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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GINA, 판도라의 상자 03 _ 박해천

지나GINA, 판도라의 상자 03



글  박해천

1982년, 디즈니사는 야심차게 영화 <트론(Tron)>을 발표한다. 흥행과 비평 양 측면에서 대재난을 초래했던 이 영화는 이후 최초로 3D 컴퓨터 그래픽스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로 회자되곤 한다.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이 영화가 활용한 컴퓨터그래픽스의 수준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그래픽스는, 노동자 없는 공장, 즉 설계와 생산의 자동화를 욕망하는 포스트포드주의의 하위 종목, 즉 CAD/CAM의 일부로 취급되었고, 그에 따라 투시도법이나 기계 제도 방식의 이미지 생산을 디지털로 자동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맥락의 한복판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트론>이 연출한 가상의 공간은 철저하게 와이어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레고 블록과 잘 어울리는 세계였다. 

하지만 상황은 곧 변했다. 60년대부터 군산복합체 내부의 대학연구소에서 컴퓨터그래픽스의 군사적 활용방안을 연구하던 일군의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군부의 재정지원이 줄어든 틈을 타, 민간 영역으로 엑소더스를 감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중 일부는 아타리와 실리콘그래픽스와 어도비를 창립했고, 또 일부는 조지 루카스와 스티브 잡스와 각각 손잡고 ILM와 픽사에서 브레인 역할을 했으며, 또 일부는 제록스 팔로알토 등 민간연구소에서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와 객체지향적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했다.

이렇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컴퓨터그래픽스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것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삼아 블록버스터 전략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던 헐리우드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스펙터클의 시각적 쾌감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려던 이들에게, 컴퓨터그래픽스는 특수시각효과의 전략무기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지되었다. 

컴퓨터그래픽스와 헐리우드 자본의 결합, 1990년대에 펼쳐진 그 결합의 결과에 대해선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2>는 형상기억합금 사이보그 T-1000을 통해 <어비스>에서 물방울 외계인 캐릭터로 실험했던 모핑 기법을 완성해 보였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은 화석에서 유전자를 채취해 컴퓨터그래픽스의 알고리즘으로 공룡을 살려내고, 탈역사적 테마파크를 스크린 위에 건축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대성공 이후, 이들 영화를,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의 디지털화된 이미지 생산 양식을 모방하려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건축의 헨리 포드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모더니스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를 떠올리며,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를 롤모델로 삼는다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욕망한 것은 카메론과 스필버그였다. 일단 스크린에서 현실공간으로 수평이동을 시도하는 이들의 조형적 실험은 꽤나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투시도의 기하학적 매스에 길들여져 있던 일반인의 공간 감각에 현기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고, 그 정점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였다.


그림 1.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빌바오’


그림 2. 그렉 린의 형태실험 ‘Embriological Housing’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그들이 컴퓨터그래픽스의 기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하면서 디자인한 '조형물들'은, 사실상 스크린 상의 CG 동영상에 넋을 놓고 몰입해서 보다가 리모콘의 정지 버튼을 재빨리 눌러 특정 장면을 캡처한 결과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컴퓨터그래픽스 이미지 프로세싱의 정지 화면 버전에 가까웠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티-렉스를 살아 움직이는 가상의 생명체로 연출해 보여줬던 반면, 건축가들은 그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될 법한 공룡의 모형만을 실제 크기로 제작해 보여줬을 뿐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이 야심차게 꿈꿨던 것은, 컴퓨터의 알고리즘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꿈틀대며 자체의 공간을 변형하는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들은 생산공정 상의 이유로 대용량 하드디스크의 '탈물질적' 포멧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20×1080의 평면 스크린에 최적화된 건축물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하드디스크 속에서 데이터의 형태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유기적 조형물을 현실 세계로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뚜렷한 해결방안이 마련되지 않자, 이른바 디지털 건축의 몰락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전세계 각지에 세워진 빌바오 구겐하임의 클론들 덕분에 재미를 보았던 프랭크 게리는 부실 공사를 이유로 MIT로부터 소송을 당했고, 철학자 질 들뢰즈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접힘과 창발의 건축'을 주창하던 그렉 린은 고장 난 모핑 알고리즘의 인공지능 에이전트처럼 배설물 같이 생긴 의자들을 반복적으로 디자인했다. 또한 RGB 색채 패턴의 조감도로 한때나마 새로움을 안겨주었던 기이한 형태들은 이내 식상해져서, 마침내는 조엘 실버 같은 마초 취향의 영화 제작자가 B급 SF 영화의 배경 무대로 선호할 법한 '리비도적 스타일'로 전락했다. 결국 일부는 클라이언트를 찾아 인도로 향했던 르 꼬르뷔제의 전철을 밟아 제 3세계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그들의 기괴한 건축물을 여전히 신기한 눈으로 바라봐줄 만한 촌티 나는 클라이언트들, 즉 금고에 넘쳐나는 달러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부동산 졸부들, 그리고 매갈로매니악한 랜드마크에 집착하는 정신 나간 정치인이나 행정 관료들이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강호의 도는 땅에 떨어졌고, 무림의 "엣지"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림 3. 지난 2008년 소개된 BMW의 콘셉트 카 ‘지나 라이트 비저너리 모델(GINA Light Visionary Model)’

크리스 뱅글의 ‘지나(Gina)’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앞선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철근과 콘크리트, 유리라는 인공재료의 발명이 없었다면, 모더니즘 건축은 투시도법에 내재한 유클리드 기하학의 논리를 현실 세계로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즉 르 꼬르뷔제 같은 이들이 꿈꾸었던 거대 도시의 투시도화는 재료의 혁신에 밑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와 마찬가지로, 스크린 상의 움직이는 인공 생명체가 현실 세계로 뛰쳐나오려면, '고정되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지 않을까? 크리스 뱅글은 이 가설을 논증하며 형태와는 전혀 다른 '스킨'의 논리를 천명한다. 흥미롭게도 지나에 주목한 것은 자동차 산업이나 산업디자인계보다는 건축계였다. 건축사무소 RMJM의 후원을 받은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생들의 미래 교외 주택 프로젝트를 필두로, 지나의 팽팽한 스판덱스 스킨으로부터 자극 받은 것이 분명한 조형적 실험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더니즘 건축에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이 현대적 엔지니어의 합리적 정신이었다면, 디지털 건축에 재도약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자동차 산업의 스타일링 전략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니 눈꺼풀을 깜박거리는 지나의 헤드램프에서, 10여 년 동안 많은 전문가를 좌절시킨 수학 난제를 아주 간단한 해법으로 풀어버린 천재 소년의 영민한 표정이 엿보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트론 (1982) 트레일러
트론 레가시(2010 개봉 예정) 트레일러

[참고 기사]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의 미래 교외주택 프로젝트
 



박해천_디자인연구자

디자인 연구자. 한국 과학기술원 산업디자인학과의 박사 과정에 '아직도' 재학 중이며, 홍익대, 국민대 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여전히' 강의한다. <디자인앤솔러지>(공역),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등을 번역했고,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 <한국의 디자인 2: 시각문화의 내밀한 연대기>, <디자인플럭스 저널 01: 암중모색>등의 책을 기획•편집했다. 단행본으로는 <인터페이스 연대기: 인간, 디자인, 테크놀로지>를 펴냈다.

 
Tag
#컴퓨터그래픽스 #재료 #혁신 #건축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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