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마커스랩(www.markerslab.com)의 디자인 소화기와 콜라보를 통해 시흥시 x 공공소통연구소(이종혁 교수)가 전개한 '소화기 갤러리'는 일상 속 소화기에 대한 인식을 혁신적으로 바꾼 공공 캠페인이다. 화재 예방에 있어 소화기의 중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다. ‘소화기 1개가 소방차 10대’의 가치를 갖는다는 표어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소화기는 늘 공간의 바닥 구석에 놓여 있거나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어딘가에 치워 놓는다.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는 소화기를 만나는 것은 낯설지 않다.

겨울이 되면 주택에서 발생하는 화재가 전체의 28% 정도다. 소방차는 좁은 골목길 앞에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 한 채 서 있고 소방대원들이 호스를 끌고 힘겹게 달린다.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 초기 진화 가능성도 점점 줄어든다.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구간이 서울에만 200 곳이 넘는다. 전국적으로는 1,400 곳에 이른다.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 후 5분이 지나면 모두 타게 되는데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에 주민들이 대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소방차가 빠르게 진입할 수 없는 곳에서 소화기 1대는 소방차 10대와 맞먹는 효과를 발휘한다.

‘골목길 소화기’는 유사시 누구든지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주요 통행로 중 눈에 잘 띄고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곳에 설치된 소화기함이다. 하루 120건 넘게 불이 나는 12월.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소화기 하나라도 유심히 살펴보자. 누구나 골목길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당사자일 수 있다. 실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먼저 대피하고 119에 신고한다. 실외 골목길 화재 시엔 119에 신고하고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골목길에 비치된 소화기로 화재를 진화하자. 작은 불에서 큰 불로 옮아가는 아찔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한다면 화재를 초기에 진화할 수 있다. 평소 소화기 위치와 사용법을 숙지해 골목길 소화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먼지 쌓인 소화기, 구석에 놓여있는 소화기가 아닌 누구나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늘 '전시'되듯 위치해 있는 소화기, 늘 시야에 들어오는 소화기가 '화재에 대한 안전의식', '화재 시 직관적인 행동 유도', ' 일상 속 화재 대처에 관한 안전 행동 요령' 등을 상기시키고 유도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이미 '골목길 소화기' 설치 캠페인은 여러 지자체와 소방서에서 진행 중이다. 하지만 확산을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이 약간의 사비를 들여 각자의 공간에 소화기를 놓아두는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이러한 변화와 실험은 때로는 정책으로 실현되기도 하지만, 우리 일상에 놓여 있던 기존 사물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바닥의 구석에 놓여있던 소화기를 잘 보이도록 '높이'를 조정하거나 '위치'를 바꾸는 것 그 자체가 때로는 가장 가치 있는 공공 디자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가치 기반 공공 디자인을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넛지임을 알아야 한다.