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전시하다'- 런던의 한국 영 아티스트 그룹전 'Penumb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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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 작가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자유, 상상력 등의 가치와 맞닿아 있는 분야라는 속성상, 이들을 ‘코리아’라는 깃발 아래 일렬종대로 모으는 시도는 간혹 억지로 이를 끼워 맞춘 퍼즐 같은 느낌을 준다. 희망적이게도 최근 코리아라는 표피적이며 일차적인 브랜드를 내세우는 대신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한국성(Koreaness)’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실험적인 그룹전이 조금씩 늘고 있다.
런던 남쪽 버몬지(Bermondsey) 지역 창고 건물을 개조한 전시장에서 열린 한국 젊은 작가들의 컨템퍼러리 아트 전시 ‘Penumbra’. Image © Penumbra Project
지난 10월 18일부터 25일까지 런던 남쪽 버몬지(Bermondsey) 지역에서 열린 컨템퍼러리 아트 전시 ‘Penumbra’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 전시였다. Penumbra는 영어로 반음영 상태를 뜻하는 단어. 밝음과 어둠의 중간 지점, 유(有)와 무(無)의 경계상태를 뜻하는 철학적인 타이틀의 이 전시엔 ‘The 8-day project with 8 artists ending in a group exhibition’라는 부제가 붙었다. 8일에 걸쳐 8명의 작가가 릴레이식으로 전시를 하는 방식이었다. 타이틀 어디에도 한국이란 단어는 없었지만 런던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큐레이터 권혁규씨가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유영, 신기운, 최은숙, 김하영, 박봉수, 권루비, 이로코, 원지호 등 아티스트 8명과 함께 기획한 전시였다.
전시가 열린 버몬지 지역은 런던 브리지 역 근처로 창고 건물이 밀집한 지역으로, 최근 예술가들이 모여 들고 지난해 화이트 큐브가 개관하면서 문화적으로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낙후 지역이다가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힙한 장소로 변모한 쇼디치를 잇는 지역으로 인식된다. ‘Penumbra’전이 열린 장소인 ’The Bermondsey Project Space ’는 거대한 창고 건물이었다. 불안정한 공간 안에 8명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매일 연달아 작품을 설치하는 독특한 전시 방식이 선보여졌다.
8일 동안 8명의 작가가 하루씩 릴레이하듯 전시했다. Image © Penumbra Project
소설로 치면 옴니버스식 구성인 동시에 액자식 구성이었다. 8명의 작가가 만든 작품이 액자처럼 나열됐다. 그런데 작가들이 전시장 공간에 병렬적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을 활용했다. 작가들은 자신이 설치를 하는 단 하루에 대해서만 완벽한 ‘설치&전시 권리’를 행사하고, 나머지 날에 대해선 자신의 작품이 ‘침범’되는 것을 용인했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작가들이 interaction을 보임으로써 작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는 흥미로운 결과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한 전시였다. 마치 전시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이 된 느낌이었다. 어쩌면 전시의 진정한 주인공은 8개의 작품이 아니라, 전시 그 자체였다.
첫날 작가 홍유영의 "웨이팅룸". 포장마차 형태로 한국적 이미지를 보여줬다.Image © Penumbra Project
큐레이터 권혁규씨는 ‘ 진정한 그룹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영국에서 열리는 한국 그룹전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두 가지 질문을 전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고민은, 대개의 그룹전이 큐레이터가 작업을 규정하고 작가는 거기에 맞춰 결과를 맞추려고 하다 보니 인위적인 한계를 지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여주자고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해결됐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고민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기로 귀결됐다. 한국전이라면 떠오르는 상투적인 한국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작가들이 한국이라는 단어, 그 단어가 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자율적으로 작업을 하게 함으로써 은연중에 드러나는 한국성을 관객이 느끼도록 하기로 했다.
첫날, 백지에 첫 점을 찍은 주인공은 작가 홍유영이었다. 그는 텅 빈 창고 공간에 한국식 포장 마차 형태의 ‘웨이팅룸(waiting room)’을 설치했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전시를 위한 대기실이라는 메타포를 탑재한 것 같았다. 둘째 날 작가 신기운은 전시장 입구 문 옆에 영상으로 문을 하나 더 만들어 문 밖의 풍경과 영상이 만들어낸 가상 풍경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체험을 선사했다. 셋째 날 작가 최은숙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을 만들어 자신만의 화이트 큐브를 만들고 공간을 재해석하고 선을 그려 2차원의 면이 3차원의 입체 공간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날 작가 신기운은 전시장 입구 문 옆에 영상으로 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문이 보인다.Image © Penumbra Project
셋째 날 작가 최은숙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을 만들어 자신만의 화이트 큐브로 공간을 재해석했다. Image © Penumbra Projeffct
넷째 날 작가 김하영의 작품이 설치되는 모습. Image © Penumbra Project
넷째 날 작가 김하영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 위에 필름 지로 찍은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본격으로 작가들의 작품이 물리적으로 겹쳐지기 시작했다. 다섯째 날 박봉수 작가는 네 개의 기둥과 천장에 거미줄처럼 줄을 매달아 동양적 사주팔자를 표현했다. 전 작가들의 설치작품과 사다리가 새 작품의 배경이 됐다.
여섯째 날을 장식한 권루비는 적극적으로 타 작품에 물리적 개입을 시도했다. 신기운 작가가 미디어 작품을 위해 둔 프로젝트 옆에 종이로 페이크 프로젝터를 놓고 다른 작품 사이에 테이프를 붙여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일곱째 날 작가 이로코는 스테이지를 만들고 첫날 홍유영이 웨이팅룸에 쓴 의자를 꺼내 관람객석으로 활용한 뒤 절규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타인의 작품 일부를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에 쓴 것이었다. 마지막 날 원지호 작가는 빛을 이용해 그 전 일곱 작가의 설치물이 놓인 전시장 공간의 경계를 연장하는 시도를 했다. 공식적인 전시장 옆쪽의 천장에 빛을 비춰 전체적인 전시를 아우르는 배경을 연출했다.
다섯째 날 작가 박봉수는 네 개의 기둥과 천장에 거미줄처럼 줄을 매달아 동양적 사주팔자를 표현했다. Image © Penumbra Project
![Image © Penumbra Project Image © Penumbra Project](http://file.designdb.com/EDITOR/71/24602820121204064052.JPG)
여섯째 날 본격적으로 타 작가의 작품에 개입한 작가 권루비. 진짜 프로젝터(오른쪽) 옆에 가짜 프로젝터(왼쪽)를 설치했다. Image © Penumbra Project
일곱째 날 작가 이로코는 스테이지를 만들고 첫날 홍유영이 웨이팅룸에 쓴 의자를 꺼내 관람객석으로 활용한 뒤 절규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Image © Penumbra Project
![.Image © Penumbra Project Image © Penumbra Project](http://file.designdb.com/EDITOR/71/24602820121204001828.JPG)
마지막날 원지호 작가의 영상. 전시장 벽 뒤로 천장에 조명을 비추어 전시장을 시각적으로 연장시켰다. 앞의 홍유영의" 웨이팅룸"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Image © Penumbra Project
서로 다른 개성의 젊은 한국 작가 8명의 실험은 약간은 투박하지만 억지스럽지 않은 협주곡을 자아냈다. 내셔널리티를 앞장 세우지 않음으로써 되려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이 흥미로운 전시의 방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휘자, 큐레이터의 소박한 아이디어에 있었다.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