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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규 (1946 ~ )


01. 정병규 (2006) *사진 : 최항영

 

북디자인 

 

“책의 분장사”, “대한민국 북디자이너 1세대”, “한국 북디자인의 개척자”. 이 수식들은 근 40년 가까운 세월을 북디자이너로서 활동해 왔던 정병규를 일컫는 말이다. 1946년 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면서, 교내 간행물 편집과 제작을 통하여 활자와 그림, 사진을 만지며  조형감각을 익혔던 그는 1975년 첫 직장인 <소설문예>를 계기로 편집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민음사 그리고 홍성사를 거치면서 그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문화계에서 주목받는 유능한 출판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북디자이너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해 나갔던 1970년대 후반, 그러니까 1977년 ‘여러가지문제연구소’를 열면서 편집자에서 북디자이너로서의 변신을 선언하며 디자인 이력을 시작한다. 이후 정병규는 프랑스 파리의 에스티엔느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고 돌아와 1984년 2월엔 공식적으로 국내 첫 편집디자인 전문 회사인 ‘정병규 출판디자인’을 차리게 된다. 정병규의 북디자이너로서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1985년도부터는 대학에서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야심차게 시작했고, 지금도 그의 강의는 계속되고 있다. 1996년에는 그의 20년 작업을 모아 한국 디자인 사상 첫 북 디자인 개인전인 ‘정병규 북디자인 1977-1996’전을 열었다. 2005년도부터는 ‘동아시아 책의 교류’ 코디네이터로서 동아시아 책의 문화로 관심의 폭을 넓히고 있다. 2006년도에는 영월책박물관에서 두 번째 북디자인 전시를 열었고, 2008년도에는 문지 문화원 ‘사이’에서 훈민정음 강의를 시작으로, ‘훈민정음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선언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중앙일보 아트디렉터로서 대학시절 이래 관심을 두어왔던 신문디자인에 종사했다. 2011년도에는 정병규 학교를 설립,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단 몇 문단 만으로 그가 국내 출판계 및 그래픽 디자인계에 남긴 업적과 성과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분명하건대, 오늘까지 이어져 온 정병규의 디자인 이력은 그 자체가 한국 북디자인의 활주로였고, 그는 여전히 그 활주로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북디자이너 정병규’라는 수식으로만 설명하기엔 어딘가 아쉽고 부족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북디자인이라는 용어에는 단순히 디자인 영역의 지칭 이외 수많은 연관 개념들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모습이 북디자인이라는 ‘산’의 모습일 뿐, 정병규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산이 품고 있는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엔 서양 철학과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문자론으로부터 시작하여 훈민정음과 한글타이포그래피에 이르는 숱한 문제제기 그리고 진화하는 미디어로서의 책과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생각들이 곳곳에 숨어 있고 또 서로 뒤엉켜 자라나고 있다. 한마디로 무성하고 깊고, 일면에선 경이로움을 자아내기까지 하는 숲이다.

 

그렇다면 그 숲을 품은 산이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서양 타이포그래피 중심으로 우리의 디자인 현장과 교육을 지배해 왔던 큰 봉우리를 넘어서는 곳이다. 그것은 부정이기보다는, 마주한 거대한 산맥에 대한 탐문이자, 반문을 통한 문자와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새로운 개념적 성찰과 실천이다.

 

정병규의 삶을 추적하고 그의 북디자인 작업을 소개하는 인터뷰와 기사들은 많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의 북디자인 성과를 새삼 강조하는 대신, 북디자이너 정병규라는 기표 밑에 응축되어있는 전방위적인 다양한 기의의 측면들을 살펴보는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바로 책, 문자와 한글을. 나아가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을.

 


02. <떠나가는 배> 표지 및 본문(1971)
03. <고대문화> 1971년 12월호(1971)

 

개념 1: 책

 

얼마전 중앙일보의 기획연재물인 ‘내 마음의 명문장’에서 정병규는 움베르토 에코의 대담집 <책의 우주>의 한 문구를 소개했다. “지난 500년 동안 책이라는 물건의 형태에는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기능과 구성 체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 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들 말이에요.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습니다. (…)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은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 번 발명되고 나면, 더이상 발전이 불필요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연이어 들려오는 출판계의 불황 소식도 모자라 전자책에 대한 관심과 경제적 효용성 등 종이책을 둘러싼 끊임없는 잡음 속에서 정병규가 뽑은 이 문구는 종이책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점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종이책과 e-book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두 매체는 개념적 내용은 동일하지만 형식과 구성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다르다. 이 차이를 살피지 않으면 끝내는 북디자인 행위 자체의 본질적 가치마저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이 점이 정보화라는 시대적 화두의 소용돌이 속에서 물질성, 즉 책의 물질성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정병규 북디자인론이 가장 잘 녹아든 글이라 할 ‘북디자인은 모든 그래픽디자인의 원점’(월간 <디자인> 1984년 9월호)에서 그는 책을 “눈과 손과 정신이 연결하는 가상의 삼각형의 한 정점에 놓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발언에서 우리는 정병규의 북디자인론에서 항상 부각되는 ‘손’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손이라는 신체 기관은 정병규에게 책의 물질성, 나아가  물질성을 통해 촉발될 수 있는 촉각성과 신체성의 근거이다. 책의 구성적 물질성과 손의 촉각성이 만들어 내는 디자인적 세계는 디지털화 혹은 e-book으론 대신 할 수 없다는 성찰이 그의 시각디자인론을 요약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불편함과 디지털의 장점만 강조하는 정보주의들자의 디자인관은 디지털 상업주의다. 앞으로의 새로운 디자인은 아날로그의 장점과 디지털의 장점이 만나는 새로운 세계일 것이다. 삶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바뀌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새로운 디자인의 가치와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해 기댈 수 있는 지평이다.”라고 정병규는 말한다. 그에게 종이책의 본성과 역사적 가치란 사망 선고를 받기에는 잠재된 에너지가 너무 많은 인류의 문화재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책은 어떤 식으로든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생산될 것이다. 특히 디지털의 가능성이 아날로그의 장점을 새롭게 부각시킬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만남에서 파생되는 미디어의 역설이다.

 

새로운 책의 시대를 통하여, 새로운 디자인의 좌표를 그리는 정병규의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우리는 그의 디자인적 사유의 바탕에 놓인 인문학적 성찰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정병규에게 책은 북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총체적 디자인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하는 구체적인 수단이기도하다. “보편성은 늘 구체적인 특수성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게 책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고,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가치를 획득해 나가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04. [부초](1977)

05. [월식](1980)

 


06. [시각과 언어] 표지와 본문 (1982)

 

07. [매잡이](1983)

08. [포로](1985)

09. [러시아 혁명기의 사회와 문화](1988)

 


10. <출판문화>(1987)

 


11. <문화예술>(1987)

 


12. <대화> 본문(1994)

 

13. 정병규와 박맹호 - 교보북디자인대상전 시상식(1989)

 


14. 정병규 북디자인전(1996)

 

개념 2: 문자와 타이포그래피

 

정병규의 대표적인 초기 작업으로 많은 사람들은 197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소설가 한수산의 [부초]를 떠올릴 것이다. 이 작업에 대해 디자인 운동가 권혁수는 “그동안 지속된 장정의 시대, 즉 글과 그림이 서로 어울려 꾸며지는 표지의 관행적 기술을 과감히 마감하고 제목과 표지화를 나란히 배치(arrangement)하는 차원이 아닌, 활자(타입)와 심상(이미지)을 서로 병치(juxtaposition)시키는, 다시 말하면 서로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대화하는 관계로서 새로운 표지를 제시하고 있다.”라고 평한 바 있다.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북디자인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부초]는 북디자이너 정병규에겐 상징적 오브제이다. 정병규의 북디자인 중심에는 문자가 있다. 그가 지난 40여년간 디자인한 책, 특히 표지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시각적 실험을 거친 한글 제목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정병규는 말했다. 북디자인은 곧 타이포그래피라고. 그런 그에게 표지는 타이포그래피의 잠재성을 증폭하고 자극하고 시험하는 가장 효과적인 작은 무대이다. 그리고 정병규는 이 실험을 단순한 조형적 감각 혹은 스타일로 끝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명사로 만들었다. ‘일책일자’와 ‘메이킹 타이포그래피’가 바로 그 고유명사들이다.

 

정병규의 ‘일책일자(一冊一字)’론은 하나의 내용에는 그에 어울리는 하나의 고유한 글자꼴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활자를 보편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여기는 20세기 서구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와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베아트리스 워드, 허버트 바이어, 바우하우스 그리고 스위스 타이포그래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양 모던 타이포그래피는 극단적 투명성에 기반한 보편적 유토피아관을 표방했다. 그들의 보편성엔 동양적 문자가치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다. 그러므로 정병규의 ‘일책일자’는 정병규 북디자인의 디자인적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서양중심주의와 알파벳우월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문자론과 타이포그래피론에 대한 반론이자 알파벳의 편재성에 대한 반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 [바다의 눈](1995)

 


16. [만취당기](2004)

17. [까치소리](2003)

18. [날개](2001)

 


19.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 1](2001)

 


20.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 2](2001)

 


21. ‘홍길동 그리운 얼굴’ 전시회 포스터(2004)

 


22. 정병규 학교 포스터(2011)

23. 영상문화학회 포스터(2002)

 

이러한 개념이 또 다른 축으로 진일보한 실천이 ‘메이킹 타이포그래피’의 일종인 ‘테이프 타이포그래피(tape typography)’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진행하고 있는 ‘테이프 타이포그래피’는 이제 정병규 디자인 세계의 또 하나의 서명으로 자리잡고 있다. 젊은 시절 인쇄 공장 현장에서 만났던 마스킹 테이프를 다시 불러내고, 그것을 찢어서 덕지덕지 붙였을 법한 이 테이프 타이포그래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테이프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기존 그래픽디자인 판으로부터 확연하게 동떨어진 다이내믹하고 파격적인 문자 조형과, 그 안에 내재된 한국 전통 서예의 미학을 이은 타이포그래피적 개성과 성찰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정병규는 평소 서양 타이포그래피의 투명성에 대해 강박적이라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비판해 왔다. 비판의 핵심은 서양 타이포그래피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다. 말은 문자가 되면서 소리를 잃고, 문자는 다시금 활자가 되면서 더욱 다듬어진 형태로 규격화된다. 그런데 정병규는 바로 이 활자의 중성화된 복제양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스스로 쉼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문자가 가지는 이미지의 힘을 믿으며, 디자인된 문자의 복제적 타이포그래피 이미지를 넘어 문자 이전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음성의 신체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정병규가 스스로 언명한 [백색인간] 표지에 대한 설명이 이해에 도움이 될 터이다. “한글 캘리그래피 유행은 지금까지 활자에 억눌려 왔던 한글의 표현적 에너지의 분출이다. 한글 캘리그래피는 한글의 이미지 세계를 넓히고 깊게 하는 도구적 상상력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를 붓이라는 도구에만 의지하는 전통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붓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도구중의 하나이다. 나는 새로운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붓이라는 도구에만 의존하여 자칫 전통적 서예의 표현적 세계에만 한글 시각 에너지가 한정되어버릴까 우려하는 입장이다. 다양한 도구적 실천이 시도되어야 한다.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한글 캘리그래피가 나아가야 길이라고 생각한다.” 선형적으로만 흐르는 로마자 세계관에 내재된 표준화, 규격화 그리고 보편화에 대한 반박으로서, 정병규는 ‘테이프 타이포그래피’로 문자와 활자의 경계선 상에서 문자에 내재된 힘과 에너지를, 궁극에는 한글의 새로운 시각적 가치를 일꺠우려 한다.

 

24. [백색인간](2008)

25. [별을 보여 드립니다](2013)

 

26. [새로운 책의 시대](2012)

27. [박맹호 자서전 책](2012)

 

28. [성스러운 뼈](2014)

29.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2009)

 


30. [삼저주의](2012)

 


31. [역에서 역으로](2014)

32. [추사를 훔치다](2014)

 

개념 3: 한글과 훈민정음

 

‘일책일자’와 ‘테이프 타이포그래피’와 함께 정병규가 창안한 또 하나의 타이포그래피 개념이 있다면 ‘한글의 상형성’이다. 이 개념은 한글이라는 문자가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이지만, 시각적 가치는 알파벳과 차별화된 속성, 즉 동양문자적 원형에 바탕을 둔 시각적 특성을 지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말한다. “알파벳은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문자 그 자체를 시각화, 이미지화할 가능성이, 다시 말해 디자이너가 만질 요소가 한글에 비해 적은 문자다. 한글은 자음, 모음이 독립되어 창제되었다. 그 각각은 문자의 요소일 뿐이지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반드시 모아져야 하나의 낱글자가 된다. 한글의 최대 특징이자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독립적인 낱자들이 모아져 비로소 낱글자로서 기능을 한다. 낱자를 모으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화, 즉 디자인이다. (…) 한글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 문자이며 여기서 한글의 이미지성이 나온다. 이것은 훈민정음에 적혀 있는 원리다.” 나아가 그는 덧붙인다. “‘한글의 상형성’이라 함은 음운적 차원에 치중하는 제자원리로서의 상형적 원리를 넘어 시각 언어로서 한글의 이미지 표현성, 생성력을 가리킨다. 한글의 상형성은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역동적 특성이다.” 여기서 우리는 테이프 타이포그래피의 작업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서 2006년에 발표한 <한글의 상형성 또는 한글의 이미지성>에 이은 또 다른 성찰의 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최근에 만난 정병규는 역시 훈민정음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미 오래 전 시작했던 훈민정음 연구이지만, 근래의 훈민정음 연구는 또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의 북디자인의 지난 날이 그러했듯이 그의 한글과 훈민정음에 대한 탐구도 끝없는 재성찰과 반문의 연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병규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이론과 훈민정음 연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혹은 국수주의적 시선과는 거리가 있다. “이제 우리는 맹목적인 한글 찬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을 방법론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글이 무엇인지, 어떤 문자인지 새롭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국어학의 입장을 바탕으로 시각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2010년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말한 내용이다.

 

서양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면 15세기 구텐베르그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라스코 동굴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듯, 우리도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이자 우리 디자인의 출발인 한글의 시각적 특성을 숙고하고, 실천의 기반으로서 훈민정음으로 돌아가 탐구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논리다. 아니, 그것은 논리라고 하기보단 당연한 상식적 태도이지만 서양 중심의 타이포그래피관에 익숙한 우리에게 한글 타이포그래피 영역, 특히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실천을 뒷받침하고 이끌 이론의  구축은 안타깝게도 외면당하고 있는 무풍지대이다. 그는 말한다. “알파벳식 기본 조형적 가치에 머물고 있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새로운 문자학적 성찰과 새로운 한글 글자꼴 만들기는 우리 디자인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두 가지 당면한 과제이다. 물론 이것은 한글이 창제된 문자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훈민정음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싶다.“

 

33~35. 정병규 북디자인 1~3(2006)

 


36~38. 나무 1~3(2008)

 


39. ‘융합과 창발’전 포스터(2013)

 


40. 한글날 포스터(2007)

41. ‘전라도길 황토길’ 포스터(2014)

 

잉태와 창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개념, 임신, 그것은 세계를 다시 낳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정병규는 만날 때마다 매번 다른 책과 철학자를 거론하면서 인문학적 개념을 디자인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학이 성립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존에 습득해왔고 또 인식해왔던 틀을 넘어 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시대의 대안적인 디자인 행위의 모델을 마련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가 관심을 둔 인문학자들의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면 그의 손은 동시에 바빠진다. 주변에 비어 있는 지면이라도 있으면 그는 필기구를 들고 뭔가를 그린다. 필기구 끝에서 그려지는 날카로운 선들과 글자들 사이로 그가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 개념도가 그려진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썼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concept)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개념으로 하다, 개념화한다(conception)’라는 말도 ‘임신(conception)’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정병규는 디자인의 정의를 끊임없이 스스로 자극하며 반문한다. 그에게 디자인은 고정된 개념이 아닌, 인접 분야의 학문 개념들과 맞물리며 새로운 에너지원을 자극시켜 잉태해 나가는, 동적이면서 동시에 생성적인 개념이다.

 

북디자이너 정병규는 인문학에서 개념을 빌려와 우리 디자인계에 수많은 개념을 만들고 제출해온 특이한 디자이너이다. 그는 디자인 개념을 만드는 것도 디자인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를 그는 ‘동명사로서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동명사로서 디자인’은 명사, 즉 결과물로서 디자인과 사유행위, 즉 동사로서의 디자인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도 일차적 감성에 의존하는 ‘디자인=아이디어’ 관념을 보완하고 넘어서지 않는다면, 결국 디자이너는 설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늘 전망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디자인적 감성, 우리의 아이디어라는 것이 컴퓨터의 기능에 깜짝, 깜짝 놀라며 졸졸 따라 다니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1996년 출판평론가 이중한은 그를 두고 “그는 끊임없이 자기갱신의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도 독자를 즐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자기갱신이란 기존 디자인 개념과의 싸움과 그로부터의 도주이며 나아가 새로운 디자인적 실천일 것이다. 그는 새로운 디자인과 책을 잉태하는 문자와 이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정병규를 단순히 북디자이너라고만 부르기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사유와 성찰은 일반적 디자이너상을 훨씬 넘어 선 곳에서 놀이하며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절친한 동료였던 작가 고 이윤기는 20여년 전에 이미 그를 두고 “계획가(planner)”라는 표현을 썼다.

 

북디자이너 정병규, 그는 ‘아직도’ 현역이다. 그는 오늘도 열심히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꿈꾸는 그가 할 수 있는 방책으로서 공부라는 말이 어울린다. 빼곡하게 정리된 그의 노트에서 책과 문자 그리고 한글이라는 화두가 쉬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정병규. 그는 분명 우리 디자인의 현실과 내일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다.

 


42. 포스터 디자인 중인 정병규 *사진: 전가경 

 


43. 공책 속의 개념도 *사진: 전가경 

 


44. (왼쪽부터) 이윤기, 정재규, 정병규(1999) *사진: 임종기

 

* 사진 제공 : 정병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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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가경

디자인 저술가. 이화여대에서 독문학을, 홍익대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 사월의눈이라는 사진책 출판사 운영과 별도로 디자인 현장에서는 그래픽 디자인 관련 글을 쓰고 강의한다. 지은 책으로 <세계의 아트디렉터 10>(2009)이 있으며, 현재 두번째 책인 <세계의 북디자이너 10>을 쓰고 있다.

Tag
#디자인 칼럼 #정병규 #전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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