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는 Sitra라고 하는 준정부기관이 있습니다. 이는 핀란드어 Suomen itsenäisyyden juhlarahasts의 줄임말로 핀란드 혁신 기금(Finnish Innovation Fund)으로 해석됩니다. Sitra는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1967년 의회와 핀란드 은행이 조성한 독립된 기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의회 등 정부기관에서 업무를 지시받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사업영역을 결정하고 매년 의회에 사업결과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Sitra는 투명하고 정직한 핀란드 정부만이 가질 수 있는 정부 혁신 에이전트로 핀란드 의회의 신임을 받으며 향후 핀란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는 일을 합니다.

이런 Sitra가 약 2년전부터 strategic design unit이라는 부서를 창설하고 "전략 디자인"을 주창하고 나섰습니다. 그 가시적인 사업으로 Helsinki Design Lab(HDL)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전략 디자인이 무엇인지 소통하고 핀란드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부가 전략 디자인을 혁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올 9월 1, 2, 3일 헬싱키에서 벌어져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세계 약 20개국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대해 벌인 이 행사에서는 "디자인이 정부를 만나다 (design meets government)"라는 이름 아래 현대 사회가 당면한 복잡한 문제들에 디자인이 어떤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지 논의하였습니다.

Sitra가 말하는 디자인은 전통적인 개념의 그것 보다는 "문제 해결의 분야"로서의 디자인을 의미하며, 특히 이것이 정부라는 특별한 맥락에서 사용될 때 이를 "전략으로써의 디자인"(Strategic Design)이라고 합니다. HDL은 디자인을 통해 핀란드 정부의 관료들을 비롯 사회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좀 더 넓은 시야로 현대사회의 문제점의 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 할 수 있게끔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디자인, 전략 디자인

전략 디자인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디자인의 역사는 18세기 산업혁명시절 대량생산되는 직물에 아름다운 문양을 입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생활에 필요한 가구, 주방기구, 사무용기기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며 아름다움 뿐 아니라 편리함, 인체공학 등 조금씩 더 많은 요소들을 고려하게 되었고, 19, 20세기를 거치며 디자이너의 영역은 형태가 있는 물건(tangible artifacts)을 디자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 소프트웨어, 서비스, 경험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intangible artifacts)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업은 디자이너에게 물건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이상을 요구하게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서며 디자인은 물질과 외형을 아름답게 만드는 디자인 작업(designing)을 넘어 생각하는 과정(thought process)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다양한 요소들을 조화시켜나가는 디자인 프로세스가 문제의 구조를 파악하는 도구로써 활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Sitra의 HDL이 말하는 전략 디자인은 시각적, 물질적 창조 작업이 아닌 문제해결 과정에의 개입이며 정부가 효율적으로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찾는것을 돕는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디자인이 "연속하는 의사결정"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디자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모하는 디자인이 수영장, 도서관, 공원 등의 공공건물부터 규제, 새로운 법 제정까지 각 나라의 현 정부나 기업이 맞닥드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디자인은 초기 의사결정과정부터 활용될 수록 효과적입니다. HDL은 아래의 다이어그램을 통해 전통적인 디자인과 전략디자인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붉은 선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제해결 과정에서 디자인이 개입되는 시점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내는 것 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결과물은 제한적이며 기회비용이 큽니다.

붉은 선은 "전략 디자인"이 문제 해결과정에 개입하는 시점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회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으며 결과물은 다양하고 효과적입니다.

Sitra의 전략 디자인 부서장인 Marco Steinberg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실화를 예로 듭니다.

"1950년대 덴마크의 한 작은 지자체에서 예기치 못하게 공공 수영장 이용객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무원들이 수영장 시설을 방문했습니다. 수영장을 둘러본 후 공무원들은 건물 시설이 낙후된 것을 보고는 이를 사람들이 이곳을 더이상 찾지 않는 이유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건축가를 고용해 이 건물을 고쳐 쓸 수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건물을 지어야 할지를 판단과 함께 새 건물의 디자인을 주문했습니다. 두어달 뒤 새 건축물의 조감도를 기다리는 공무원들과의 미팅에서 건축가는 전혀 다른 해답을 제시합니다.

"수영장이 낡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버스 시간표입니다. 작년에 바뀐 버스시간표가 시민들의 생활패턴과 부합하지 않아 수영장 방문객이 줄어든 것입니다."

전통적인 디자인이 사물에 형태를 제공한다면, 전략 디자인은 의사결정에 형태를 제공합니다.(If traditional design gives shapes to objects, strategic design gives shapes to decision making.)"

이 이야기는 많은 것들을 시사합니다. 이미 건축물을 새로 짓자는 결론을 내린 공무원들은 이 문제를 좀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 건축가가 리서치를 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했다면 엉뚱하게 수영장 건물만 재건축되어 상당한 재정과 시간을 쓰고도 여전히 사람들은 새 수영장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다양한 분야, 부서간 소통의 부재는 이러한 결과를 비일비재하게 낳고 있으며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부터 투입되지 못한 건축가, 디자이너들은 문제의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주어진 건물을 짓고 물건을 만들어 내기를 반복하여 정작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그대로 남겨둔 채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의 문제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직 뿐 아니라 디자이너 역시 변화해야

이와 같이 디자인이 좀 더 진화한 형태로 한 조직의 문제 해결책 결정 과정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다양한 현대 조직 내부에서 바뀌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보통 어떠한 문제 해결에 대한 의사 결정권은 조직 내부의 소수에게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디자인"이 그 문제 해결에 개입되는 순간은 모든 의사 결정이 끝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놓아야 할 때 입니다. 즉, 디자이너는 그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일의 크트머리에 투입되어 이미 결정지어진 사안에 따라 수동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략 디자인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 내의 디자인에 관한 인식이 변화해야 합니다.

HDL은 디자인의 진화를 돕기위해 정부, 기업 등의 조직 뿐 아니라 디자이너 자신 역시 변모하기를 당부합니다. 전략 디자이너로서 디자이너가 자신의 스튜디오, 아틀리에를 벗어나 사회의 변화를 깨닫고 다양한 분야의 단체나 정부 기관 등에서 실질적인 문제 해결 과정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제안합니다. 전략 디자이너로서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보다 이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능력이 중요시됩니다. 성공적인 디자인은 단순히 창의적인 생각이 아니라, 지속력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이것이 일의 과정에 보다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도록 검토하고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 우리 세대가 직면한 도전 과제들(지구 온난화, 인구 고령화, 음식, 환경 문제 등)은 상호 연관성을 지니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관계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능력 또한 필요합니다.

HDL Global 2010

HDL은 "전략 디자인"의 가능성을 널리 알리고 함께 검토하기 위한 시작의 장을 "HDL Global" 컨퍼런스로 열었습니다. 2010년 9월 1일 부터 3일까지 진행된 이 행사에는 주최국인 핀란드를 비롯하여 가나,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칠레, 벨기에, 캐나다, 덴마크, 스위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국, 이태리, 호주, 중국, 한국, 독일, 인도, 스웨덴 등지에서 약 120명의 사람들이 헬싱키로 초대되었습니다. 초대된 이들의 직업은 고위 정치인(환경부, 보건복지부, 경제부 등), 시장, 기업의 대표, 대사, 대학 교수부터 건축가, 디자이너, Phd 학생까지 다양했습니다. "디자인"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양한 분야(전혀 무관해 보이는 분야까지)의 다양한 직책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음으로써 HDL의 "전략 디자인"이 단순히 디자인 관련 업종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의(특히, 의사 결정권을 쥔 사람들의) 이해를 바탕으로폭 넓은 분야에서 여러 형태로 활용되기를 바란다는 컨퍼런스 개최의 취지를 밝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류경기 디자인서울 총괄 부본부장과 이상묵 서울디자인재단 파트장이 초대되었습니다.

Photo by: Pekka Mustonen

Photo by: Ivo Corda

이 컨퍼런스는 현재 세계가 가진 공통의 문제점인 "세계 인구 고령화, 교육,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삼아 정부와 디자인의 조합이 이 문제들에 어떠한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모색했습니다. 또한 전략 디자인이 실제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 "케이스 스터디"를 발표하여, 정부와 기업이 문제 해결 과정에서의 디자인의 가능성을 잘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Marco Steinberg , Photo by: Ivo Corda

Photo by: Ivo Corda

HDL Global은 여전히 18세기에 머물러 있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현대의 문제들을 디자이너와 다양한 지식,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 더 일찍 한자리에 모이면 더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제안하는 HDL의 도전은 이제 시작되었고 전략 디자인 분야의 선두에 서서 앞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Photo by: Ivo Corda

Photo by: Ivo Corda

Photo by: Ivo Corda

Photo by: Pekka Mustonen

Photo by: Pekka Mustonen

HDL 1968

Helsinki Design Lab은 1968년 역시 Sitra가 후원했던 행사인The Industrial, Environment and Product Design Seminar와 맥락을 함께합니다. 이제는 핀란드 디자인교육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 Yrjö Sotamaa를 비롯란드 건축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Juhani Pallasmaa 등이 주체가 되어 Buckminster Fuller, Victor Papanek, Kaj Frank, Christopher Alexander, and Antti Nurmesniemi 등의 세계적인 지성을 헬싱키에 불러들였던 위 세미나는 핀란드 산업디자인의 모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HDL은 이를 HDL 1968이라고 칭함으로써 그 시대가 요구했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을 잇고 있습니다. HDL 1968 웹사이트(영문):http://hdl1968.org

1968년 처음으로 열렸던 HDL

Helsinki Design Lab과 전략 디자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웹사이트(영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elsinkiDesignLab.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