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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학, 예술 등 새로운 융합을 시도한 디자인 논문 ‘자화상 Autoportrait’








한국에서는 매년 디자인 관련 석·박사 학위 논문들이 1천여 개 이상 쏟아져 나온다. 대한민국 인구 5천만 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인구비례로 따져보자면, 한해 3만 9천 3백여 명 중 한 명이 디자인 고등과정 전문가로 사회에 배출되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순수 예술 종사자들까지 점점 학력이 높아지는 추세라 한국디자인의 이러한 현상도 그리 놀랄만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논문을 쓰고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학문은 무슨 의미일까? 과연 디자인은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필자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디자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내가 배우지 않았던 프랑스의 초·중등 과정도 자녀들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누렸다. 개인적 경험으로 한국과 프랑스의 디자인 교육의 장·단점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감히 평하자면 한국은 ‘ 디자인 전문가’를, 프랑스는 ‘ 생각하는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교육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유학생들이 논하는 바이지만, 한국 학생들은 기술과 지식에서 해외 학생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지만, 본인만의 고유한 생각이 결여돼 있는 큰 단점을 갖고 있다.


필자 역시 유학 초기에 같은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 너의 정의는 무엇이냐?”, “너는 왜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가?”를 수 없이 묻는 교육자와 동기들의 질문 공세는 내가 배움에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산이었다. “너는 toi ”, “ 왜 pourquoi?”를 통한 디자이너 개개인의 철학과 관심사 개발은 프랑스 교육의 핵심이었다.


문화적 쇼크에서 본인이 선택한 논문 주제는 ‘자화상’이었다. 이 주제는 디자인보다 미술전공자들의 연구대상이지만, 동·서양의 자아(自我)에 대한 독특한 차이점을 디자인 관점에서 연구하기 위해 선택했다. 동기들의 논문 주제 또한 내게 신선했다. ‘ 희생’, ‘ 돈’, ‘ 0(無)’, ‘ 수집’, ‘ 문신’, ‘ 적(赤)’ 등 한국에서 접하지 못했던 연구 주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에게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 예술, 공학, 디자인의 전문 주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된 관심사로부터 연구를 시작하게 교육을 유도한다. 내가 그들에게서 배운 디자인융합 교육 방법은 ‘개개인의 차별성’이 그 출발점이다.


괴짜 스타 디자이너 필립 스탁(Pilippe Stack)을 배출해 알려진 프랑스 에꼴까몽도(Ecole Camondo)에서는 학부 마지막 과정에 해당하는 3학년부터 대학원 과정인 4, 5학년까지 3년 동안 하나의 주제로 연구 논문을 쓰게 한다. 물론 주제를 바꾸는 학생들도 있지만 관심 대상을 하나로 집중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 방침이다. 연구 방법 또한 실내 건축과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 논문의 창의적 실험성을 중요시 한다.






자화상 Autoportrait 논문 표지/ 자화상 Autoportrait 논문의 일부





‘ 자화상’ 1년 차 논문은 한국 대학원 논문처럼 문헌 중심의 연구로 시작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시작한 첫해의 논문 평가는 비참했다. 먼저 디자인 및 예술 외에 타 분야의 관점을 논하지 않은 점과 내 견해보다 학자들의 견해를 중시한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2년 차 논문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 분야 조사와 예술적 실험을 병행했다.


설문과 인터뷰, 자화상을 그리는 사람들의 관찰기록 등 나만의 연구 방법을 찾아 논문을 완성했다. 연구는 길거리에서, 카페, 도서관, 성당, 예술가 아틀리에로 이어졌다. 동기들도 내 연구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 3년 차에서는 나는 단지 디자인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논문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동기들도 논문을 글로 완성하면서 디자인 프로젝트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3년 동안 진행된 다양한 실험과 결과물을 통해 지식과 개인적 경험이 축적된 소설형식의 논문이 완성되었다. 논문 ‘자화상’은 거울을 공간과 오브제로 적극 활용한 서양과는 달리, ‘영혼의 반사체’로서 신중하게 다루는 동양의 문화적 차이점을 지도교수와 토론하며 발전시킨 주제였다.


목차는 500여 개의 동서양 자화상의 빛과 공간, 연출 특성 등을 비교하고 다양하고도 의미 있는 개인적 실험들을 통해 ‘ 자화상 보기 regarder’, ‘자화상 보이기 etre regarde’, ‘자화상 눈 맞춤을 통한 서로 보기 se regarder dans lesyeux’ 등 3단계로 구성했다.


특히 ‘타인의 시선을 배우는 자화상 J’apprends a etre regardee’을 쓰기 위해 일본 문학가 아베 고보(安部公房)의 <상자인간>처럼 상자를 머리에 쓰고 타인을 관찰하기도 했고 경찰서의 피해 진술서를 통해 자화상과 초상화의 기능을 비교 연구하기도 했다. 또 500여 개의 자화상에 그려진 눈을 포스트 잇으로 가리고 실험을 하거나, 자화상의 공간을 디자인적으로 통계 분석해 논문에 제시하기도 했다.


본인의 논문은 문학과 예술, 디자인, 건축, 심리, 철학, 미학 등 다분야 연구접근을 고민했고, 많은 사람들의 조언과 관심 덕분에 학위자격 논문심사에서 최우수 평가인 ‘펠리시따시옹 felicitation’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 디자인의 장점은 유행에 치우치지 않는 그들의 철학과 개개인의 차별성을 존중하는 문화에 있는 것 같다. 같은 주제, 같은 스타일을 피하고 개인의 장점을 살려 끝까지 파고들 수 있는 조형적 코드를 발굴하는 것, 따라서 학문적 융합은 그들에게 새로운 주제가 아니며 이미 배어있는 습성인 것이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단지 유행하는 디자인 트렌드라는 이유만으로 너도 나도 그것을 연구하지도, 큰 이슈로 더 강조하지도 않는다. 이는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필자가 정의하는 ‘융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화된‘ 다핵(多核)’ 구조를 창조하는 것이다. 디자인의 융합은 타 분야를 모두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디자인이 스며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화상 작품 연대 연구



좌. 가장 많은 자화상을 남긴 램브란트의 빛 연출 분석/ 우. 즉석사진기를 통한 자화상 실험의 story board




디자인 교육은 개개인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디자인 외에 관심 분야를 개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디자인 외에 별다른 취미나 관심사가 없는 디자이너들이 많은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디자이너들이 법률가, 음악가, 영화 연출가, 무용가, 요리 전문가, 농·수산물 생산자, 체육인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로 진출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국의 디자인 교육이 유연하게 열려 있었으면 좋겠다. 또한 나 역시도 요즘 들어 다시 반성 중이지만, 디자인 연구가 학위나 실적 불리기를 목적으로 행해지지 않고 순수한 지성 행위로 인식하는 풍토가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30년전 초등학교 졸업 당시 학생기록부의 장래희망에는 ‘디자이너’라고 적혀 있다. 지금도 역시 장래 희망은 ‘디자이너’이지만, 그 앞에 나만의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를 위해 미숙하지만 디자인 외에도 사회, 경제, 예술, 북한 정보를 함께 융합해 연구하고 있다. 창의력이 요구되는 직업인 디자이너에게 지속적인 배움이 없다면 그 직업의 기본기를 잃은 것이라는 소신이 있다. 나 역시도 디자이너로서 그 소신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지속적인 배움이 단지 허영이 되지 않도록 겸손히 남에게 귀와 눈을 열어 타인의 삶과 함께 융합하며 살고 싶다.

글. 최희선 <한국디자인진흥원> 디자인개발실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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