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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에 대해서... _ 나조영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에 대해서...
 
글  나조영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는 행위를 우리는 ‘자살’이라고 하는데, 통상 자살에 대해서 우리는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지난 주 우리를 매우 황망스럽게 했던 전임 대통령의 ‘서거’를 두고 한 언론인이 ‘자살’ 운운하며 아직도 소란스러운 것은 바로 ‘자살’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사회적 기의(記意)를 충분히 확인하게 한다. 그는 이성이라는 틀로 이 사건을 사건 그대로 ‘자살’이라고 보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자살’의 부정적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중과 언론은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현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기를 삼갔던 것이다. 그는 과학과 이성의 틀로 그 어휘를 중립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어휘들은 사회적 기의를 함축하며, 특정한 가치평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살을 강조하는 그의 태도는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 그의 죽음을 폄하하고자 하는 태도로 읽혀지기에 충분하다. 반면, 대중과 언론은 법정 용어인 ‘사망’의 높임말로써 ‘서거’를 사용함으로써 그에게 애도를 표한 것이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1867년 출간된 J. M. W. Silver의 "일본의 관습과 풍습에 관한 스케치"의 한 삽화. 출처 WIKIPEDIA.ORG

이토록 자살이라는 용어에는 부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동양 사회에서 자살은 그다지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장려된 것도 아니지만, 동양에서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숭고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것은 자신에게 다가올 치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최후의 응답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숭고한 행위로 여겼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러한 태도를 매우 의로운 것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그 자체로 그 죽음을 존중했다.

수많은 전설 속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노비나 농민들이 그 누명의 원인을 제공한 자의 집 앞에서 목을 메어 죽음으로 응답하는 것. 또, 위급한 상황에서 은장도를 꺼내어 자신의 목숨을 끊거나, 가망 없는 듯한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가족과 노예들을 모두 죽이고 전쟁에 나가 자신도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그것이다. 순장(殉葬)의 풍습 역시 근대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명예로운 자를 죽음으로 따르는 고귀한 행위로 인식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태도가 하나의 미학적 태도로 변화된 것이 일본의 셋푸쿠(切腹) 혹은 하라키리(腹切り)일 것이다.


유키오 미시마에 의해서 1966년 제작된 유코쿠(憂国,Patriotism)의 한 장면 © The Criterion Collection

그러나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의해서 시민사회가 형성된 서구에서 자살은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악, 범죄와 같은 것이다. 물론 서구에서도 탐미적 형식의 하나로써 미학적 자살의 형태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독교적 가치는 자살을 하나의 범죄로 여겼다. 자살을 기독교적 소명을 다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이 저지르거나 정신적 질병에 의해서 자행하는 잘못된 행위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1960년대 중반까지 일부 서구 국가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를 범죄자로 여기는 법이 명문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영향관계 때문인지 몰라도 통계청에서 자살과 관련된 설문조사는 ‘보건 가족’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통계를 내는 이유는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근거자료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분석 태도는 자살을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병리학적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계청에서 지난 2008년 11월에 배포한 ‘자살에 대한 충동여부 및 이유’에 대한 결과를 보면, 2006년에 전체 인구의 10.3%가 충동여부 및 이유가 있다고 답한 반면, 2008년에는 7.2%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러한 수치적인 측면을 보고 언론에서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인구가 감소했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러한 태도는 수치놀음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사회나 전체 인구의 10% 언저리에서 자살충동과 같은 극단적 행동에 대한 욕구는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율은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대략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다만, 이러한 비율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기 시작한다면 혹은 5% 미만으로 떨어진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것도 혹은 너무 적은 사람이 그러한 극단적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모두 다 이상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살 충동을 느끼는 15세에서 19세 사이의 청소년들 중에서 50% 이상이 성적과 진학문제로 이러한 충동을 경험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대에서는 대부분 직장문제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러한 충동을 느끼며, 30대 이상부터는 경제적 원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부적으로는 20-30대에서는 고독과 같은 외로움, 30-40대의 경우 가정불화 등으로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고 답하는 비율이 20%에 육박했으며, 60대 이상에서는 질환 등의 원인이 37.1%였다. 이러한 통계가 드러내는 것은 각 세대마다 그 세대에게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는 상황이 그다지 잘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것을 충동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10대에게는 성적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고 20대에게는 사랑과 직장이, 30대와 50대에게는 가족과 경제 문제가, 그리고 60대 이상에게는 건강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충동의 경험이 실제 행위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검증된 바가 없다. 그래서 자살에 대한 모든 평가는 모두 사후적인 것이 된다. 자살에 대한 평가를 내기리 보다는 오히려 그 죽음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지난 5월 21일은 대법원에 의해서 한국에서도 처음으로 존엄사가 인정된 날이다.
 



 
나조영_문화연구 및 문화 인류학 전공. paul.jy.nah@googlemail.com

문화 인류학적 시각으로 동시대 사회문화현상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을 즐긴다. 모든 트렌드에 대해서 호기심이 있지만, 그 트렌드를 쫓아 가기 보다 사회 문화를 분석하는 틀로 삼고자 할 뿐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게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서 디자이너가 적용 전유 가능한 또 다른 시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Tag
#자살 #가치평가 #존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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