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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미스터 키디 명문집

 

 

미국 명문 예술대학인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의 교수이자 디자이너, 글꼴디자이너, 저술가인 미스터 키디(Mr. Keedy, 본명 제프리 키디)의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이 나왔다. 번역서이지만 영어 원서는 별도로 출판된 적이 없고, 1987년에서 2005년에 걸쳐 여러 간행물에 산발적으로 실린 미스터 키디의 글 12편을 모아 만든 명문집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지원은 단순한 번역자를 넘어서 미스터 키디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기도 하다. 이 모음집의 제목도 번역자가 새로 만들었는데, 이 제목에는 제자로서 또한 문구들과 직접 대면하여 언어적 변환의 과정을 거친 역자로서 이해한 책을 관통하는 미스터 키디의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글들의 시사점을 짚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 “지금”이라는 시간적 배경, 그리고 “우리”라는 대상을 상대로 한 글임을 천명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10~30년 전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우리가 보기엔 이미 싫증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선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논쟁에서 책이 시작한다. ‘지금’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지난 옛이야기다. 거기다 그 ‘지금’은 무려 20여 년에 걸쳐있다.


또한, 제목에서뿐 아니라 글 안에서도 미스터 키디는 ‘우리’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는데, 글에서는 미국의 그래픽 디자인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많다. 모더니즘을 유럽에서 건너온 바우하우스의 영향으로 간주하고 미국 디자인의 맹목적인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그 대안으로 모더니즘 이전 미국에 존재했던 절충주의 디자인이 가졌던 유연한 흡수성의 장점을 높이 사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인들의 자수성가형 성공담에 대한 유별난 사랑 덕에 정규 디자인 교육이 오히려 천대받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키디에게 ''우리''는 미국의 급진적인 디자인을 옹호하는 아주 좁은 범위의 독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아닌 곳에서 두 발 디디고 사는 또 다른 ''우리''에겐 먼 바다 너머 남의 이야기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특이점이 결국 뇌리에 남는다. 미스터 키디를 부연하는 다양한 직함 중에는 디자인 이론가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명문집 또한 그래픽 디자인 이론서라기보다는 상당히 주관적인 그래픽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 또한 여러 글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론이나 디자인 사례를 꼼꼼하게 분석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격정적으로 급진적인 디자인론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아래 문구들을 한 번 살펴보자.


- 디자이너를 향해 말하는 디자이너, 성가대를 향한 설교, 둘 다 필요 없긴 마찬가지다.

- 디자인 이론가와 강연자는 어려운 용어를 들먹이거나 지식인의 말을 인용하지 마라. 그런 학술적 지식은 본인의 얕은 생각을 감추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 현학적 언어가 혼란을 일으키고 평범한 디자이너를 따돌린다.

- 내용은 좋은데 스타일이 별로다.

- 디자이너는 언제나 실험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 영원히 지속할 디자인을 추구해야 한다.

- 디자이너라면 모름지기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키워야 한다. 독창성은 디자이너가 추구해야 할 목표다.

- 디자이너는 디자인 분야의 정황을 재편해야 한다.

- 디자이너는 더욱 자주적이어야 한다.

- 디자인 비평과 디자인 이론은 사실이 아닌 주관적 의견일 뿐이다.

- 디자인 이론은 디자인 분야의 의미를 찾는 활동이다.

- 형태는 내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 디자인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어디서 한 번씩은 들어 본 것 같은 이 경구들을 미스터 키디는 “과거에 디자이너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멍청한 소리들”이라고 일갈하며 “몽땅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소 급진적으로 들리는 이 주장들에 대해 문구마다 일일이 반박을 펼친다. 이를테면 영원히 지속할 디자인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이가 있다는 점에서 산타클로스와 민주주의를 닮았다”고 비꼬며 반박한다. 이 문구들과 반박을 모아 놓은 장의 소제목은 “멍청한 생각”이다. 이 글은 2004년 쓰였는데, 글을 시작하며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이 젊었을 때도 했던 어리석은 짓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2004년 미국의 디자이너들이 고민하던 문제들이지만 실은 70~80년대에도 유효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꽤 많은 부분은 지금의 한국에서 디자인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바로 이 지점에서 키디의 글이 지칭하는 ‘우리’는 물 건너 산 넘어 ‘나를 포함한 우리’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이제 ‘지금’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이미 한물간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글이 쓰였던 19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현장성이 글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금 현재의 시각이 아니라 그 유동적이고 아직은 무엇인지 정확한 윤곽이 보이지 않고 희끄무레하던 그 변화의 시기에, 그 현장의 한가운데에서 미스터 키디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모더니즘 디자인의 폐해와 포스트모던이라는 미명 하에 저지른 쓸모 없는 난장들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그 글들은 모두 쓰인 당시의 “지금”을 아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얼만큼이나 치열하게 지금을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미스터 키디의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유효한 까닭이다.


또한, 키디의 신랄한 비판 속에는 매 순간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낙관주의가 숨어있다. 1995년에 쓴 “좀비 모더니즘”에서는 폴 랜드를 통해 존 듀이를, 로빈 킨로스를 통해 하버마스를 끌어들이며 거창한 철학 이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디자이너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 시대에 맞는 우리의 디자인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4년의 글 “스타일은 방귀가 아니다”에서는 아돌프 로스와 할 포스터의 장식과 디자인에 관한 비판이 디자인 외적인 요소로 디자인을 재단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경제학자인 버지니아 포스트렐의 이론을 통해 디자인 고유의 가치와 디자이너만의 능력에 의한 스타일과 취향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디자이너가 이 현실을 구원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기에 디자인에 대한 굳은 애정과 낙관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매섭게 디자인의 현실을 비판하며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 해답은 마지막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명문집의 마지막에 있는 “경험 vs. 교육”에서는 정규 디자인 교육이 불필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심각한 판단 착오이며,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공고히 하고 더 나은 디자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비평적, 이론적 학습을 꾸준히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미스터 키디의 무수한 디자인 현장 비판은 결국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디자이너들이여, 제발, 공부하라!”

 


*이 책에는 산돌명조네오1, 산돌고딕네오1, 바른지원체 본문용, 그리고 키디 산스(Keedy Sans)가 사용됐다.

 

 

 

지금, 우리의 그래픽 디자인: 미스터 키디 명문집 (Our Graphic Design of Our Time)


-저자: 미스터 키디(Mr. Keedy)

-역자: 이지원

-출판: 스테파노 반델리

-152x226 mm / 226 쪽 / 15,000 원

-ISBN 978-89-969283-3-1

 

-목차

모더니즘, 근대주의, 현대주의

본문 중 저서, 작품명 표기

1987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스타일과 취향으로 기름칠하기 미국 그래픽 디자인 사회의 '전문성'

1993 복고풍을 좋아하거나……, 혹은 아니거나

1993 대마초 전문가가 말하는 타이포그래피 법칙

1994 지금 그래픽 디자인은

1995 좀비 모더니즘

1997 글꼴 디자이너 아니면 글꼴을 만드는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는 타이포그래퍼

1998 포스트모던 시대의 그래픽 디자인

2001 히스테리

2003 디자인 모더니즘 8.0

2004 멍청한 생각

2004 스타일은 방귀가 아니다

2005 경험 vs. 교육

옮긴 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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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문희채

예술학과 미학을 공부했고, 현재는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한 문화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시도하고 있다.

Tag
#그래픽디자인 #글꼴디자인 #칼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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