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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순 (1917 ~ )

최정순. 1917년생, 강원도 안협 출생.
*출처: <지콜론> 2010년 10월호

 

최정순은 국내 최초의 원도 활자인 국정교과서체를 설계한 인물이자 신문용 본문 활자의 개척자이다. 1950년대 손조각 활자부터 원도 활자, 사진식자 그리고 디지털 글꼴에 이르기까지 그는 국내 인쇄 기술의 변화와 늘 함께했다.

 

최정순과 최정호는 이름과 활동시기, 그리고 하는 일까지 비슷하다 보니 간혹 두 사람의 이름을 헷갈리거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두 사람은 당대 업계의 동료이자 경쟁자였다. 원도 활자 시대의 양대 산맥으로 통했던 두 사람이지만, 최정호가 주로 출판 업계에서 활약했다면 최정순은 교과서용을 시작으로 신문용 활자를 만드는 데에 주력했다.

 

간혹 국정교과서용 활자 관련 기록에 박정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최정순의 증언을 따르면 전쟁통에 군인 가족 신분으로 바꿔서 우선적으로 피난 기차에 오르기 위해 박정래라고 가명을 썼고, 한동안 이 이름으로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경향신문사를 비롯해 서울신문사, 국정교과서용 활자를 개발할 당시의 이름은 박정래로 기록된 경우도 있다.

 

부산에서 시작한 경향신문의 손조각 활자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간 최정순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경향신문>의 제목 활자 조각을 시작으로 활자 업계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경향신문> 또한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지역 신문인 항도신문사의 인쇄 시설을 이용해 신문을 만들고 있었는데, 항도신문사의 활자로는 모든 원고를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락된 활자를 채우는 작업을 그가 맡았던 것이다. 이때는 아직 국내에 자모조각기가 도입되기 전이라 나무에다 손으로 글자를 깎아서 전기분해로 구리, 아연을 입혀 만든 전태자모(電胎字母)를 이용해 활자를 주조했다. 초심자였던 최정순은 자신의 활자로 인쇄된 신문 지면을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번이고 다시 고쳐 만들며 활자 조각에 능숙해졌다.

 

서울신문사의 목각공

 

1952년 그는 서울신문사에 주조부 목각공으로 입사해서 1년 7개월 동안 일했다. 그 당시 서울신문사는 매일신보가 사용하던 활자를 쓰고 있었는데 최정순은 간혹 비어있는 활자를 채워넣기 위해 손으로 조각한 전태자모를 제작했다. 그곳에서 일본에서 사온 우수한 품질의 자모조각기 원도 활자를 보고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원도 활자를 만드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하여 자모조각기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최현배와의 만남과 일본 연수

 

최정순이 실제 자모조각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최현배를 만나 국정교과서용 활자 설계를 맡으면서부터이 다. 국정교과서는 1952년 설립된 국영기업체로, 1955년 유엔 한국 재건단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와 유네스코가 원조한 10만 달러 로 영등포 대방동에 인쇄공장을 건설해서 교과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문교부에서 편찬하여 저작권을 갖고 제작 및 인쇄는 국정교과서에서 맡는 방식이었다.

 

서울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던 최정순은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 최현배에게 자모조각기를 연구하고 있는데 조각기용 바늘을 일본에서 사올 수 없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최현배는 마침 원도 활자로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서 일본에서 자모를 만들어올지, 자모조각기를 사서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 좋을지 고심하고 있던 터라 최정순에게 원도 활자 개발을 맡기기로 하고 그를 일본에 파견한다.

 

1954년 국정교과서 인쇄 공장 감독이었던 로즈웰과 최장수, 이임풍, 김인형과 함께 일본에 간 최정순은 대일본인 쇄주식회사, 돗판인쇄주식회사, 후지코시 자모조각기 회사 등 다양한 곳을 방문해서 견문을 쌓고 자모조각기 및 원도 활자 설계법 연수를 받은 후 4월에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가 37살이었다.

 

한글서체개발위원회와 국정교과서용 활자

 

최정순이 국정교과서용 원도 활자 개발을 하는 데에는 한글서체개발위원회의 도움이 컸다. 한글서체개발위원회는 국어학자 최현배를 비롯하여 공병우 박사, 대학 교수, 연구원 이임풍과 김인형 등 많은 사람이 국정교과서체 개발을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그는 일본에 연수를 다녀온 뒤인 1954년 5월부터 한글서체개발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는데 한달에 한번씩 원도를 가지고 어떤 것이 더 조화로운지, 균형이 맞는지에 대해 설명회 겸 발표회를 했다. 최정순은 자신이 짧은 경력임에도 위원회의 도움으로 좋은 원도를 그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6개월 안에 활자를 만들어야 했던 그는 시간에 쫓겨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기존의 방식으로 자모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어떻게 해서든 새로 배운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가는 바늘, 굵은 바늘을 이용해서 다른 굵기의 활자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자모조각기4대를 쉴 새 없이 돌려서 시간을 맞추었다. 국정교과서가 나오자 소문을 들은 출판, 인쇄 업계 사람들이 국정교과서에 견학을 왔고, 그중 몇몇은 파지를 슬쩍 주워가기도 했다.

 

아래 그림에서 최정순의 국정교과서체로 추정되는 1958년에 발행된 국민학교 교과서를 살펴보면 ㄴ, ㄹ 등의 이음줄기의 기울기가 급격히 올라가 있고 받침의 맺음이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세로쓰기로 쓰던 손조각 활자의 균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1958년 발행된 국민학교교과서 국정교과서체, 최정순의 활자로 추정된다.

* 출처: 김진평 논문(1990)

 

신문용 본문 활자의 개척자

 

최정순은 신문용 본문 활자의 개척자로 가장 잘 알려졌는데 인쇄소보다 신문사와 일하는 것이 제때 비용을 받을 수 있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는 1960년 자모공장을 차려서 원도 설계와 활자 유통을 겸했는데, 자모를 헐값에 빌려 가거나 수금이 잘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다가 자모조각기는 물론 원도까지 팔고 공장을 넘겨준 후 원도 제작에만 몰두하게 된다.

 

1962년 <한국일보> 자모를 시작으로 1965년 <중앙일보> 창간에 맞추어 활자를 만드는데 꼬박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것이 최정순이 처음으로 전량 납품한 신문용 활자였다. 한 장의 신문을 만들려면 한자와 한글을 합하여 최소한 5만여 개의 활자를 확보해야 하는데, 한자 활자는 일본에서 수입한 활자를 활용했고 한글 활자는 자모조각기로 부지런히 만들었다. 1968년에는 한국일보사  화재로 손실된 자모를 복원하는 작업도 했다.

 

최정순은 인쇄 방법의 변화와 글씨 쓰기 방향의 변화 등 다양한 변화 속에서 신문 활자를 만들었다. 1972년 경향신문사, 1982년 서울신문사, 1989년에는 내외경제신문사의 활자를 설계하며 적어도 10번 이상 신문 활자 설계를 반복했으며 이렇게 그 당시 수많은 신문활자가 최정순의 손을 거치게 된다.

 

신문용 본문 활자는 ‘편평체’라고 하여 가로로 넓적한 형태의 글꼴로 발달했다. 신문은 출판용과는 달리 지면이 더 거칠고 또 한정된 공간에 많은 정보를 담아야 하다보니, 작은 크기에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속공간을 키우는 것이 같은 크기에서도 더 커보였다. 또한 세로쓰기에서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서는 글자 높이가 낮은 것이 한줄에 더 많은 활자를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965년 발행된 중앙일보, 최정순의 활자로 추정된다.

*출처: 김진평 논문(1990)

 

교과서용 문화체육부 글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글꼴 업계에 사진식자에서 디지털 글꼴로 바뀌는 전환기가 왔다. 디지털 글꼴을 만드는 회사들은 기존에 사진식자로 인쇄된 책을 참고하여 글꼴을 만들었고 원도 설계자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다행히도 최정순은 본인의 원도로 바탕으로 한 디지털 글꼴 제작에까지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다. 1991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서체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초·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중심으로 한 글꼴 개발에 착수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박종국,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이기성, 연세대학교 교수이자 국어학자 홍윤표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다만 최정순이 직접 컴퓨터 작업을 한 것은 아니고 원도를 써 주면 컴퓨터 기술자가 아웃라인을 따고 그것을 최정순이 감수하는 방식으로 디지털화 했다. 1991년 문화체육부 바탕체와 돋움체, 1992년에 제목돋움체, 1993년에 제목바탕체가 출시되었다. 이들 글꼴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문화체육부 글꼴

 

최정순의 계보를 이은 문화체육부 바탕체(위)와 최정호의 계보를 이은 SM신신명조체 (아래)의 비교.

 

손조각 활자에서 디지털 글꼴에 이르기까지

 

최정순은 경향신문의 손조각 활자에서 국정교과서의 원도 활자, 그리고 문화체육부의 디지털 글꼴에 이르기까지 국내 인쇄 기술의 변화를 고스란히 겪으며 다방면에서 활약한 한글꼴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중에서도 문화체육부 글꼴은 다소 투박하면서도 정감있는 형태와 손의 움직임 및 붓의 필력이 살아있다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으며, 최정순에게 직접 감수를 받아 그의 계보를 이은 디지털 글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화체육부 글꼴은 쉼표, 마침표와 같은 기본적인 기호활자는 물론이거니와 숫자와 로마자조차 없어서 아쉽게도 오늘날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글 2,350자만을 개발했기 때문에 일부 단어는 쓸 수 없으므로 추가로 8,822자를 만들어 일반적인 한글 유니코드 범위인 11,172자를 갖춘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로마자 글꼴은 몇백 년에 걸쳐서 수많은 디자이너가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글자를 다듬고 만들어내고 있다. 최정순의 문화체육부 글꼴 도 다시 한번 갈고 닦아 새롭게 탄생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지난 해 일본 원도 활자 시대의 글꼴 디자이너인 코즈카 마사히코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떨리는 손으로 노트에 글자를 그려가며 꼼꼼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자리에는 일본의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지난 2010년 잡지 <지콜론> 인터뷰를 위해 최정순 선생님의 댁에 찾아갔을 때, 90세가 넘어서야  장만하셨다는 초라한 집에 홀로 계시며 이야기 하나라도 더 들려주시려고 온전치 못한 기억을 더듬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후배 디자이너로서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활자를 거쳐간 선생님의 주름 잡힌 손을 떠올리며. 그때도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최정순 선생님의 손

*출처: 지콜론 2010년 10월호

 

“내가 글씨 쓰면서 하고 싶은 얘기는 ‘글씨’라는 거야.

글의 씨. 밭은 사람의 마음이야. 씨를 사람의 마음에 심어.

그 밭에 따라서 시도 나오고 소설도 나오고 서체도 나오고 그 밭이 참 멋있지 않나?

글씨라는 게 멋있는 이름이야.”

- 최정순 인터뷰(지콜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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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은유

글꼴 디자이너이자 연구자이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최정호 한글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활자공간을 거쳐 현재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현재 안상수와 함께 최정호에 대한 책을 쓰며 최정호체 개발을 진행 중이다.

 

*사진출처

‘글자 역사의 한 페이지, 최정순’, <지콜론> 43호, 2010년 10월호(인터뷰: 이용제, 류양희, 노은유) ‘한글 활자체 변천의 사적 연구’, 김진평, <한글글자꼴기초연구>, 1990년, 한국출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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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칼럼 #최정순 #노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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