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이 가장 많이 본 디자인 뉴스
국내 리포트
페이스북 아이콘 트위터 아이콘 카카오 아이콘 인쇄 아이콘

공병우 (1907~1995)

공병우는 1907년 1월 24일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났다. 안과 의사로서 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1926년 평양 의학 강습소를 수료하고, 조선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1936년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8년 9월에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공안과를 열었다.  1940년대에 처음으로 한글 시력검사표를 만들었으며, 1958년에는 최초로 콘택트렌즈 시술을 도입하고 국산화를 이루었다.

 

그는 또한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1948년 받침이 있는 한글에 적합한 ‘쌍초점’ 방식의 타자기(쌍초점 타자기는 활자가 찍히는 곳을 정확하게 고정되도록 파 놓은 홈이 두 개라는 뜻이다)를 고안했고, 1949년 최초로 자판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분한 세벌식 쌍초점 방식의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다. 1971년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와 함께 중국 시각장애인을 위해 주음부호 타자기도 개발했으며, 1989년에는 시각장애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한편 1972년에는 한글 영문 겸용 타자기를 개발하고, 1980년대  세벌식 글자판 타자기를 미국 교포 사회에 보급했다. 1988년에는 종로에 한글문화원을 설립하여, 한글의 정신과 원리에 맡는 한글 기계화 운동을 이끌었다.

 


1972년 개발한 공병우 한영 타자기

 

예술과 디자인을 ‘문화와 산업’, ‘순수성과 실용성’, ‘개인의 취향과 사회의 필요성’ 등의 차이를 들어 구분하곤 한다. 둘을 칼로 가르듯 경계를 나눌 수는 없지만, 역사 속에서 좋은 디자인으로 꼽히는  것은 대부분 인간과 사회의 필요에 따른 합리적인 판단과 행동이 낳은 결과물이다. 즉 좋은 디자인에서는 ‘이타심’ ‘숭고함’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을 전제로 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안과 의사 또는 한글 기계화 운동가 등으로 불리는 공병우는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디자이너 열전에 소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병우는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이타심을 가진 디자이너였다. 그가 만들어 낸 수많은 결과는 특허로 인정받았거나, 또는 지금까지 활자디자이너가 참고할 한글 자형으로 남았다. 

 

한글을 만나다

 

공병우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자를 배웠고, 일본인이 세운 신학교에서 조선어와 일본어를 배웠다. 그때까지도 한글에 관심을 두기보다 검정고시 시험에 필요한 일본 글에 더 치중했었다고 한다. 한글과의 인연은 1938년 그가 운영하던 병원에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치료를 받으러 온  뒤부터였다. 이극로 선생은 공병우에게 한글이 합리적인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고, 한글의 우수함을 깨달은 공병우는 눈병에 대한 글을 한글로 써서 무료 전단을 배포했다. 그리고 일본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 한글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초로 한글로 된 시력 검사표도 만들었다. 공병우는 40살이 다 되어 맞은 해방 뒤에야 비로소 한글을 정식으로 배웠다.

 

한글타자기를 만들다

 

공병우는 한글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문자라는 사실을 타자기를 만들면서 더욱 확신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의학을 가르치던 일본인이 물러가고 난 뒤, 의학 교육을 우리 손으로 하게 되었을 때, 공병우 역시 안과 교육을 위해 교재를 만들게 되었다. 공병우는 일본어로 된 <소안과학>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번역한 글은 두 명의 조수가 깨끗하게 정리해야 했지만, 조수들이 필기한 원고는 막상 알아보기 힘들어 다시 확인하거나 다시 써야 하는 번거롭고 더딘 작업이었다. 공병우는 타자기가 있으면 빠르게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한글 타자기를 연구한다.

 

당시 한글 타자기는 이원익의 5벌식과 송기주의 4벌식이 있었다. 이원익의 5벌식 타자기는 글자꼴이 예뻤지만, 글쇠가 80개나 되어 입력 속도가 너무 느렸고, 송기주의 4벌식 타자기는 글쇠가 44개여서 이원익의 타자기보다 빠르게 글자를 찍을 수 있었지만, 속도 면에서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두 타자기가 지닌 더 큰 문제는 모두 가로로 찍고 종이를 세로로 돌려서 읽는 방식이라는 데 있었다. 그때는 이미 한글학자들을 중심으로 가로쓰기가 독서에 유리하다는 논의가 활발했던 때여서, 초등학교 교과서가 가로쓰기로 발행되기 시작했었다. 공병우 또한 가로로 찍고 가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쌍초점

 

한글 타자기를 만들고자 했을 때, 가장 큰 고민은 받침의 처리였다. 알파벳처럼 글자를 치는 대로 옆으로 진행할 수 있다면 기존의 타자기를 고쳐서 별 어려움 없이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을 텐데, 한글의 받침과 ㅗ, ㅜ 등의 모음글자가 제자리에 찍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공병우는 두벌식 자판으로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의 구성원리를 표현하려고 했으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세벌식 자판으로 목표를 바꿔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쌍초점 타자기를 개발하게 되는데, 이 방식으로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받았다.

 

쌍초점 방식 예시

*출처 : http://pat.im/

 

미국에 출원한 쌍초점 타자기 특허 도면

*출처 : http://pat.im/

 

또한, 기존 타자기에서 자음과 모음 글쇠는 글 쓰는 방향과 같이 자음 왼쪽 모음 오른쪽에 놓였다. 하지만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분한 공병우의 글자판으로는 활자대가 충돌하여 빠르게 글자를 입력할 수 없었다. 결국 자음과 모음의 글쇠를 기존의 자판과 반대로 놓고 나서야 비로소 매끄럽게 타자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타자기로 그는 1949년 10월 전국 과학전람회에서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 언더우드 회사의 도움으로 1950년 3월에 3벌식 ‘공 속도 한글 타자기’ 시제품 3대를 제작하여 상품화를 완료했다. 하지만 바로 뒤 6.25가 일어나면서 상품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효율적인 공병우 타자기는 속도를 중요시하는 군대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공병우 타자기로 친 휴전협정서 

*출처 : http://pat.im/

 

자판을 진화시키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는 계속 진화했다. 글자 입력 속도를 높이고, 손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였다. 사용 빈도가 높은 글자를 검지 중지 손가락으로 치기 쉬운 자리에 놓고, 오른손이 왼손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자판을 배치했으며, 타자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오른손과 왼손이 자연스럽게 연속으로 자판을 두드릴 수 있게 개선하였다. 이 모두가 사람들이 타자기로 편리하고 빠르게 한글을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 만든 것을 스스로 다시 고치는 일은 자기 부정과 반성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 알고 있어도 실행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타자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을 생각했기에 공병우는 끊임없는 개선을 이뤄낼 수 있었다.

 

첫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개발한 뒤, 그는 글쇠의 위치를 계속 다듬어 빠르고 편리한 한글 입력 환경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1972년에는 기계식 타자기로는 유일하게 한글과 영문을 함께 칠 수 있는 한영 글자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공병우의 노력은 군사정권 아래서 좌절을 겪었다. 한글의 창제원리에 맞지 않고 표준 글자판을 정하는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지도 않았기에, 그는 정부 표준 글자판을 비판하며 이를 끝까지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회에서 합리적인 생각은 쉽사리 통하지 않았다.

 

공병우 한영 타자기 신문광고(1974년 6월 19일 <경향신문>)

 

한글 활자꼴을 변화시키다

 

공병우가 처음 만든 한글 타자기로 찍은 글자꼴은 조악했다. 첫 닿자의 바로 아래 받침 닿자가 찍히고, 홀자가 받침에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이 세벌식 타자기 글자꼴에 대해서 불평할 때, 그는 글자꼴은 예쁜 것으로 바꾸면 되며, 타자기의 본래의 기능인 속도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구조와 표현의 문제에서 구조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고, 타자기 본연의 역할에 집중한 결과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병우 타자기 글자꼴도 차츰 곱고 단아해졌다. 

 

1964년 장왕사에서 출판한 타자연습 책에 소개된 공병우 타자기 활자체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 글자꼴은 1990년 이후 제작된 많은 활자에 영향을 준다. 한글 활자의  전통적인 미감과 제작에 따라 만들어진 네모꼴 활자는 변하지 않은 채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활자들은 박경서와 최정호 등에 의해서 다듬어졌고, 지금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활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감히 다른 활자꼴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벌식 타자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탈네모꼴 활자는 최정호 이후 한글 활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어, 현재 만들어지는 대부분 활자는 탈네모꼴의 장점을 조금씩이라도 받아들여 제작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으로 더 많은 발전과 변화가 예상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씨를 뿌리다

 

1988년 공병우는 한글문화원을 열었다. 이즈음 매킨토시 컴퓨터를 이용하여 직접 직결식 한글 폰트(세벌식 자판의 글쇠를 알파벳 자판에 대입하여 만든 폰트를 가리킨다)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개발하였다. 또한, 젊은 프로그래머였던 박흥호와 함께 세벌식 최종 자판을 발표하는 등, 이외의 젊은 세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글디자이너인 한재준 역시 이 무렵 역시 한글문화원에서 공병우의 지도를 받았고, 한재준은 공병우의 세벌식 구조에 맞춰 뛰어난 안정감 조형미를 갖춘 활자 ‘공한체’를 만들어 냈다.

 

1990년대 초는 한글디자인 또는 한글 활자에 관한 이론이 없었을 때였다. 필자는 1992년 대학교에서 한글디자인 소모임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을 통해 한글문화원 그리고 공병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글문화원에서 배포된 여러 한글 활자에 관한 글은 한글을 공부하는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 이론이자 정신이었다. 

 

공병우 타자기 최종자판(1991)

 

1995년 3월 7일, 세상을 떠나다

 

이제 한글은 기계화를 넘어 디지털화되었다. 그 과정이 공병우가 원하던 한글의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을 밟지는 못 했지만, 그러나 한글의 특질에 근본을 둔 공병우식 한글 기계화의 정신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또 한글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고 이어질 것이다. 국내의 디자이너들 가운데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업적을 이룬 이들이 많다. 하지만 공병우처럼 구조를 설계하고 제작한 디자이너는 많지 않을 것이다. 공병우는 우리 삶에 필요한 수많은 제품을 기획하고 제작했으며, 한글 활자의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했고, 디자이너가 갖추어야 할 태도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

 

글. 이용제

1972년 3월 28일 출생. 한글디자이너로,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로 있다. 세로쓰기 전용 ‘꽃길’체, 환경을 생각해 만든 ‘잉크를 아끼는 글자’, 기업전용 폰트 ‘아리따’체, 클라우드펀딩을 받은 ‘바람’체를 디자인했다. 타이포그라피 잡지 <ㅎ>을 발행하고 있으며, 타이포그라피 교육 공간 히읗학원을 설립, 강의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글 한글디자인 디자이너>, 공저로 <한글디자인 교과서>가 있다.

Tag
#디자인 칼럼 #공병우 #이용제
"공병우 (1907~1995)"의 경우,
공공누리"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 이미지, 일러스트, 동영상 등의 일부 자료는
발행기관이 저작권 전부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있으므로, 자유롭게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목록 버튼 이전 버튼 다음 버튼
최초 3개의 게시물은 임시로 내용 조회가 가능하며, 이후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 임시조회 게시글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