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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술로 마이클잭슨 이해하기”전

[자료 제공 : 아프리카 미술관]
 

지난 1월 20일 갤러리 통큰에서 "아프리카미술로 마이클잭슨 이해하기"전이 열렸다.

전시는 크게 ‘아이와 어른의 경계’, ‘인간과 세계의 경계’,
‘경계인을 위한 노래’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져 있으며,
잭슨의 노래와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마이클잭슨의 이데아적인 내용들을 아프리카그림들과 관련시켜
우리가 추구해야할 의미들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고 한다.

 

제1부 : 아이와 어른의 경계

A. 아이로서의 잭슨

여덟 살부터 ‘Jackson Five’로 활동한 마이클잭슨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공부하며 놀기보다는 나이트클럽이나 행사장에서 어른들의 현실을 노래하면서 아이다움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른이 될 수도 없었다. 그 상실의 한가운데에 아버지의 혹독함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고,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버지와의 화해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한국의 박찬상 작가는 마이클잭슨의 어린 시절에서 아이다움의 끝을 보았다고 했다. 상처받은 영혼이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인가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 아이다움을 상실한 그러면서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한 마이클잭슨의 슬픈 내면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아이다움의 상실, 치유되기 힘든 영혼, 이는 ‘실패한 피터 팬’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마이클잭슨의 예견된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B. 어른으로서의 마이클

1973년, 열다섯 살에 마이클잭슨은 “Got to be there."라는 노래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은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위한 길이었지만, 시련은 너무 컸다. 아버지와의 갈등과 대립은 아버지의 부재로 이어졌다. 마이클잭슨이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크게 받았으면서도 광장공포증을 겪은 것은 결국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음악을 원했던 마이클잭슨에게 한계는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학적 디자인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콩고의 칸킨다(J. Kankinda)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눈을 그리지 않은 것처럼, 마이클잭슨은 들리는 멜로디보다 들리지 않는 멜로디를 찾기 위해 가족의 곁을 떠났고, 자유로움을 위해 세상 속의 자신을 선택했다. 
  

C. 마이클 잭슨과 세 어머니

아프리카 화가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머니라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잭슨은 어느 정도 고통을 비켜나갔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꾸준히 들려주어 재능을 일찍 발견하게 한 어머니 캐서린잭슨, 음악 밖에 모르는 마이클잭슨에게 다양한 예술세계를 보여주어 멀티 플레이어로의 가능성을 열어 준 다이애나로스, 인종과 나이의 벽을 넘어 인간의 진정성을 알게 해준 엘리자베스테일러, 이들은 마이클잭슨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서 구체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먼저 세상에 보냈다.”는 아프리카의 격언에서처럼, 마이클잭슨의 세 여자는 아세파의 ‘꽃을 든 세여인’과 같이 신의 메신저이면서 소망 그 자체였다. 그래서 마이클잭슨이 부르는 노래는 평화의 염원을 담는 신의 멜로디가 되고, 일상의 행복을 바라는 인간의 이데아가 된다.

 

제2부 : 인간과 세계의 경계 

A.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마이클잭슨이 태어난 1950년대는 많은 부조리가 있었다. 이데올로기는 차치하고라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대중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에도 흑인의 자리가 따로 있었고, 많은 지역에서는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런 부조리가 긴 시간동안 자행되고 있을 때, 마이클잭슨은 인간과 삶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에서는 인종차별은 물론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갈등이나 대립이 용납되지 않았다. 마이클잭슨의 경계 넘나들기는 한편의 마술과도 같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한사람의 노력이 세상에 큰 믿음을 남긴 것이다. 이는 세네갈의 두츠(N. Douts)가 강조하는 “1=100, 100=1”라는 주제와 같은 맥락이다. ‘1=100’이라는 말은 하나가 모두와 같다기보다는 한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마이클잭슨의 삶과 음악을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B.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마이클잭슨은 자신의 곡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드는 것은 자기의 일이지만 그것은 신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이 주신 재능을 사용할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모든 영광을 신에게 돌리려는 마음에서 현대음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가혹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아버지에의 공포는 세상 끝에 있는 사람들과 맞닿아 여기저기서 마이클잭슨을 괴롭혔다. 그는 지금의 이 고통이 잠시 스쳐가는 신의 노여움이기를 그리고 자신이 감내할만한 고통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 그는 절망을 경계했다. 왜냐하면 절망은 인간의 마음속에 지옥을 만들기 때문이다. 콩고의 물람바(M. Mulamba)가 시련 속에 노출된 마이클잭슨의 모습을 예수와 비슷하게 그린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음악이 기도가 되고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C.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마이클잭슨에게 있어서 춤은 인간성을 표출한다거나 이상적인 삶을 묘사하는 고도의 드라마와도 같다. 일정한 리듬과 형식에 얽매이면서도 그것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를 강력하게 표현하는 행위, 그러면서 자신과 관객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엑스터시에 빠지는데서 마이클잭슨의 춤은 인간의 관계의미를 다시 끔 생각하게 한다. ‘모두가 주연’이라는 케냐의 카툰(J. Cartoon) 그림에서처럼 중심과 주변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서 주연과 조연은 서로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자신을 대상세계와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자타합일(自他合一)의 과정과도 같다. 물론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잭슨의 춤은 인간간의 관계를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행위, 개인의 정체성을 공동체의 동질성으로 전환시키는 의식(儀式)이기도 하다. 이런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이클잭슨의 춤은 자신의 가치와 인간의 의미를 다시 끔 생각하게 하는 고도의 드라마가 된다. 
 

 

  제3부 : 경계인을 위한 기도

A. 진동이 아닌 마음의 영역

마이클잭슨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실체를 가진 것들이 아니다. 그의 노래 가사에 유달리 많이 언급되는 치유, 화해, 용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치 이데아와도 같은 것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고통들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열정적이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최면에 빠지게 하여 소리를 의식 깊숙한 곳까지 전달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음색이나 완벽한 음표를 지향하기보다 이데아 내지는 신을 인식하게 함으로서 여럿의 마음을 하나의 마음으로 묶게 만든다. 세네갈의 케베(I. Kebe)는 ‘세상을 향한 노래’라는 작품에서 소리는 단순한 진동이 아니라 마음 혹은 그 이상의 울림이라고 했다. 마이클잭슨이 음악을 통하여 인간을 현실보다 더 위대하게 만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귀에 들리는 열정적인 멜로디도 감미롭지만, 슬픈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들리지 않는 마음의 멜로디는 더욱 더 감미롭기 때문이다.
 

 B. 최후의 만찬은 없다.

마이클잭슨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치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일상에의 도전과 시련의 끝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살아있는 사자(死者)’로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지속되는 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물론 마이클잭슨은 현실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줄어갈 때 그의 이름도 점차 잊혀 질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잭슨은 잊혀짐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죽음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불사(不死)의 상태에서 집단적인 불사의 상태로 전환되어 신적 의미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신을 향한 여인의 몸을 ‘시간의 문’으로 표현한 에티오피아의 타데세(M. Tadesse)는 한 개인의 열정 혹은 깨달음이 집단의 염원과 일치될 때 불멸성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집단의 축적된 소망 내지는 이데아에 관한 것으로 일상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 삶의 리듬을 방해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 다른 시작이다. 그래서 마이클잭슨의 죽음은 죽음 그 이상이 된다.
  

C. 경계인을 위한 노래

아직도 세상은 평화로부터 너무나 멀다. 인간은 인간을 그리고 신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세상을 향해 증오의 눈빛도 확산시키고 있다. 마이클잭슨이 더욱 더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이데아의 세계로 끌어올리거나 끌어내릴 때 그 중심에 인간을 두었고, 신을 두었다. 모두가 주체임을 소망한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들 간의 평화를 노래한 것이다.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세우며 춤을 출 때, 신을 인간에게 향하게 했고 인간을 신에게 향하게 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신성(神性)을 현실세계의 이야기로 전해주었고, 심성(心性)을 하늘세계의 이야기로 전해주었다. 마이클잭슨은 경계적인 존재였다. 그에게는 인간과 신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에 대한 열정에 차별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신에게 무릎을 꿇고 인간의 이야기를 전했고, 마음이 약한 자의 손을 붙잡고 신의 말씀을 전했다. 신은 인간에게 더욱 더 다가와야 함을, 인간은 신에게 더욱 더 다가가야 함을 간절히 기도했다. 키부티(M. Kivuthi)의 ‘초자연은 하모니’라는 작품에서처럼, 마이클잭슨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신을 하모니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위대한 경계적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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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통큰 #아프리카 미술관 #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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