 회사 상징을 사용하였고, 해방 후에는  해태제과나 미원, 종근당 등 소비자와 가까운 업종의 회사 심볼마크가 대중에게 친숙했다. 또한,  박재진이 서린호텔 이미지 편람을 제작하여 기업 이미지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에서 CI에 대한 인식은 전반적으로 매우 낮았다. 이러한 시기에 열린 ‘조영제의 디자인展: DECOMAS’ 전시회는 디자이너가 기업과 실제 진행한 개발 사례를 과정까지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로서 CI의 가능성을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데코마스(DECOMAS)’는 ‘Design Coordination as a Management Strategy’의 약자로, 일본의 CI 디자인 전문회사인 파오스 사의 나카니시 모토오 대표가 미국의 CI를 연구하여 1971년에 펴낸 책 제목이었다. 마침 이 책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국내 기업가와 경영전문가에게 주목을 받던 시기라, 조영제는 전시회 제목에 CI라는 말 대신 데코마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편 ‘조영제의 디자인展: DECOMAS’가 개최된 같은 해 12월에 조영제는 서울미대 학술지인 <조형> 창간호에 ‘한글기계화(타자기)를 위한 구조의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연구에서 ‘한글 타자기에서는 네모꼴 글자를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타자기에 적합한 글자꼴을 디자인해야 타자기로도 아름다운 한글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디자이너로서는 최초로 한글 탈네모꼴 모듈을 제안했다. 조영제 자신은 후속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으나 이후 김인철, 이상철, 김진평, 안상수, 한재준, 석금호, 구성회 등에 의해 탈네모꼴 글자 실험과 개발이 이어졌다.

 

 

‘한글기계화(타자기)를 위한 구조의 연구’ (1976)
*출처: <한국 디자인의 새벽> 전시회 자

 

1970년대 중반 그래픽 디자인계에는 세대교체 현상이 뚜렷해졌다. 산미협회전과 개인전을 개최하며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교만을 매료시켰고 서울미대에 출강하면서 조영제를 한 학기 동안 지도하기도 했던 한홍택이 이 시기 디자인계 은퇴를 선언한 반면에, 김교만과 조영제는 같은 해인 1976년에 각자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유학을 통해 디자인을 배운 이순석이나 한홍택과 달리 김교만과 조영제는 해방 후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한 디자이너들이었다. 동양맥주에 근무하던 노수영이 1954년에 개발하고 한홍택이 리뉴얼했던 OB맥주 레이블을 조영제가 다시 디자인한 것이나, 대통령 휘장은 한홍택이 디자인했으나 대한민국 문장은 민철홍이 디자인한 것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종의 세대교체였다고 할 수 있다.

 

협회 및 디자인 그룹의 활동도 다양해져서 해방 직후 창립된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외에 1960년에는 한국응용미술가협회가, 1966년에는 프리즘이 결성되었다. 1970년에는 한국현대디자인실험작가협회가 창립전을 개최하였고, 1972년에는 한국디자이너협의회 산하에 한국공업디자이너협회(INDDA), 한국시각디자이너협회(VISDA), 한국공예디자이너협회(CRADA) 등 세 개의 협회가 만들어졌다. 한국인더스트리얼디자이너회(KSID, 현재의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KAID)의 전신)와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의 전신)도 같은 해에 출범했다. 1993년 KSVD가 해산되기 전까지 조영제는 총 네 차례에 걸쳐 이 협회의 회장직을 수행하였고, 이후 1994년에 출범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의 초대회장과 1995년에 만들어진 한국디자인법인단체총연합회(KFDA)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협회 활동 역시 왕성하게 했다. 국제교류도 활발히 하여 1979년에 일본디자인학회 1호 해외 회원이 되었고 KSVD-JAGDA 교류전 및 해외 디자이너 초청 강연회를 추진하였다. 또한, KSVD 회장 재임 시절인 1983년에 국제그래픽디자인단체협의회(icograda) 가입을 성사시켰다.

 

좌, 우:  제 5회 KSGD 전람회에 출품한 자연보호 포스터 연작(1976)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제 16회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에 출품한 '자연보호' 포스터(1981)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조영제가 대학을 다니던 1950년대 중반 시기는 디자인과 공예의 개념이 구분되기 전으로 국전 공예부의 영향력이 커서 디자인 전공생들도 공예부에 출품했다. 조영제도 3학년 때 공예부 입선, 4학년 때 공예부 특선과 입선을 했으나 졸업 후 스스로 진로를 그래픽 디자인으로 정한 뒤로는 더 이상 공예 작업을 하지 않았다. 이후 정부가 디자인 진흥을 위해 제1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약칭 상공미전,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의 전신) 개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영제는 한홍택, 김교만, 조병덕, 염인택 등과 함께 제1부 상업미술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영제와 동기생으로 대학 시절 셋이 밤낮 몰려다닌다고 주위에서 일본어로 ‘세 마리의 까마귀’, 즉 단짝이라는 의미로 ‘삼바 가라스(三羽烏)’라고 불리던 민철홍과 한도룡은 제3부 공업미술부 심사위원으로 박대순과 함께 참여했다. 상업미술부, 공예미술부, 공업미술부 등 총 3부로 구성된 상공미전의 출범(1966)은 일제강점기 때의 선전 공예부와 해방 후 국전 공예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초창기 한국디자인이 시각디자인과 공업디자인을 양대 축으로 삼아 디자인의 제도적 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좌: ‘커머’ 상품 포스터 - 제 4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초대작가-심사위원 출품작(1969)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우: ‘비제바노’ 상품 포스터 -  제 7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초대작가-심사위원 출품작(1972)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좌, 우: 제 19회 대한민국디자인전람회에 출품한 코카콜라 포스터 연작(1984)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대학 졸업 후 조영제는 화신산업과 조흥은행에 근무하였고 중간에 잠시 개인 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한홍택의 추천으로 덕성여대 생활미술과 주임교수로 근무하다가 1965년 12월에 서울미대로 응용미술과로 자리를 옮겨 2000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조영제는 CDR을 중심으로 국내 수많은 기업의 CI를 진행했는데 ‘조영제의 디자인展: DECOMAS’ 이후 진행한 주요 작업은 다음과 같다: 제일합섬(1978), 한국외환은행(1979), 삼립식품(1980), 국민은행(1981), 대림산업(1981), 대한교육보험(1981), 한국산업은행(1981), 경기은행(1982), 동아제약(1983), 피어리스(1983), 한국투자신탁(1983), 동서식품(1985), 럭키(1984), 기아자동차(1986, 1993), 대우증권(1988), 충북은행(1988), 동남증권(1988), 이건산업(1988), 한국무역협회(1988), 한국장기신용은행(1989), 삼미그룹(1991), 삼성중공업(1991), 전북은행(1991), 데이콤(1991), 강원은행(1992), 현대건설 주택사업본부(1993), 아남그룹(1997) 등. 

 


좌: 외환은행 CI(1979) / *출처: <조영제의 그래픽 세계: 이상과 현실의 조화>
우: 기아자동차 CI(1986) / *출처: <조영제의 그래픽 세계: 이상과 현실의 조화>

 


기아자동차 CI(1993) / *출처: <조영제의 그래픽 세계: 이상과 현실의 조화> 

 

1982년부터 1988년까지 조영제는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디자인전문위원장을 맡아 디자인 전반을 총괄하고 공식 포스터와 스포츠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디자인전문위원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CDR의 운영 및 성공적인 CI 개발 경험을 통해 아트디렉터로서의 새로운 디자이너 상을 제시하며 강력한 리더십과 디자인 매니지먼트 역량을 보여주었던 조영제의 힘이 컸다. 조영제는 88서울올림픽의 이벤트 및 디자인 콘셉트 설정을 위해 윤호섭과 함께 <88서울올림픽 마스터플랜>을 작성하고 1982년부터 1988년 올림픽 개막 때까지의 연도별 시행계획을 마련하였는데, 이 계획서에는 올림픽에 필요한 각종 디자인 아이템들과 제작방법, 아이템별 지명 디자이너, 심사방법 및 심사위원, 프리젠테이션 및 홍보 방안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조영제는 로마올림픽의 판화 기법, 스톡홀름올림픽의 사실적인 기법, 도쿄올림픽의 컬러 사진, 뮌헨올림픽의 솔라리제이션 기법 등 역대 많은 올림픽 포스터들이 당대 가장 앞서는 그래픽 표현기법을 도입하여 제작되었다는 점을 파악하고, 88서울올림픽 공식 포스터에서는 컴퓨터 그래픽(CG)을 시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1983년 당시 국내 여건에서는 그러한 작업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영제가 스케치한 포스터 아이디어를 평소 교류가 있던 일본의 겐다 에쓰오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였다. 이 밖에도 CDR에 근무하던 조종현과 사진촬영을 담당한 유영우, 제판 및 인쇄를 맡은 광양사의 김동규 대표 등이 적극적으로 도와서 함께 포스터를 완성하였다.

 


좌: 88서울올림픽 공식 포스터(1985)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중: 88서울올림픽 스포츠 포스터(1988)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우: 대전엑스포‘93 공식 포스터(1991) / *출처: <한국 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정시화는 조영제 디자인의 특징을 ‘간결하고 절제된 형상성으로 시각적 메시지 전달, 구성주의적 논리성, 객관적인 사진처리, 하이테크 기법의 수용, 논리적 타이포그래피와 색채의 구성’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영제에게 있어서 디자인은 ‘생각하는 작업’이었고 그는 젊은 시절부터 디자인 콘셉트와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중시하고 항상 새롭고 합리적인 시각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찾고자 했다. 또한, 디자이너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던 1950년대 중반에 디자인을 공부한 조영제는 평생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그것은 디자인 분야가 하나의 독립된 전문 직종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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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현주

인하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전공 및 대학원 융합과정 문화경영학과 교수. [디자인사 연구], [한국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등의 저서와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965-1994: 디자이너-교수 3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이 있다.

Tag
#강현주 #디자인 칼럼 #조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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