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포스터로 보는 캘리그라피

디자인 산업이 발달하고 디지털시대가 도래하면서, 세련되고 모던한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것은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 한쪽으로 밀어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각박한 현대적인 디자인 속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것들을 그리워했다. 세련되고 모던한 것보다 감성적인 것, 옛 것 혹은 그 비슷한 것들을 보고 싶어 했다.

자연스럽게 감성적인 디자인들이 고개를 들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캘리그라피’다. 캘리그라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듬뿍 갖고 있다. 붓을 이용해 쓴 듯 한 이것이 서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서예는 글씨 자체에 의미를 두고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는다. 그와 달리 캘리그라피는 이미지적인 성향이 강해 독립적인 의미를 갖기보다, 다른 컨텐츠와 연결하여 그 것을 대변하는 존재로까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글자에 감정을 호소해야 하는 광고, 제품, 영화 등 다양한 컨텐츠에서 캘리그라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중 특히, 영화 타이틀에 쓰인 캘리그라피의 의미를 영화와 함께 보려고 한다.

캘리그래피가 영화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996년 상영된 임권택 감독의 ‘축제’의 포스터에서다. 서예가 여태명 교수가 개발한 민체로 쓰인 것으로, 당시 춘향가를 민체로 펴낸 것에서 발췌해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캘리그라피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 된 해가 2004년인 걸 보면, 영화 타이틀에서 사용된 캘리그라피가 영역 확장의 시작점에 거의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일반 대중들에게 서서히 관심을 받다가 2000년도부터 ‘시월애’, ‘파이란’ ‘타짜’, ‘혈의 누’ 등 다양한 영화의 타이틀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5월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하하하’, ‘하녀’, ‘시’ 이 한국 영화 3작품의 타이틀에서까지 캘리그라피를 볼 수 있다. 이 세 영화의 스토리를 통해 각 제목의 캘리그라피 의미를 해석해보자.

이창동 감독 ‘시’의 글씨는 이창동 감독이 직접 썼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영화인만큼 온 혼을 담아 영화의 느낌을 살려내고 있다. 얇고 가녀린 이 제목은 영화 속에서 배우 윤정희의 약하고 여린 캐릭터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포스터 속의 윤정희의 애절한 표정과 정말 잘 어울린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 이 영화는 두 배우가 막걸리를 한 잔 씩 걸치면서 가장 즐거웠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여기서 영화 제목을 내용과 해석하기 전에 ‘하하하’라는 제목에 이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막힐 때 하, 여름 하(夏)의 하, 웃을 때의 하. 이 세 글자를 모두 합쳐 호탕하게 웃는 소리인 ‘하하하’를 만들었다. 제목에 내포된 의미를 알고 보면, 정말 이 각자의 세 글자가 그 의미에 맞게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상류층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된 줄거리로 다루고 있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 영화에서 다룬 이야기만큼이나 화려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캘리그라피를 썼다. 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글자의 마무리에서 가녀린 느낌을 받는데, 이는 주연배우 전도연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와 연결해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영화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가 쓰인 다른 한국 영화(아시아권영화도)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독립적’이기보다 디자인과 ‘종속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캘리그라피의 특징을 영화와 캘리그라피와의 관계 속에서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