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계 안팎에서 ‘호돌이 아빠’로 널리 알려진 디자인파크 김현 대표의 디자인 이력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많은 공모전에 참가하여 디자이너로서의 감각과 역량을 스스로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가 당선한 첫 공모전은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5년제 학교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9년에 개최된 제일은행 창립 40주년 기념 전국저축포스터공모전이었다. 이때부터 1983년 호돌이 지명공모 당선까지 김현은 80여 차례에 걸쳐 국내 각종 공모전에서 잇달아 당선되어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공모전 최다 수상자로 유명했다.
1. 88서울올림픽 포스터 앞에 선 김현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2. 88서울올림픽 호돌이 기본형
3. 88서울올림픽 호돌이 응용형 포스터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제일은행 공모전 당선 포스터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을 ‘저축 버릇 여든까지......’라는 아이디어로 풀어낸 것으로, 김현이 받은 당선 상금 30만원은 역대 공모전 상금 중 가장 큰 액수였다. 이 공모전에 당선되기 전 김현은 2년간 30여 차례 작품을 출품했으나 수상에는 계속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연속된 낙방에도 실망하지 않고 공모전 공고가 나기만 하면 밤새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작업을 해서 출품했고, 비록 자신이 수상하지 못했더라도 당선작이 발표되면 심사평을 참고하여 그 작품이 당선된 이유를 분석하고 그로부터 개선점을 배우는 디자인 독학의 과정을 이어갔다.
4. 제일은행 창립 40주년 기념 전국저축포스터공모전 당선작 앞에 선 김현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5. 제일은행 창립 40주년 기념 전국저축포스터공모전 스케치
6. 제일은행 창립 40주년 기념 전국저축포스터공모전 당선작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경기공업전문학교 5학년 여름방학 현장실습 때 만난 디자이너 김효의 권유로 김현은 서라벌예술대학교(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신) 3학년에 편입을 했다. 대한민국상공미전에서 특선을 한 경력을 인정받아 장학생으로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후, 김현은 조영제디자인연구실(현 CDR의 전신)의 정식 사원 1호로 입사하여 1975년에 제일모직과 신세계백화점의 CI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조영제는 1960, 70년대 국내 각종 디자인 공모전의 단골 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김현의 뛰어난 역량과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대우그룹 디자인 고문 활동을 시작한 조영제는 김우중 회장을 만나 디자인 자문이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기획조정실 산하에 자신과 팀워크를 이룰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근무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 결과 당시 합동통신사 광고제작팀에서 근무하던 윤호섭과 조영제디자인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던 김현이 스카우트되어 대우 기획조정실 디자인 제작팀이 출발하게 되었다. 김현이 윤호섭과 함께 진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주식회사 대우의 기업 PR 신문광고 시리즈였다. 몇 년간 이어진 이 광고의 영향으로 다른 대기업들도 점차 기업 이미지 광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 대우는 무역과 수출을 주도하며 거침없이 성장하는 중이었다. 산하 계열사가 40개가 넘고 해외 지사도 한국 기업 중 가장 많았다. 윤호섭과 김현은 모기업은 물론 그룹 계열사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홍보물을 맡아 진행하였다. 신문광고, 잡지광고, TV광고, 포스터, 달력, 브로슈어 등 다루지 않는 매체가 없었고 디자인 제작팀 직원은 한때 60~70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규모가 나날이 커졌다. 1970, 80년대 대우 기획조정실은 대학을 졸업한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7. 대우 기업PR 신문광고 시리즈, 1976
8. 대우 기업PR 신문광고 시리즈, 1977
9. 대우 기업PR 신문광고 시리즈, 1978~1979
10. 대우 기업PR 신문광고 ‘세계 속의 대우’ 시리즈, 1982
11. 대학지 대우 기업PR 신문광고 시리즈, 1978~1980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12. 대우그룹 해외 잡지광고 시리즈, 1979~1980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13. 대우그룹 해외 잡지광고 시리즈, 1980~1982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김현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물론 88서울올림픽 공식 마스코트인 호돌이 지명공모 당선이었다. 1983년 마스코트 대상물 현상공모를 통해 확정된 호랑이를 형상화하기 위해,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디자인전문위원회의 추천을 받아서 현역작가 7명에게 지명경쟁 방식으로 작업을 의뢰하여 3개월의 시간을 주고 각자 2점씩의 작품을 제출하도록 했다. 제출된 14점의 작품을 심사한 결과 김현의 작품이 14명 심사위원의 표 중 12표를 얻어 당선이 되었다. (호돌이의 디자인 개발과정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단행본인 [한국의 디자인 2: 시각문화의 내밀한 풍경](디플, 2008)에 실린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자와 콤파스, 80년대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자화상’이라는 글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었다.)
14. 88서울올림픽 호돌이 마스코트 지명공모 제출안, 1983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호돌이 지명공모 참여 당시 김현은 대우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퇴근 후 밤을 새가며 작업을 했다. 기본형 확정 후 곧이어 60종에 달하는 응용형 개발도 해야 했던 터라 회사 생활과 병행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김현은 8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984년에 디자인파크를 설립하였다. 김현은 한 인터뷰에서 ‘호돌이 하나 믿고 창업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호돌이 당선 이전부터 연차가 올라갈수록 작업 자체보다는 매니지먼트가 중심이 되는 대기업 인하우스 디자이너 생활에서 벗어나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에서 이제 막 디자인 전문회사의 활동이 본격화 되던 때였다. 1976년에 개최되었던 ‘조영제 디자인展: DECOMAS’의 성공 이후 CI 도입에 대한 국내 기업과 사회의 관심이 커지기는 했지만 규모 있게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 대학교수들에게 의뢰되었다. 디자인파크와 디자인포커스의 등장과 성장은 국내 아이덴티티 디자인이 대학교수 중심에서 현장 디자이너 중심으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유사한 회사로 올커뮤니케이션도 있었는데 CDR과 같은 대학교수 연구팀과 디자인 전문회사의 중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CDR(1973), 올커뮤니케이션(1981), 디자인포커스(1983), 디자인파크(1984) 등 네 개 회사는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1980, 90년대 국내 기업체 및 정부기관의 CI 붐을 주도해나갔다.
15. 대전엑스포‘93 마스코트 캐릭터 꿈돌이, 1993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김현의 작업 중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호돌이와 꿈돌이지만, 초창기 디자인파크가 CI 전문회사로서의 위상을 안정적으로 갖는데 기여한 것은 1989년에 진행한 BC카드 프로젝트였다. BC라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진 구와 그 그림자를 입체적으로 잘 표현한 이 심볼마크는 그래픽 조형의 혁신적 시도로 주목을 받았다. 1992년에 진행된 퍼시스의 CI는 예산 규모나 사회적 파급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회사 창립 준비와 더불어 기업 아이덴티티를 함께 고민하고 진행했다는 점에서 김현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프로젝트다. 또한 1995년에 진행된 국민은행 CI와 청정원 BI는 김현과 디자인파크 고유의 디자인 개성과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지난 30년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 접해온 수많은 심볼마크와 로고타입, 마스코트가 김현과 디자인파크에 의해 만들어졌다. 각각 어떠한 작업이었는지는 디자인파크 홈페이지(www.designpark.co.kr)에서 살펴볼 수 있다.
16. BC카드 CI, 1989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17. 퍼시스 CI, 1992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18. 국민은행 CI, 1995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19. 청정원 CI, 1995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김현은 디자인 전문회사 대표로 바쁘게 지내면서도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 KSVD협회전, 중앙그래픽전 등에 꾸준히 참여했다. 88서울올림픽게임을 앞두고는 김교만, 나재오, 정연종과 함께 [아름다운 한국 ‘86 그래픽 4](1986)이라는 작품집을 출판했으며, 한국담배인삼공사의 의뢰로 1982년부터 1989년까지 거북선, 백자, 도라지 등 담배 패키지 디자인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 (주)바른손카드에서는 동양화나 서양화 스타일이 아닌 그래픽 스타일의 신년카드를 개발하고자 했고 이 프로젝트에는 김현을 비롯해서 김교만, 권명광, 안정언 등 10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참여했다. 김현은 어문각에서 기획한 전래동화책 프로젝트에도 참여를 했는데 김현, 김교만, 한호림 등 총 12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함께 했던 이 책은 디자이너들이 일러스트레이션을 먼저 한 후 동화작가들이 글을 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이 밖에도 김현은 크리스마스 씰과 우표 디자인, 패키지디자인, 편집디자인, 포스터디자인, 전시 및 이벤트 디자인, 프로모션 디자인 등 그래픽 디자인의 거의 전 분야를 아우르며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또한 재능기부라는 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세상을 더 아름답게, 인간을 더 따뜻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비영리단체들에게 디자인 컨설팅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20. 바른손카드 신년카드 1980-1995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21. 어문각 전래동화 시리즈 중 [심청전] 일러스트레이션, 1981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22. 럭키금성그룹 홍보지 시리즈, 1984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23. 한국담배인삼공사 담배 패키지 디자인, 1982~1989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마음이 잘 통하는 디자인 동료로 젊은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디자인파크 창립 때에는 회사의 기업 이념과 철학, 그리고 전체 비즈니스 모델의 방향과 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던 김인철 국민대 명예교수는 김현의 디자인 개인 기록을 야구용어를 빌어 ‘최다경기출장, 최다안타, 최다홈런, 최다출루율을 기록했고 최고령 현역선수이며 MVP에 골든글로브도 수상한 한국의 대표적 디자이너’라고 평가한 바 있다.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을 추구하며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김현은 지금도 디자인 비즈니스 현장에서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가고 있다.
24, 25. [아름다운 한국 ‘86 그래픽 4]에 실린 한국의 이미지 포스터, 1986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26. 중앙그래픽전에 출품한 한국의 이미지 포스터, 1985
27. 한국의 이미지 포스터 - 아름다운 한국, 1997
*사진출처: DESIGN PARK & kim hyun,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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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현주
인하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전공 및 대학원 융합과정 문화경영학과 교수. [디자인사 연구], [한국디자인사 수첩: 한국의 폴 랜드, 조영제를 인터뷰하다] 등의 저서와 [김교만과 한국 현대 그래픽 디자인],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시각디자인교육, 1965-1994: 디자이너-교수 3인의 활동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