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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Essence! _ 장진택

Think Essence!



한 동안 “Think Basic!”이 풍미하던 때가 있었다. 한 마디로 기본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겉모습 만들기에 급급했던 디자이너들에게 기본으로 돌아가서 찬찬히 생각하라던 명령어였다. 이를 테면, 네모난 라디에이터 그릴 양쪽에 반달 모양 램프부터 그리고 보는 카 디자이너에게, 어둠을 밝히는 헤드램프의 기본, 엔진의 열을 식히는 라디에이터 그릴의 기본을 생각하는 것, 나아가, 사람의 눈처럼 보이는 램프의 기본, 사람의 입처럼 느껴지는 라디에이터 그릴의 기본 등을 더듬으면서, 생각 좀 하고 스케치하라는 얘기였다. “왜?”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면서 아주 기초적인 기본을 곰곰히 궁리하게 되면 조금이나마 깊이 있는 디자인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기본’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들 ‘기본’은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디자인한다. 기본을 한두 개 생각한 물건을 이기려고 기본을 세 번 더 생각하고, 그걸 이기려고 깊이 파고, 더 파고, 이제 더 이상 후벼 팔 ‘기본’이 없는 상태까지 됐다. 이 상황에서 멋지게 등장한 단어가 있었으니, 어감부터 ‘기본’보다 쎈 ‘에센스(Essence)’다. 영어사전 이름이 아니다. 엣센스 영한사전에서 찾은 이 단어의 의미는 꽤 거창하다. ‘사물의 본질, 정수(精髓), 진수’라고? 철학에서는 ‘실재, 실체, 영적 존재’를 의미한단다. 이거, 확 끌어당기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단해 보이긴 한다.

영어가 난무하는 디자인 현장에서는 한국어로 바꾸지 않고 그냥 ‘에센스’라는 말을 쓴다. 앞에 영어를 하나 더 붙여서 ‘Think Essence!’라는 주문도 자주 건다. 그리고는 뼈 속까지 더듬는 느낌으로 대상을 파악한다. 기본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숙히, 뼈 속에 고인 골수를 더듬는 느낌으로 깊숙한 곳을 궁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Basic’으로 걸었던 주문보다 훨씬 속 깊은 발상과 영감 등이 둥둥 뜨게 된다. 이를 테면 이런 느낌이다. 디지털카메라 디자인을 할 때, 전원을 넣고, 촬영모드를 설정하고, 손가락으로 누르는 행동, 찍은 사진을 화면으로 보는 동작 등을 더듬어 디자인하는 것이 기본을 더듬는 것이라면, 디지털카메라라는 문화를 생각하고, 카메라의 효용성과 역사, 자신의 브랜드가 부족한 것, 우월한 것, 존재하는 이유 등을 따지는, 다소 철학적인 개념이 에센스다.


그림 1. 올림푸스의 디지털 카메라 PEN

여기서 요즈음 잘 나가는 제품을 하나 보자. 한동한 나른해지던 올림푸스를 가장 바쁜 회사로 확 바꿔놓은 PEN이라는 디지털카메라. 이 제품의 시작은 단순하다. 작지만 화질이 별로인 똑딱이 디카와 화질이 좋지만 너무 거대한 DSLR 사이에서, 둘의 단점은 모두 버리고 장점만 쏙 빼서 취한 신개념 디지털카메라로 기획되었다. 한 마디로 ‘작으면서도 잘 찍히는 디카’였던 것. 하지만 이것만으로 디자인을 했다면 그저 편리한 디카가 되었을 것이다. ‘기본에 충실한 디카’라는 수식어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펜은 기본적인 디카가 아니라 에센스를 더듬어 디자인한 디카다. 올림푸스의 뼈 속에 흐르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이 물건에 쏙 들어있다. 여기서 50년을 거슬러 올라 1959년. 엄지발가락 만한 필름을 넣어 찍는 커다란 카메라만 있던 당시, 올림푸스는 크기를 절반으로 쑥 줄인 소형 카메라를 내놨다. 다른 카메라와 같은 필름을 넣지만 필름 반쪽에 한 장씩 찍기 때문에 24방 필름으로 48장을 찍었다. 손에 쥐고 쓰는 펜처럼 찍기 쉽다는 뜻에서, 그 때 붙인 이름이 ‘펜(Pen).’이었다. 1986년 단종될 때까지 여러 종류의 ‘펜’이 나왔고, 렌즈도 많이 나왔고, 관련 액세서리도 많았고 전 세계에 펜(Pen)의 팬(Fan)도 많아졌다.


그림 2. 필름카메라를 사용했던 올림푸스의 PEN 시리즈

50년 만에 나온 '펜'은 가진 것이 참 많다. 선대의 조상이 필름 반쪽에 찍었듯이, 2009년식 펜도 DSLR보다 작은 CCD(영상소자)를 쓴다. 거울과 프리즘을 통해 빛을 굴절시켜 화상을 볼 수 있는 펜타프리즘은 이번에도 없어졌다. 작은 렌즈 규격을 사용한 것도 선대나 현재나 똑같다. 사진으로 보면 알겠지만, 생긴 것도 많이 비슷하다. 1959년부터 펜(Pen)의 팬(Fan)이 된 세계인과 그들의 자손들이 2009년식 펜에 환호하고 있다. 올림푸스의 ‘에센스’를 어루만지며 디자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3. 재규어 XJ 1968년 모델

자동차에도 이와 비슷한 ‘에센스’ 디자인이 있다. 지금 한창 잘 달리고 있는 재규어다. 크롬 도금된 니퍼가 보닛 위에 달린 재규어를 보면 모두들 클래식한 멋을 생각한다. 클래식 재규어를 이끈 대표 이미지 모델인 XJ는 1968년부터 쭈욱 그렇게 생겼다. 1968년 당시 재규어는 혁신적 외관과 기술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 인기를 끌었다. 당시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아서 1973년에 그것을 기본으로 약간 바꾸고, 1979년에도 약간 바꾸고, 하지만 너무 식상한 듯 해서 1980년대에는 동그란 램프를 네모나게 바꿨다가 망할 뻔하고, 90년대에 다시 동그란 램프를 가진 클래식 재규어로 돌아가고, 그리고 지금까지 클래식한 멋을 지키고 있다.


그림 4. 재규어 XJ의 변천사.
(위 왼쪽) 1974년 형, (위 오른쪽) 1990년 형, (아래 왼쪽) 1995년 형, (아래 오른쪽) 2007년 형


그렇게 평생 클래식할 것 같았던 재규어가 최근 심하게 꿈틀거린다. 재규어의 디자인 대장인, 이안 칼럼은 “재규어의 진정한 전통이 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지난 7월 10일에 클래식 재규어의 모습을 정면으로 뒤집은 뉴 XJ를 내놨다. 새로운 XJ는 클래식하기 보다, 차라리 미래적이다.


그림 5. 2010년 형 재규어 XJ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재규어는 아니다. 재규어의 디자인 팀은 1968년의 재규어가 했던 혁신적인 상상을 오늘에 살렸다고 말한다. 재규어의 진정한 전통이 이것이라는 말도 했다. 1968년식 XJ가 당시 혁신적이었던 것처럼, 2010년식 XJ도 그것과 똑같이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만일 재규어가 또 하나의 클래식한 XJ를 디자인했다면 그건 재규어의 ‘기본에 충실’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규어는 1968년의 혁신적인 정신을 더듬어 미래적인 XJ를 디자인했다. 이런 걸 두고 ‘에센스를 더듬었다’고 하는 거다.

참, 노파심에 한 마디 덧붙이면, '에센스'는 과거의 향수를 재현하는 레트로디자인과는 다르다. 펜 카메라와 XJ는 어찌하다보니 과거의 에센스를 찾아 디자인된 것뿐이다. 과거가 거의 없는 기아자동차는 '기아(KIA)'라는 어감에서 오는 강하면서 단순한 느낌을 더듬어 직선이 단순화된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있다. 이것도 넓은 의미의 에센스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림 6. 기아의 신차들 (왼쪽) 포르테쿱, (오른쪽) 소렌토r



장진택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한 때 기아자동차 디자이너, 한 때 월간 [디자인] 기자, 한 때 [모터트렌드] 기자,  좀 전까지 [GQ]기자. 참 많이 옮겨 다녔고, 얼마 전에 회사를 또 옮겼는데, 얼마나 오래 다닐 지 의문이라고 한다. <한겨레> 신문에 '디자인 옆차기'라는 이름으로 다소 삐딱한 디자인 칼럼을 쓰고 있으며, <중앙일보>에는 자동차 칼럼을, 그리고 여기저기 매체에 다수의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여기저기 강의도 다니고 있다.

 

Tag
#디지털카메라 #자동차 #올림푸스 #재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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