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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균 (1932~ )

봉상균 

 

봉상균은 그래픽 디자인, 판화 등 꾸준히 개인 작업을 진행해온 디자이너 겸 화가이자, 1970년대 한국디자인포장센터(현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전신)에서 근무하며 한국 디자인의 제도적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던 인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해 온 여러 디자이너가 대학을 중심으로 교육과 현업을 병행해온 것과 달리, 봉상균은 디자인 정책 실무자로서 당대 한국 디자인 진흥 정책에 직접 기여했다는 점에 주목할 만 하다.

 

봉상균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동년배들보다 뒤늦은 1955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회화과에서 응용미술학과로 적을 옮기며 디자인과 인연을 맺었다. 졸업 후 그는 문화공보부의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미술실장으로 근무하며 무대미술과 영화 자막 서체를 디자인하였다. 이후 대구 효성여자대학교(지금의 대구가톨릭대학교)와 영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 연구상무이사로 옮겨가게 된다.

 

한국디자인포장센터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설립된 세 개의 디자인 관련 기관, 즉 (사)한국포장기술협회와 한국수출디자인센터 그리고 (재)한국수출품포장센터가 하나로 통합되어 설립된 정부 산하의 공식 진흥 기관이었다. 당시는 수출을 최우선으로 삼던 시대였고, 그만큼 수출 상품의 포장과 디자인 전략 개발이 절실했다. 이러한 시기에 봉상균은 국가의 디자인 사령탑인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 합류하며, 디자인 실무자의 눈으로 디자인 진흥 정책을 개발하고 펼치며 한국의 산업 디자인 여명기를 밝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2년 뒤인 1972년 봉상균은 다시 대구로 내려가 다시 후학 양성 및 지역 산업을 위한 디자인 진흥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당시 대구는 디자인의 불모지에 가까웠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섬유를 위시하여 지역 산업의 지형이 수출 중심으로 변화해 가던 중이었고, 그에 따라 디자인의 필요성에 관한 인식도 높아졌다. 이러한 요구 속에서 봉상균은 1973년 대구상공회의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처음으로 산업디자인연구실을 경북상공진흥관에 설치하고, 대구 및 경북 지역의 수출 산업체를 위한 디자인 자문 및 제품 카탈로그 제작을 진행하여 업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한편 대구백화점 등 지역 여러 기업에서 디자인 관련 근무자들과 함께 대구산업디자인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그는 경북과 대구 지역에서 학계, 산업, 디자인 현업계를 잇는 구심점이 되었다.

 

1978년 봉상균은 다시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연구개발 상무이사를 맡아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 아시아 국가와의 교류에 힘쓰는 한편, 유럽 및 세계 디자인 대회와 같은 국제 행사에 한국 디자인계의 대표 일원으로 참석하였으며, 협회 등 여러 디자인 관련 기관에 몸담고 왕성히 활동하였다. 이후 1983년 부터는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2010년 정년퇴임하였다.

 

'빙판 낚시'(1972) – 개인전 작품

 

'황색지대의 모듈'(1972) – 개인전 작품

 

이처럼 봉상균은 디자인 정책과 진흥, 교육에 힘써왔지만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판화가로서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왔다. 1965년부터 시작하여 2009년까지 이어진 개인전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선보여왔는데, 그의 작업은 미술과 디자인에 걸쳐 있다. 

 

봉상균은 직접 그리고 칠하며 작품에 고유함을 부여한다. 또한, 다양한 소재와 매체를 활용하며 디자인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였는데. 투명 아스테이지에 설탕을 첨가한 먹물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판화에 형광 잉크를 사용하고 알루미늄판으로 실크스크린 작업을 진행한 적도 있다. 한편 솟대, 규수방 등 민예물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는 한국의 정서를 현대적인 조형 감각으로 담아냈다.

 

'솟대외 항라"(1995)' – 개인전 작품

 

'규수방 이미지'(1990) – 개인전 작품

 

벽화와 포스터 등의 작업도 진행하였는데, 이촌역을 장식한 타일 벽화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세라믹 타일로 기하학적인 선과 사각의 평면을 구성하고 대담한 색채를 적용하여 벽화를 완성하였다. 1989년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포스터 작업에서는 인간의 주식인 밀빵을 주제로 모두가 서로 공경하고 나누는 은혜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당시 그는 2명의 디자이너와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40만 장의 포스터를 직접 인쇄하기도 했다. 

 


이촌역 벽화(1986)

 

이촌역 벽화(1986)

 


제44차 세계성체대회 포스터(1989)

 

여든이 넘은 지금도 그의 곁에는 연필과 트레이싱지가 자리해 있다. 근 50년 동안 봉상균은 잠시도 미술과 디자인 문화 영역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여러 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해왔지만,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며 겸손해한다. 마음은 큰 용단과 새로운 기백 찬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막상 그리고 나면 의기소침한 표현의 졸작이어서 탄식이 앞선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창작의 여정을 걷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기대와 기쁨이 깃들어 있다.

 

'패턴의 리듬'(2005) – 개인전 작품

 

'구조'(2012) – 단체전 작품

 

영화 [괴물]과 [설국열차]를 감독한 봉준호가 그의 막내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작업실과 서재를 드나들었던 덕분일까.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 콘티를 직접 그리기도 한다. 2009년 봉상균의 77세 희수 기념 개인전은 여느 때와 달리 가족전이 되었다. 그의 작품과 함께 딸 봉지희 교수의 섬유미술작품, 봉준호 감독의 영화 스토리보드 그리고 장남 봉준수 교수의 딸인 주연 양의 그림이 어우러진 3대 가족전이었다.

 

2012년 봉상균은 조영제, 한도룡 등 동료 디자이너와 함께 ‘디자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당대 한국 디자인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이다. 그는 한국디자이너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디자이너의 위상을 높이고 참여를 이끄는 데 앞장서왔다. 1994년에는 서울비쥬얼아티스트비엔날레 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이 단체는 현재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로 이어져 등재학술지 발간, 전시회 및 공모전 등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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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가천대학교 미술디자인대학 시각디자인과를 정년퇴임 하고 현재 가천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 초대디자이너로, 사단법인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교육부장관 표창과 대통령 옥조근정훈장을 수여 받은 바 있다.

Tag
#디자인 칼럼 #봉상균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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