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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평 (1949 ~ 1998)


김진평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합동통신사 광고 기획실에서 근무했고, 또한 한국판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아트디렉터를 맡았다. 1981년부터 서울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1998년 49세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때까지, 김진평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고 좋아한 한글을 디자인하고 연구하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제호 디자인

 

시각디자인 분야에서 한글디자인은 중요하지만, 비전공자에게는 ‘낯섦’과 ‘어려움’을 전공자에게는 ‘두려움’과 ‘지루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한글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 적고, 그러다 보니 필요한 연구와 있어야 할 한글 활자가 부족하다. 

 

1980~90년대에 활동했던 디자이너 가운데서도 김진평은 척박한 한글디자인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실무와 연구를 넘나들며 눈부신 역할을 했다. 특히 지속적인 작업과 연구와 함께 저술 활동을 이어나갔고, 그중 하나인 <한글의 글자 표현>은 후배 한글디자이너에게 한글 활자 조형 이론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은 훗날 초기 디지털 한글 폰트 디자이너에게 발상의 샘이 되었다. 

 

체계적인 한글디자인의 시작

 

요즘의 디자인은 소량의 제품 생산이 가능해져서 다양한 취향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디자인이 늘 산업과 함께 했던 때와 달리 개인의 취향과 디자인 정체성을 스스로 표출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그러나 김진평이 활동했던 시기에 디자인은 전시용이 아닌 이상 대부분 대량 생산을 전제로 진행되었고, 그래서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했다. 회사 이름이나 상표를 한글로 디자인하는 일 또한 비슷한 맥락이었다. 더욱이 한글 활자디자인은 시각디자인 분야에서도 많은 자본과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특별한 목적 없이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지 않았으며, 필요와 자본을 갖춘 이가 있어야 비로소 한글 활자를 만들었다.

 

한글 활자는 1980년대까지 활자 도안가 또는 활자 조각가가 맡아 작업했고,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은 광고나 제품에 필요한 상표와 타이틀 몇 글자를 그리는 작업을 했다. 당시에 쓰인 글에서도 한글 중심의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을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게 알파벳을 이용한 디자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진평은 ‘한글 로고타입의 기초적 조형요소에 관한 연구’, ‘한글 타입페이스의 글자폭에 관한 연구’, ‘글자체 변형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과 여러 로고타입 및 제호 등의 한글 디자인을 진행하며, 우리 디자인을 훈민정음과 한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로고타입 작업 

 

한글디자인 이론의 체계

 

김진평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한글 활자의 조형 이론이 없었다. 단지 활자의 원도를 그렸던 최정호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글 활자의 조형을 설명한 정도가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글자디자인 관련 전공 책 역시 대부분 영문 위주의 레터링을 소개하거나 한글 레터링의 예시를 보여주는 정도였다.

 

김진평의 여러 연구와 글 중에서 한글 글자꼴의 역사를 정리한 것은 가장 큰 업적으로 꼽을 만하다. 이론을 세우고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학문은 역사를 정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때까지 한글 활자의 역사는 옛 활자를 연구 소재로 삼는 서지학자들이 정리했기에 정작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내용이 부족했다. 김진평은 활자 제작방법과 글자꼴의 변화를 연계하여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한글 글자꼴의 변화를 정리했다. 아직 한글 글자꼴 역사에서 더 비교하고 정리할 부분이 있지만, 아마도 김진평의 마련한 기초 위에서 수정 보완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돌기와 맺음의 표현

 

 


레터링, 로고타입 작업 

 

한편 용어 정리 역시 학문의 또 다른 기초라 할 수 있다. 당시는 서양에서 유입된 또는 일본식의 용어가 혼재하여 연구 내용을 정확히 할 수 없었던 시기였는데, 김진평은 타이포그래피와 활자에 관한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거나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와 함께 서양 활자 조형 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이를 한글 활자디자인에 접목하며, 글자사이 연구와 한글 조합형 한글 활자 설계 방법 등을 연구하면서 한글 조형 이론의 체계를 세웠다. 현재까지도 한글 활자를 연구하는 후배들은 김진평이 생전에 마련한 기초 위에서 연구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활자디자인

 


월간 <디자인> 제호 - 1980~1992년 2월까지 사용되었다.


월간 [디자인] 제호 - 1994~1998년 2월까지 사용되었다. 

 

 


로고타입

김진평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먼저 한글 로고타입 디자인이 떠오른다. 그러나 김진평은 로고타입과 같은 레터링 작업만큼이나 활자디자인에 열정과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언뜻 레터링과 활자디자인이 비슷한 작업처럼 보일 수 있으나, 레터링이 표현하고자 하는 낱말이나 문장의 특징을 글자에 담아 표현하는 일이라면, 활자디자인은 어떤 글자가 배열되더라도 글자들이 균질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글자틀’, ‘무게중심’, ‘글줄흐름’, ‘글자사이’와 같은 것들이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일보다 중요하다.

 



김진평의 실무 작업을 살펴보면 레터링 작업이 활자 작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반면 그의 연구와 글은 시간이 흐를수록 활자에 집중되었다. 특히 1983년 김진평이 출판한 <한글의 글자 표현>은 책 제목만 보면 한글 글자꼴의 꾸밈에 관한 내용이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명조체와 고딕체, 그래픽체, 굴림체 등 당시 보편적으로 쓰던 활자 구조를 설명한 유일한 책이었다.

 


라이카 휠 타자기용 서체

 

김진평이 활동한 시기는 막 사진 활자에서 디지털 활자로 바뀌어가는 무렵이었다. 기술의 전환기에서 필요했던 활자는 다양한 표정보다는 문자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기본 활자였고, 그가 디자인한 활자도 라이카 휠 타자기와 여러 프린터의 기본 활자가 되었다. 글자 조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그의 재능을 표출하기에는 시대적 배경이 적절치 못했던 셈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탁상출판이 시작되면서 고품질의 다양한 인쇄용 디지털 한글 폰트가 필요해질 무렵 김진평은 세상을 떠났고, 그가 생전에 남긴 다양한 한글 글자표현은 초기 제작된 디지털 한글 폰트에 녹아들었다. 

 

한글디자인의 방법론 

 

김진평은 비록 활자로 제작하지 못했으나 굴림체와 명조체의 특징을 섞은 굴림명조체를 디자인했다. 한글 활자가 고딕체와 명조체만 만들어지던 때에 이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이 작업에서 활자가 실제로 널리 활용되어야 하는 대상이며, 그러므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미감 안에서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굴림명조체, 1977

 

 

 

 

 

 

 

 

레터링 작업 

 

김진평에게 레터링과 활자는 서로 상보적인 관계의 작업이다. 고심한 글자의 표현은 활자에 반영되고, 레터링은 활자의 균형과 비례를 바탕으로 하여 더욱 안정감을 얻었다. 그는 기존 한글 활자에서 점과 획을 변형하기도 하고, 질감을 이용하기도 했다. 활자의 구조를 새롭게 하려고 손글씨의 특징을 반영하는가 하면, 글자의 기준선에 변화를 주어 새로운 디자인 방향을 제시했다. 낱말의 어감을 글자에 담는 방법과 알파벳에서 빌린 표현을 한글에 접목했다. 알파벳에서 표현을 빌려 올 때에는 구조가 다른 문자에서 어떻게 표현을 빌려 올 것인가를 고심했고, 나아가 한글에 알파벳을 함께 썼을 때 잘 어울리지 못하는 구조적인 한계를 인식하여, 한글과 조화롭게 쓸 알파벳을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참고운활자체

 

탁월한 품성의 디자이너

 

국내 디자이너 중에 후배에게 모범이 될 태도를 보여준 여러 디자이너가 있다. 김진평 또한 디자이너로서 교육자로서 존경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문이나 예술 창작 활동처럼 자본의 논리로 대할 수 없는 분야에서 한평생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김진평은 존경할 만한 우리나라 디자이너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한글디자인, 한글 활자디자인. 무엇이라 말해도 좋다. 김진평은 연구와 작업을 통해서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를 다듬었고, 미래 세대를 위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때로 그의 균형 잡힌 사고가 마치 자신의 주장이 부족하고, 개성이 약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균형 잡힌 사고야 말고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화려하지 않지만,  그가 보여준 연구와 작업의 태도가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큰 주춧돌을 놓았다고 믿는다.

 

자료 출처

<한글글자표현>, 김진평, 미진사, 1983

‘한글조형연구’ 고 김진평 교수 추모 논문집, 1999

<한글공감>, 유정숙 · 김지현, 안그라픽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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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용제

1972년 3월 28일 출생. 한글디자이너로,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로 있다. 세로쓰기 전용 ‘꽃길’체, 환경을 생각해 만든 ‘잉크를 아끼는 글자’, 기업전용 폰트 ‘아리따’체, 클라우드펀딩을 받은 ‘바람’체를 디자인했다. 타이포그래피 잡지 <ㅎ>을 발행하고 있으며, 타이포그래피 교육 공간 히읗학원을 설립, 강의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글 한글디자인 디자이너>, 공저로 <한글디자인 교과서>가 있다.

Tag
#김진평 #이용제 #디자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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