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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스타일 대표주자 앙드레 풋만 (Andree Putman) 역사속으로 지다

프렌치 스타일 대표주자

앙드레 풋만(Andree Putman) 역사속으로 지다.



1월 22일 프랑스 실내디자인협회로부터 이메일 하나를 받았다. 프랑스 인테리어디자인에 큰 획을 그은 앙드레 풋만 (Andree Putman) 의 부고였다.

2010년 11월 파리 시청에서는 앙드레 풋만 (Andree Putman) 의 디자이너인생을 정리라도 하는 듯한 큰 전시가 열렸었는데 그때 그녀가 무언가 차근히 정리를 하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아 길게 늘어선 줄을 끝까지 기다려 꼼꼼히 짚어가며 열심히 전시를 봤던 기억이 난다. 큰 별이 지기 전의 마지막 깜박임.. 왠지 모를 그때의 그 서글픈 느낌이 살아나 그 부고가 더 안타깝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
 putman studio


앙드레 풋만(Andree Putman)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할지라도 자기 자신도 검은색과 흰색을 코디 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 검은색+흰색 다미에checkerboard 욕실 » 하면 떠오르는 디자이너, 그녀가 바로 앙드레 풋만이다. 174cm의 큰 키에 긴 목선 늘 옆 가르마를 탄 금발의 단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깐깐한 디자이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젊을 적 그녀의 사진을 보면 누가 보아도 부르쥬아 집안 아가씨다운 엘레강스한 스타일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집안은 한마디로 대단했다. 할머니쪽 집안은 최초로 열기구를 발명해 사람이 하늘을 나르게 했던 몽골피에 형제로 유명한 몽골피에(Mongolpier) 가문이었고 할아버지는 리옹(Lyon) 지역의 정치가이자 은행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학교 에꼴 노흐말(Ecole Normale)  출신에 7개국어를 하는 엘리트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음악가였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앙드레 풋만은 여름 방학이면 할아버지 소유의 수도원 성l"Abbaye de Fontenay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공간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을 자연스럽게 끌어낸 계기가 되었으며 이곳에서의 경험이 그녀가 처음으로 미적 직관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녀는 성의 돌들과 빛의 놀이를 했었다. 빛의 변화에 따른 성의 벽들과 계단들의 변화를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 무채색 계열에 대한 풍부함과 다양함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이로웠다 » 말하고 있는데 훗날 그녀의 색감들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블랙 앤 화이트, 베이지, 그레이는 어린 시적의 그러한 경험들이 훗날 그녀의 디자인 스타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임을 알 수 있다.  



 
© Mairie de Paris


앙드레 풋만의 디자인은 화려하거나 여성스럽지 않지만 절제된 아름다움이 개성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그녀의 외모와도 참 닮아있다. 엄격한 규칙 속에 자유로움. 그녀의 디자인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바로 절제미 속에서 공존하는 대범함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시대를 타지 않는 풋만 디자인, 그 영속성의 비결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디자인은 과거에서 현재까지도 급격한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녀의 가구와 오브제들을 보고 있노라면 라인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은 극도의 섬세함과 신중함이 묻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그녀의 디자인에서 품격이 느껴지는 이유이며 그 느낌들이 그녀를 대표적인 프렌치 모던의 대표 디자이너로 불려지게 한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 Deidi von Schaewen / Gildo Pastor Center  Monaco  1996

그녀는 이 계단은 그녀의 작품스타일을 잘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자신이 아끼는 목걸이에서 형태를 착안해 군더더기 없이 빛만으로 계단을 완성했다. 채워진 곳이 비어 보이기도 하고 비워진 곳이 채워져 보이기도 한다. 자연광의 시간에 따른 변화를 고려해 실내 벽과 바닥과 천정의 색을 결정하는 그녀의 디자인 방식처럼 이 계단의 빛의 밝기와 색 또한 그 내부 공간의 조화를 완벽하게 고려한 것이다.



 
© Le Studio Andree Putman /2009년 Emeco 의 앙드레 풋만 디자인 의자 콜렉션






 
© Le Studio Andree Putman /2008년 디자이너의 날에 소개됐던 piano Pleyel


앙드레 풋만이 처음부터 프랑스 사람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그 시절 그녀의 스타일은 호불호가 너무도 뚜렷하게 갈리었고 프랑스 내에서 보다는 외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케이스이다. 프렌치 대표 디자이너라는 별칭을 갖게 되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릴 수 있을 만큼의 도약을 한 작품은 바로 그녀의 대표작 뉴욕 모르간 호텔 (Morgans Hotel New York)이다.  뉴요커들은 그녀를 단순한 인테리어디자이너가 아닌 예술가로 여겼다. 어쩌면 뉴요커들이 먼저 인테리어디자이너 이전의 그녀의 삶이 인테리어디자이너로서의 작업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른다.

앙드레 풋만 (Andree Putman) 은 올해 2013년 1월 19일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디자인 인생을 보면 비슷한 나이에 생을 마감한 건축가나 예술가들에 비해 많은 대표작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19세가 되던 해까지 그녀는 피아노와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prix d'harmonie au Conservatoire de Paris" 에서 우승을 할 만큼 촉망 받는 젊은 음악가였다. 그러나 진정 훌륭한 작곡가로 성장하려면 10여년간 연습에 매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스승으로부터 듣게 된다. 음악뿐 아니라 모든 창작활동에 흥미와 호기심을 가진 그녀는 늘 그 열정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갈구했으며 1950년부터 패션잡지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그녀의 예술적 소양들이 십분 발휘되어 아트 디렉터의 역할도 하게 되며 여러 시대의 오브제와 스타일들을 섭렵하게 되는데 그 시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Cafe de Flore에서 시간을 보내며 Pierre Alechinsky, Bram van Velde, Alberto Giacometti 그리고 Niki de Saint Phalle등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1958년 그녀는Prisunic라는 수퍼마켓 체인점 "Maison" 분야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 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바로 이 때에 모든 이가 접근 가능한 아름다운 것의 창조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고 이는 훗날 앙드레 풋만 (Andree Putman) 의 디자인 철학으로 자리잡는다.

1971년. 앙드레 풋만 (Andree Putman) 은 당시 디자인 그룹 Createurs et Industriels의 창업자이자 훗날 Thierry Mugler 의 대표 Didier Grumbach와 함께 일하게 되는데 Createurs et Industriels 디자인 그룹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녀는Thierry Mugler부띠끄들과 개인주택을 디자인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1978년 마침내 그녀의 설계 사무실 Ecart International를 열게 된다. 본격적으로 데코레이션과 가구 디자인 등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Eileen Gray, Mariano Fortuny ou Robert Mallet-Stevens등 그녀가 늘 존경해마지 않았으나 사람들에게는 잊혀지려 했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의 가구를 다시 제작해 세상에 내어놓는 일에도 힘을 쏟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 끝에 1984년 마침내 그녀에게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갖게 한 전환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띡호텔 (boutique-hotel) 모르간 뉴욕 (Morgans hotel New York) 의 디자인이다. 바로 이것이 규모는 작지만 특별한 디자인으로 빛나는 부띡호텔(boutique-hotel) 장르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 Morgans hotel / Morgans
 2008



 
© Deidi von Schaewen / Morgans 1984


부띡호텔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모르간 뉴욕 (Morgans hotel New York) 의 디자인 중 욕실 디자인이다.  모르간(Morgans) 호텔을 위해 처음 디자인한 모티브 블랙 앤 화이트가 대비되는 바둑판 배열의 타일 사용은 그 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데 블랙 앤 화이트만을 고집해 입는 그의 의상 스타일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 Deidi von Schaewen / 1993 Concorde



2010년 파리 시청 전시회 모습



2010년  파리 시청 전시회 모습




2010년 파리 시철 전시장 - 콩코드 내부 디자인 프로토타입과 블랙 앤 화이트가 대비되는 바둑판 배열의 카켓모습이 보이는 전시회장 모습


2013년 1월 19일. 그녀는 87세의 나이로 파리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고 그녀를 회고하는 짧은 에피소드들도 간간히 소개되었다. 생제르망 성당에서 치뤄진 그녀의 장례식은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졌다. 


1978년 그녀가 세운 최초의 스튜디오Ecart International 는 그 후에도 존재하고 있다. 1997년 앙드레 풋만이 따로 나와 만든 스튜디오 앙드레 풋만 (Le Studio Andree Putman)은 많은 이슈를 남기며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과 받았다.

 

© ph P. Biancotto  올리비아 풋만과 앙드레 풋만


현재 앙드레 풋만의 명성은 그녀의 딸 올리비아 풋만(Olivia Putman)이 잘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어머니의 이름 때문에 어쩌면 무거운 책임감으로 힘에 겨웠을 법도 하지만 올리비아 풋만은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훈련 받은 프로페셔널한 정신에 또 다른 그녀만의 감각을 더해 훌륭하게 풋만 스튜디오를 이끌어가고 있다. 앙드레 풋만은 갔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과거와 현재에 늘 공존하는 디자이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될 올리비아 풋만(Olivie Putman) 의 풋만 스튜디오(Le Studio Andree Putma)의 행보를 눈 여겨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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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스타일 대표주자 #앙드레 풋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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